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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Feb 23. 2019

[ROTC 장교 한 번 해볼래?]
칼로 만드는 예술

그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예도단.

“받들어 칼!”
 “축혼!”


[챙챙챙챙] 

버진로드(Virgin Road)에 나란히 선 각 잡힌 후보생들이 예도 칼을 꺼내어 하늘 높이 올린다. 서로 맞닿은 칼을 부딪히며 칼로 박수를 치듯 맑은 소리로 신랑 신부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준다. 10명의 후보생들이 예도 칼로 만들어낸 아치를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나비넥타이 턱시도로 멋을 낸 신랑이 함께 걸어간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실제 결혼식에서 보는 것은 장관이다. 


예도단이 만드는 각 단계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결혼 행진을 마칠 수 있는데 더욱이 선배를 골탕 먹이는 후배들의 재치 있는 장난이 결혼식의 묘미를 더한다. 신랑 신부 행진을 양쪽에 나란히 선 후보생이 아래로 칼을 내려 각각의 관문을 만들고 미션을 부여한다. 


“선배님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신부님께 묻겠습니다. 신부님은 선배님을 남편으로써 백점 만점 중에 몇 점 주시겠습니까?”

“배.. 백점이요”

신부가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하면 후보생은 다시금 크게 호통친다.


“신부님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습니다. 백점 맞습니까?”

“네, 백점 맞습니다.”

“아름다운 신부님께서 선배님께 백점을 주셨습니다. 선배님은 지금부터 팔굽혀펴기 백개 실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보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객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장내를 울린다. 당황한 선배가 엉거주춤 자세를 취하면 후보생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선배님, 동작은 신속하게 취하도록 합니다.”

“하나, 둘, 셋, 넷, 십칠, 이십오, 사십구, 오십칠, 팔십육, 구십칠”

유격 조교가 따로 없다. 선배는 행진하다 말고 엎드려서 팔굽혀펴기를 시작한다. 선배를 생각하는 후배의 따듯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띄엄띄엄 숫자를 세어간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하객들은 다시 한번 크게 웃는다.

“구십구, 구십구, 구십구, 구십구…” 

그럼 그렇지. 좀처럼 100이라는 숫자가 끝나지 않는다. 신랑의 얼굴이 슬슬 빨갛게 달아오를 무렵 후보생 입에서 “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선배님의 체력은 현역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신부님과 오래오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덕담과 함께 한 개 관문의 문이 열린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닌 내가 결혼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후보생으로 수많은 예도를 다녀 예도에 대한 감흥이 전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식장에서 예도단을 맞이하니 예도를 하러 다닐 때 알지 못했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떨리던 가슴을 겨우 부여잡고 “신랑 입장”소리에 발을 겨우 떼었지만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후배들을 보니 어찌나 든든하던지. 짧은 순간이지만 예전 나의 20대 후보생 모습이 생각나면서 가슴속에서 뜨거운 자신감이 용솟음치는 기분이었다. 


ROTC 출신 중에서도 결혼식에 예도단을 부를까 말까 고민하는 이들도 많고 또 생략하는 일도 많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의 20대 모습과 겹쳐지는 후배들을 보는 그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일생에 한번 예도를 받을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예도는 공짜가 아니다

물론 예도는 공짜가 아니다. 밖에서 만나는 많은 친구들이나 집안 어른들이 “ROTC 참 좋구나, 이렇게 후배들이 와서 예도도 해주고." 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배들이 기꺼이 선배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다고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후배들도 바쁜데 주말을 반납하며 선배 결혼을 축하해 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예도를 부르는 선배와 예도에 참석하는 후배의 상도덕이 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암묵적인 계약이 있는 것이다. 선배는 최소한 차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쥐어줘서 돌려보낸다. 식장에 왔으니 식사는 당연히 제공한다. 후배는 선배 결혼식장에 후보생 단복을 갖춰 입고 예도 칼을 들고서 행사에 늦지 않게 당도해야 한다. 그리고 갖은 이벤트로 예식 분위기를 담당한다.


대학시절 한창 결혼이 많은 4~5월에는 예도만 열심히 나가도 용돈 벌이에 꽤 큰 도움이 됐다. 경사에 참석해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그리고 좋은 일을 하고 오는 거라 오가는 발걸음도 가볍다. 주말에 단복을 챙겨 입는 것만 아니면 나무랄 게 없다. 


예도는 공식적으로 학군단에 요청하기도 하고 비공식적으로 후보생 중 예도 단장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첫 번째는 학군단 승인절차를 거쳐야 해서 보통은 두 번째 코스가 많이 이용된다. 이른바 비승인 '보안예도'다. 비공식적인 사항인 만큼 단가(?)는 조금 높지만, 협의가 수월하기 때문에 열에 여덟은 보안예도를 찾게 된다.


다양한 학교의 후보생들 / 출처: ROTC 중앙회
우리 학교 선배만 선배가 아니다.

예도는 자신의 출신학교 후배를 찾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식장이 학교와 멀거나 후배들의 일정으로 인해 지원이 어려우면 가장 가까운 학군단에 문의해서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 ROTC의 원칙으로 '3무 1존 3예'가 있다.

‘학연, 지연, 정치와 종파 초월’(3무), ‘오직 기수’(1존), ‘선배에게 존경을, 후배에게 사랑을, 동기에게 우정을’(3예)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선배는 다 같은 선배고 후배도 다 같은 후배다. 동기들도 서로 나이를 묻지 않는다. 같은 기수면 학교불문 나이불문 동기인 것이다. 


전국 어디에서라도 부르면 찾아와 줄 후배가 있다. ROTC 출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후배들이 만들어준 예도 아치의 버진로드를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는 경험을 모든 후배 장교들이 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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