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만 해도 나는 철학과 논리적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고, 나만의 철학과 가치관 등을 확립하려다 보니까 무(無)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우울하고 괴로워서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환경적 피해가 없는 자연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환상적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아무 고통도 없이 사라진다면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대단하고 인간은 그런 자연을 발전시키는 데에 너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분명 자연이 발전해서 우리가 있음에도 우리는 맑고 깨끗한 자연의 초심에서 너무 떨어지게 된 것이다. 환상적 생각이라고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현실과는 대응되지 않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무(無)로 가고 싶은 마음과 무(無)로 갈 수 없는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이제 와서 중요했다. 그러나 내 정서와 감성을 한 때 구성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한 환경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난 나뭇잎이나 낙엽을 보면서 자연적인 것 중에서도 가장 해가 없고 흙에게 도움이 되어서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성경과 각종 종교에 묘사되는 베엘제붑(beelzebub)은 마왕, 악마, 사신 등의 의미를 자니고 있지만 실제 묘사되는 모습은 파리의 왕이다. 상하고 썩은 것들에는 항상 파리가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뭇잎은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파리 한 마리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 내가 나뭇잎을 외적이나 내적으로 깨끗하게 생각하고 동경하게 되는 점인 것 같다. 나뭇잎은 인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인간의 그런 악한 특성이나 마음 또한 없다. 그릇된 욕망이 없고 한(恨)이 없다. 그러므로 지독하지 않다.
나는 20살 때 우울증이 심해져서 유학을 그만두고 한국에 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공상과 망상에 빠지다 보니 감성과 우울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조리 즐기게 되었고 우울증이 일상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가벼운 우울은 즐기면 프랑스어로 멜랑콜리해진다거나 센치해지지만 깊은 우울을 즐기게 되면 그 늪에 빠지고 정신이 황폐해진다. 그리고 나는 더 비참해지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스스로 정체되는 시기 정도라고 생각했었지만, 내가 썼던 글을 읽으며 뒤돌아보면 그때가 너무 힘든 나날들임을 안다. 나는 3년쯤 지난 지금에야 우울을 다루는 능력이나 생산성을 나름대로 조절하며 잘 지내는 편이지만, 몇 년 동안의 글들을 모아보니 글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심각했다. 중요한 것은 우울 기질과 우울증은 다른 것이었다.
이 글은 내가 처음 브런치에 발행하는 글이다. 글에서 우울감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공감해주는 장치로써 쓰여야 되는 것이었다. 내 괴로움을 그저 배설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쓰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나는 조금씩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연습하고 있다. 내 우울의 경험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우울한 시가 아닌,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쓰고 싶다.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야, 정확히 말하면 흙에 떨어져야 분해가 시작되고 흙의 일부가 된다.
흙에 도움을 받지 못한 나뭇잎은 이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듯이 엽록소의 죽음과 함께 갈색으로 변해 조용히 견고하게 시위한다.
나는 자연이 동경해서 내가 없어지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수분과 엽록소의 초록색을 잃어버린 바삭한 나뭇잎이 너무 좋아서 산에 갔을 때 한번 더 나뭇잎을 데려왔다.
또다시 잎은 말라서 딱딱해지고 색을 잃어 갈색이 돼가겠지, 그런데도 어떤 파리(Beelzebub) 한 마리도 불러내지 않은 채 어떠한 해로운 것이나 아무런 고약한 냄새도 내뿜지 않은 채 담담히 무(無)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