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대한 소회

by 아녜스

얼마간은 시들해진 느낌으로 지내다가, 얼마간은 오기로 버텼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가 스토킹처럼 지속해서 괴롭혔다.

시작은 목을 타고 오더니 코로 옮겨서 자리를 틀었다. 목에선 가래가 끼고 마른기침이, 코에선 콧물과 재채기로 몸은 기진맥진이 되고 8월 한 달 내내 골골거렸다. 그야말로 감기 증세가 동시다발 종합 선물 세트처럼 들이닥쳤다.

병원 처방 약을 3번씩이나 먹고 수시로 생강차, 홍삼이며 좋다는 건 죄다 챙겨 먹어도 당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만, 달이 바뀌니 바동거리듯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마법의 주문을 외듯 “살 라카 둘라 메치카 둘라 비비디 바비디부”를 읊조리며 느릿느릿 저급 체력을 복귀시키고, 상승과 하강곡선을 넘나들던 감정도 추스른다.


흔히 감기를 만병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감기가 오래갈수록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감기에 관한 정보를 여기저기 뒤져보고, 증상이 비슷하게 겹치기라도 하면 오버해서 안 해도 될 걱정까지 사서 한다. 그러다 면역력을 탓하고 건강관리에 소홀했던 자신을 원망하다가 건강에 대한 자만심도 수그러들고 급 겸손해진다. 연례행사하듯 한차례씩 감기를 치르면서도 아플 때마다 증상들이 다르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친정엄마의 단방 요법

난 어릴 때 감기를 끼고 살았다. 겨울만 되면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걸려있었다. 게다가 약이라고 생긴 건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부실한 아이였다.

특히 기관지가 약해 약을 끼고 살다시피 하여 친정엄마의 애물단지였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민간요법에 대해서 유별나게 관심이 많으셨고 해박하셨다. 특히 민간요법 중 단방 요법에 강하셨던 것 같다.

요즘은 민간요법 중 약효가 증명되어 치료제로 개발되기도 하지만, 5~60년 전 당시만 해도 단방약의 효능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적이고 보니 신뢰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암튼, 우리 형제들은 자라면서 엄마의 관심사였던 단방 요법에 대해서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고, 당신만 알고 계신 노하우를 우리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잘 활용하셨다. 그 활용의 정점에는 고질병처럼 끼고 살던 나의 기침감기 해소와 부실했던 체질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그게 다 엄마의 단방 요법 덕분이었다.


어릴 적에 살았던 우리 집은 마당이 꽤 넓었다. 화단에는 채송화, 분꽃, 샐비어, 달리아 같은 아기자기한 꽃들이 가득했고, 빨간 장미꽃 덩굴은 대문 담벼락을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화단 가엔 아주 커다란 히말라시다 나무가 버티고 있었고, 그 옆에는 키 큰 목련 나무가 있어서 봄이 되면 백목련 꽃이 만발하여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외에도 감, 포도, 앵두나무, 무화과 등 과실수가 심어 있어서 남들이 말하는 정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만물상 같은 화단이었다. 화단 중간에는 그늘막처럼 드리운 수세미가 있었는데 그 수세미가 나의 약한 기관지를 치료해준 특효약이 었다.

엄마는 수세미 줄기를 잘라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을 병에 받아 그 물을 아침마다 내게 마시도록 했다. 엄마의 정성도 정성이었지만, 난 쓰디쓴 가루약보다 맛은 밍밍해도 수세미 물을 마시는 게 더 좋았다. 엄마의 기억에는 2리터 되는 소주병으로 여러 병을 마셨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해를 거듭할수록 감기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기관지도 좋아져서 호흡이 가빠서 많이 힘들었던 달리기를 곧잘 하게 되었다. 엄마의 정성 표 수세미 수액의 효능은 나를 임상 실험한 결과 검증된 셈이었다.

엄마의 각별한 보살핌은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허약한 딸의 체력 보충을 위해 좋다는 것은 단방약이든 뭐든 백방으로 챙겨주신 덕분에 차츰 건강하고 튼튼해진 것만은 확실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감기로 골골하다 보니 어릴 적에 마셨던 수세미 수액이 생각나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동의보감 등 한방 서적에서 발췌한 수세미 효능이 한가득이었다. 그야말로 열매며, 씨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만병통치 치료제로 이용되고 있었다.


어디서 좋다는 만 들으면 곧장 실행하시던 엄마의 단방 요법 때문에 때론 싫은 말도 내뱉고, 아는 상식에서 벗어나면 반기를 들었던 기억도 생생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는 엄마대로의 삶에 대한 지혜와 철학을 나름대로 실천하셨던 것 같다.

벌써 90세가 넘은 친정엄마. 여전히 단방 요법의 대가답게 이것저것을 알려주시지만, 의약이 발달하고, 민간요법에서 좋다는 것은 제품으로 마구마구 쏟아 나오고 있어 애써 귀담아듣지 않는다. 엄마처럼 정성을 들여가며 만들고 애쓰는 노력을 내가 실행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도 감기의 최고의 명약은 단연 수세미 수액임을 손가락으로 치켜세우는 당당하신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참 좋다.


기가 꺾인 여름은 계절 끝자락에 서있다.

가는 여름이 아쉽다기보다는 과거로 가는 시간은 되돌아올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시간은 얼마쯤은 여운을 두고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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