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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May 30. 2022

가닿지 못할 글을 쓴다

- 엄마의 헌신과 사랑

엄마가 그러셨다.

"세상에서 제일 부지런한 이 저 시계 추이지 싶다. 저건 일 년 열두 달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고 왔다 갔다 지 할 일을 한다. 보고 있으면 참말로 기특하고 이쁘더라"

엄마 집 벽에 걸린 30년도 훨씬 넘은 뻐꾸기시계를 쳐다보며 하셨던 다.    

엄마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다.

 바빴고 부지런하셨다.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면 기꺼이 언제든 환영했고, 당신의 존재가치를 거기에 부여한 듯 일을 즐기셨다. 


슬하에 4녀 1남을 두신 울 엄마

아버지(1991년 작고, 64세)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드리고, 61세에 홀로 되어 31년의 세월을 지내 오셨다.

평생 기독교 신앙의 믿음으로 살아오신 엄마 덕분에 우린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자연스러웠다.

작은언니와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 각각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우리의 선택을 그대로 인정해주셨다. 종교에 대한 편견과 강요가 없으셨고, 교회나 성당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믿음은 같다고 하셨다.    

엄마는 매일 새벽 4시면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새벽예배와 기도로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시력이 많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책을 읽으셨고, 한결같았던 신실한 믿음의 생활은 존경스러웠고 감사했다.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사촌언니, 오빠들이 시골에서 광주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사촌들이 우리 집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집은 복작거렸고, 엄마는 자식들과 조카들까지 챙겨야 해서 한시도 편히 쉴 여유조차 없었다. 그땐 젊어서 그랬는지 고생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그게 사는 재미였다고 하셨지만, 그 고충과 힘듦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그 후로도 엄마의 고충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자매들이 다들 맞벌여서 순서대로 엄마에게 SOS를 보내야만 했고 그때마다  당연한 듯 손주들을 맡아 키워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셨을 땐 힘도 부치고, 외롭기도 하셨을 텐데 그런 내색도 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손주들이 있어서 의지가 되고 시름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고 하셨다.  


엄마의 취미생활

“난 재미없고 심심하다는 게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른다"

그 말인 즉, 당신은 혼자서 즐길 것도, 할 일도 많아서 잘 지내고 계신다는 말이다.

엄마의 취미는 다양했지만 그중 화투 패와 야구를 빼놓을 수 없다.

화투 치는 것은 재미없다 하셨지만, 화투 패를 띠는 것은 무척 즐기셨다.

갑오 패, 재수 패, 12 장패, 거북이 패 등등.. 이름도, 치는 방법도 다양했던 엄마의 화투 패놀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이만한 게 없다 하시며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엄마가 화투 패를 띠면 우리도 곁에서 패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야구.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TV 스포츠 채널이 바빠진다. 기아 팬이신 엄마는 야구와 관련된 소식도 빠삭하고, 각 구단 선수들 이름이며, 이름이 어려우면 등번호로 외우셨다.

기억력은 끝내 주셨다. 우린 엄마의 그런 열정을 좋아했고, 열렬이 지지하고 응원했다. 요즘 한창 잘하고 있는 기아의 성적을 보셨으면 엄청 신나 하셨을 텐데..  

엄마의 취미생활은 황반변성으로 시력저하가 오기 전까지 주요 일과였다.


엄마의 성정 

엄마는 성정이 고우시고 낙천적이셨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표현도 잘하시고 웃음도 많으셨다. 때론 우리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가 통했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셨다.

친구분들도 많았고, 해외 나들이도 큰 형부, 언니의 일행들과 여러 차례 다녀오시곤 했다.

나이보다 곱고 젊다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셨고, 남 불쌍한 꼴 못 보셔서 잘 베푸셨다. 하나를 받으면 둘, 셋을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셨고 그것이 당신의 자존감이고 자부심이었다.    


엄마의 원칙과 기준

엄마는 당신이 편한 원칙과 기준을 정해두고 당신 마음 편하실 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재주가 남다르셨다.

우리 집안의 큰손인 두 언니와 형부들에게서 받은 용돈을 고스란히 모아서 나부터 동생, 막내까지 나눠주기 바쁘셨고, 우리 셋은 늘 맘에 걸리는 자식들이었다. 엄마 눈에 그리 비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무리 그러지 마시라고 해도 당신이 괜찮다 여기지 않는 한, 셋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게다가 아들 사랑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정도여서 그게 지나치다 싶을 때면 딸들은 엄마에게 압력을 넣으며 은근슬쩍 흉을 보기도 했다.   


손주들에게 인기 좋은 할머니

어쩌다 우리가 "울 엄만 복도 많으셔"라고 놀리면

언제나 "난 딸 다섯, 아들 다섯" 이라며 며느리를 딸로, 사위는 아들로 치고 자랑을 늘어놓신다.

"니들이 둘씩만 낳았어도 손주가 열 명은 될 텐데 일곱뿐이라(작은언니, 나, 남동생이 한 명씩) 아쉽지"라고 손주 욕심을 부리며 서운함을 드러내시곤 다.    

가족들 생일엔 어김없이 엄마의 축하인사가 일등이었고, 설날이면 빳빳한 새 돈으로 자식, 사위, 며느리, 손주들까지 봉투에 덕담을 적어 세뱃돈을 주셨다.

손주들이 다들 결혼할 나이가 지났는데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걱정과 성화를 번갈아가며 내셨지만 결혼축의금까지 미리 챙겨주고 가신 인기 좋은 할머니.  


"몸이 늙었지 마음까지 늙었다냐" 마음은 언제나 젊으셨던 울 엄마.

엄마는 92세 생신 일주일 앞두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셨다.

초록빛 눈부심이 슬픔으로 차올라 다시금 목이 멘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고 이제 나는 언제 떠나도 여한이 없다"라고 하시며 "내가 죽거든 엄마가 좋아한 커피는 잊지 말고 챙겨서 올려다오"라고 웃으며 당부하시곤 했다.  

"고맙다, 건강해라, 잘 살아라" 언제부턴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엄마의 마지막 말은 같았다.

엄마는 남은 하루하루가 어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말을 가족들에게 매번 하셨으리라.  

   

엄마는 의식을 잃은 후 3일 만에 임종하셨다.

요즘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임종을 맞게 하려면 조금 까다로운 병원의 사전 절차를 밟아야 하고, 사후에도 별도의 서류와 확인 절차가 필요했다. 병원 의사의 사망 확인 증명서와 112 경찰서 신고까지.

쓰러지신 엄마는 119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진단 결과 의사로부터 임종 준비를 라는 말이었다. 남은 시간은 3~4일 정도.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중환자실로 옮겨가 있는 동안은 보호자 1인 외엔 아무도 들어갈 수도, 만날 수도 없다는 병원 측 입장이 전해졌다.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다며 아주 완강했다.

우리 모두는 중환자실에서 홀로 임종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고, 급히 가족 모두 합의하에 병원에서 필요한 사전 절차를 모두 마치고 엄마를 집으로 모셔 왔다.

임종을 앞두고 이틀 동안 엄마 곁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음에 정말 감사드린다.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안아드릴 수 있었다. 엄마가 남은 가족들 걱정을 안 하고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모두가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엄마는 가시는 길 마지막까지 자식들을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코로나 시국에 받던 여러 제약들이 철폐되어, 우리는 엄마가 원하신 대로 장례를 편히 치를 수 있었다.

한기승 목사(광주중앙교회)님의 집례로 집에서 임종예배를 드렸고, 장례식도 입관, 천국 환송, 하관 예배까지 한 목사님께서 모두 해주셨다. 엄마도 무척 좋아하셨을 것이다.

5월 17일, 빛나는 아침 햇살과 함께 날씨도 맑고 화창한 . 엄마는 아버지 산소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고, 국화꽃 송이송이를 뿌려드리며 하늘나라 먼길을 평안이 가시도록 배웅해 드렸다.

많은 성도 분들이 묘지까지 동행해주시고 함께 자리해주셨음깊이 감사드린다.   

엄마! 영원한 안식처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소서! 사랑합니다!

< 2020년. 구순 때 엄마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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