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얼마 전 5번째 4월 16일이 지나갔다. 그 당시 나는 영국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저녁 무렵 습관적으로 열어보았던 인터넷에는 세월호가 뉴스가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었고 시시각각 올라오는 사진 속의 배는 점점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2014년 4월 16일은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나의 나라에서 배가 가라앉고 있던 그날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한 챕터에서 다루고 있다. 전체 책에서 보면 책에 소개된 많은 연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2019년 4월 16일을 지나면서 이 부분에서 오랫동안 생각이 머물렀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회하고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안전한 대한민국은 불가능합니다. 이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대립할 영역이 아닙니다. 어떤 사회를 꿈꾸든, 그 사회 구성원이 살아남아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한국사회는 비극으로만 기억되는 기존 재난들과는 다른 이름으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만들어진 세월호 특조위가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밤낮으로 조사한 결과물을 제대로 검토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중략)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는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세월호 참사까지 기록 없이 이렇게 지나간 사건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이 참사의 연쇄 고리를 끊었던 사건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기억되지 않는다는 이 말이 그가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그 길을 가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개인의 질병부터 가슴 아픈 참사까지 그 모든 원인이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명확하게 개인의 건강과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사회역학.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그의 연구에 관해 읽으면서 사회와 개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그가 힘들게 담아낸 세월호 생존자 학생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친구들을 잃어버렸다는 슬픔과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도 있지만 아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자 아이들의 대학 입학 특례, 군 입대 특례 등을 보며 그 아이들의 아픔보다는 참사를 무기로 이익을 취하려 드는 존재로 낙인 시켜 버린 사회에서 아이들은 더욱더 병들어갔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세월호 생존자 아이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규정하는 다수의 집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가에 대해서 보여준다.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성애도 그러하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 대부분의 이성애자가 스스로의 성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서 이성애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자 역시 스스로 선택하여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개인의 신념에 사회적 문화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똑같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더 힘들고 아파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들은 이성애자들에 비해 더 아픕니다. 1966년부터 2005년까지 출판된 성소수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28편의 연구를 분석한 논문에서, 이성애자에 비해 성소수자의 자살시도 유병율이 2.5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유병률이 1.5배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3편의 연구는 사회 제도적 차별로 인해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이 아프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논문들과 성소자들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그들은 우리보다 더 힘든 시간을 살아간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것이 치료해야 하는 질병과 같은 것이고 고쳐질 수 있는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차별의 이유나 그 차별로 인해 아파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성소수자들 뿐만 아니라 HIV/AIDS 환자, 트랜스젠더 등과 같이 사회에서 차별받고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르는 것이 더 많아 부끄러웠다. 막연히 힘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랐다.
이 부분을 읽으며 얼마 전 한국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낙태죄 폐지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뉴스에서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낙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가 이슈가 되면서 여러 가지 글과 동영상을 보면서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낙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 임신중절 시술을 했던 의사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아픔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낙태가 죄가 되는 사회에서 불법을 행한 사람들은 성분도 알 수 없는 약을 먹고 엄청난 출혈을 소리 없이 감당해 내야 하고 시술을 받더라도 몸을 회복하기 위한 그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의 많은 것들이 변해가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 시선이다. 대한민국에서 이제 낙태가 죄가 아니더라도 낙태를 한 여성들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낙태에 대해서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시선도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아직까지도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많은 이슈들을 바라볼 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서 사회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낙인에서 비롯되는 모든 문제를 단순히 개인이 짊어지고 해결하도록 해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사회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고 그로 인해 당사자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사회가 개인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사회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다. 사회가 우리의 삶의 위협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대부분 개인의 책임이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쌍용자동차 사태이다.
2009년 4월 쌍용자동차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자 2646명에 대한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같은 해 5월 평택의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8월 공권력에 의해 종결된 농성은 462명 무급휴직, 353명 희망퇴직, 165명 정리해고라는 결말을 가져왔다.
쌍용차 문제는 재난의 문제다. 인간이 만든 해고가 인간 삶을 부수는 근단의 형태로 드러난 정치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이 6년 동안 지속되는 와중에 국가는 해고자와 가족이 다시 설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했고 쌍용자동차 관련 노동자와 가족 28명은 죽음으로 이 재난의 사회적 의미를 알려주었다.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해고 노동자 전원 복직이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환하게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와 불안은 사람을 극단의 두려움으로 몰고 간다. 개인마다 그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을 개인적인 문제로 다뤄서는 안 된다. 사회는 개인이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며 고립되어 살아가도록 만들어서는 안 될 책임이 분명하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Social epidemiology (사회역학): branch of epidemiology concerned with the way that social structures, institutions, and relationships influence helth (역학의 한 분야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 제도, 관계 등을 추적하는 학문)
책의 여러 부분에서 언급되듯이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은 정의되고 연구가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연구에도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사는 그 사회를 통제하고 변수로 놓아 실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실험 결과 또한 단기간에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역학의 가슴 아픈 점은 이미 일어난 사고, 참사, 현상에 대하여 그 원인을 파악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원인을 파해 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들지도 모른다.
40여 년 전 레이온과 석면을 생산하는 일이 노동자의 몸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잘 알면서도, 일본은 한국에 동양레이온의 기계를 넘기고 합작회사인 제일화학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노동자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한국 노동자들이 겪을 이황화탄소 중독과 악성 중피종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그토록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이 누군가에게 1964년의 동양레이온이나 1971년의 일본 석면이 되어서는, 아니 1994년의 원진레이온이나 1990년의 제일화학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의 제목이 김승섭 교수가 몸담은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이 아픔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길이 되기 위해서 그 사건을 연구하고 알아가야 한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도 그 책임을 같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다음을 없게 하는 것이 사회역학의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김승섭 교수에 대해 또는 사회역학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면 그의 다른 책인 『우리 몸이 세계라면』책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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