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뉘엘 카레르, <러시아 소설Un Roman Russe> 비평적 리뷰
<L’Adversaire적>(2000) 이후로 Emmanuel Carrère엠마뉘엘 카레르(1957 - )의 작품에는 에로틱한 장면 혹은 성 에 대한 긴 단상을 예상치 못한 부분에 집어넣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Le Royaume왕국>(2014)에서 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방식의 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여자 친구와 어떤 포르노 영화에 대해 이메일로 토론했던 경험을 묘사했었다. 그리고 <D'Autres Vies Que La Mienne나 아닌 다른 삶>(2009)에서는 자기가 촬영하던 영화의 세트에서 아내와 몰래 성관계를 한 일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Le Royaume왕국>에서 카레르가 마카오 복음서에 삽입되어 있는, 예수가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갈 때 아마 포를 뒤집어쓰고 이를 몰래 지켜보았던 소년의 삽화를 두고 “si gratuit, qu’on a du mal à croire qu’il ne soit pas vrai1 너 무 뜬금없어서 사실이 아니라고 믿기 어렵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너무 뜬금없어서 사실인 것만 같은 이 장면들은 때로 주인공(대부분의 경우 작가 자신)에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진실의 빛을 발견하게 하는 힌트가 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소재는 작가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이다. 이 불안은 어 떤 때엔 그저 지극히 예민한 신경과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작가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멜랑콜리 비슷 한 것으로 보이나, 자주 그가 유년기와 성장기에 겪었던 정체불명의 오이디푸스적 문제와 엮여 그에게 자신은 영원히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언제나 그랬듯 변덕으로 인해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말 것이라는 자학적 자기 인식을 갖게 한다.
<Un Roman Russe러시아 소설>은 이 두 제재가 뒤섞여있는 꿈과 함께 시작된다. 꿈속의 카레르는 달리는 열 차 안에서 여자 친구 소피, 그리고 후지모리라는 이름의 부인과 함께 난교 행각을 벌인다. 그런데 이들이 타고 있던 열차는 창밖에서 이들을 예의 주시하던 러시아 정부의 비밀요원에 의해 갑작스레 운행이 중단 된다. 비밀 요원이 이들의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열차에 올라타려 할 때, 카레르는 두 여인에게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우리는 지하 수용소서 평생을 썩게 될 것이라 소리치지만 두 여인은 그가 소리치 는 모습이 우스운지 정신없이 웃기만 하고 그 모습을 보던 카레르도 결국 웃음을 터트린다.
이 꿈에는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를 소설 안으로 깊이 관여시키거나, 혹은 그 과도함으로 인해 오히려 독 자를 바깥으로 밀어낼 수도 있는 농밀한 에로티시즘이,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 및 그로 인한 불안이라는 ‘카레르적’ 소재와 함께 나타나고, 여기에 더해 ‘너무 뜬금없어서 실제라고 믿지 않을 수 없 는’ 디테일도 함께 혼합되고 있다. 무척 의미심장한 느낌을 풍겼던 후지모리 부인은 알고 보니 그가 그날 아침에 <Libération리베라시옹>지에서 본 일본계 페루 대통령의 이름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 기사 자 체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그보단 그 옆에 작게 실린 납북 일본인에 관한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다). 또 러시아의 들판을 달리는 기차 안이라는 꿈의 공간적 배경(얼마든지 정신분석의 소재가 될 수 있는)은 현재 그가 기차를 타고 쾨텔니치로 가던 도중이었기에 우연히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1 Emmanuel Carrère, Le Royaume, P.O.L ,2014
이 혼합적이고, 상징적으로 읽으려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꿈을 카레르는 더 파헤치려 들기보다는 그 저 ‘me semble extraordinairement prometteur2아주 좋은 징조로 여3’긴다. 그리고 이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소피에게 전화를 걸지만 소피는 받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그는 메모장에 꿈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해둔다.
이윽고 열차 내부를 돌아다니던 카레르는 러시아의 벽촌을 향하는 열차의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어떤 회상 속으로 빠져드는데, 그것은 자신이 인도네시아에서 대체복무를 하던 25년 전 어떤 여행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남자가 특별한 환각효과를 내는 버섯에 대한 소문에 이끌려 내 려선 안 되는 곳에서 내리는 바람에 촌락의 부랑자들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옮기며 카레르는 자신은 사실 평생 “à ce genre d’histoires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에 의지해왔다고 고 백한다. 그러고 보면 카레르의 소설은 항상 기이한 이야기에 사로잡혀있는 주인공들을 내세워왔던 것 같 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는 그 주인공에게 사로잡혀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도 소설 안에서 (그것을 취재하 고 있는 자기 자신을 등장인물로 집어넣음으로써) 함께 그려왔다. 카레르는 이 작품 <러시아 소설>에서 만큼은 그러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친족 살인범 장 끌로드 로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적>의 출간 몇 달 후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작품을 끝내고 자신은 이제 “이런 이야기”들로부터 완 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 야심 찬 계획은 성공했나? 그렇게 보기는 어렵겠 다. 물론 이 소설이 <적>이나 <왕국>등의 본격 르포르타주처럼 어떤 서사의 이면을 탐사-재구성하는 형 식으로 되어있진 않다. 그러나 조금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주인공(카레르)이 마주치는 것들로 부터 끊임없이 “이런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주인공은 이것의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 인식을 ‘재구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주인공이 상황으로부터 촉발시키는 장황한 상상들이 상황 속의 인물 과 사건에 대한 주인공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것이다. 안타 깝게 됐지만 이 소설에서도 카레르는 분명 이런 “이야기”에 사로잡혀있다.
예를 들어보자. 쾨텔니치의 정신병동에 수십 년간 이름도 없이 수용되어있던 2차 대전 패잔병 언드러시 토머에 대한 취재를 진행하면서, 그는 언론을 통해 그가 유명해진 이후에도 그를 알아보는 옛 전우가 전 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아해한다. 그러면서 그는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났더라면 늘어놓았을 말 들을 상상하는데, 이런 식이다. “Je le reconnais, nous étions dans le même bataillon, dans le même baraquement, un jour j’étais malade, je ne pouvais plus me lever, je serais mort s’il ne m’avait pas donné un peu de sa soupe ... 그래요, 이 친구를 알아보겠어요. 우리는 같은 대대 소속이었고, 막사도 같이 썼어요. 어느 날 내가 몸이 아파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이 친 구가 자기 수프를 조금 나눠주었어요.... " 이 상상은 이후 한 페이지 넘게 이어진다. 너무나 실감 나는 상 상이어서 그가 문득 “... C’est comme si, tout ce temps, il avait été seul ... 그는 마치 내내 혼자였던 사람 같다.”라고 말 을 맺으며 상상을 정리할 때엔 어떤 허무함까지 든다. 이 상상적 이미지는 그의 머리에 단단히 들어앉아 이후 그가 언드러시 토머가 수용되어 있던 병원에서 의사 유리 레오니도비치 박사나 페트로프 박사 등을 만날 때 그들의 행동을 어떤 신비감을 갖고 바라보게 하는 색안경으로 작용한다.
2 Emmanuel Carrère, Un Roman Russe, P.O.L, 2007. 이하 동일.
3 한국어 번역은 엠마뉘엘 카레르, 러시아 소설, 열린책들, 2017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역본의 뉘앙스나 내용이 원 문과 다른 경우 필자가 임의로 수정 함. 이하 동일.
사실 카레르가 사로잡혀있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의 속성이 무엇인지 좀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진술 방식이다. 이 소설 속에는 상징적, 심리적인 방식으로 심층 텍스트 분석을 해낼 수 있는 정황들이 수 없이 등장한다. 도입부의 꿈 장면이나, 주인공이 어머니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 를 써야겠다고 결심하는 대목 등. 그런데 이때마다 작가는 이런 정황들에 대한 진술, 혹은 ‘표층 텍스트’ 에 이에 대한 논평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심층 텍스트’를 함께 섞어 낸다. 가령 그는 <적>의 집필을 끝 마친 시점에서 어머니(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의 존재론적 불안의 원인이기도 한)의 고향 러시아가 무 대인 언드러시 토머의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Je me dis que oui, je vais raconter une dernière histoire d’enfermement, et que ce sera aussi l’histoire de me libération 그래 난 감금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 려주겠어, 그리고 이것은 또한 나의 해방의 이야기가 될 거야" 또 Kotelnitch쾨텔니치라는 이름이 <가마솥> 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상징성을 이렇게 요약하기도 한다. “Un séjour là-dedans, c’est une sorte de trois étoiles du dépaysement dépressif, et il y a tout lieu de penser que cette sensation d’encalminage au fond d’une marmite de soupe froide et figée d’où auraient depuis longtemps, à supposer qu’il y en ait jamais eu, disparu tous les bons morceaux, constitue l’ordinaire des villes de 20000 habitans de la Russie profonde. 이 안에서의 체류는 이를테면 우울한 유배 감정을 진국으로 맛볼 수 있는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괜찮은 건더기들은 - 그런 건더기들이 한 번이라도 존 재했는지나 의문이지만 - 모두 오래전에 사라져 버리고, 차갑게 굳어 버린 수프로만 채워진 솥 밑바닥에 정지하여 머물러 있는 듯한 이러한 느낌은 러시아 오지의 인구 2만 정도 소도시들의 일상...”
이처럼 진술과 해석을 중첩시키는 방식은 더 미시적인 층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Iouri Léonidovitch, en promenant son hôte, est passé devant le vieil unijambiste et l’a présenté comme le doyen de ses patients. Il sourit, attendri, au souvenir de cette scène. Je l’imagine lui pinçant l’oreille, comme Napoléon à ses grongards : un brave vieux, bien tranquille, qui est là depuis le guerre et ne parle que hongrois, ah ah ah! 이 손님을 모시고 다니다가 외다리 노인의 앞을 지나게 된 유리 레오니도비치는 그를 환자 들 중 가장 연장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나폴레옹이 근위병들에게 그랬듯 그가 노인의 귀를 짓궂게 꼬집는 모습이 상상이 간다. 자, 아주 조 용하고도 착한 노인네입니다. 2차 대전 때부터 쭉 여기에 있었는데 헝가리어밖에 할 줄 몰라요, 으이그 ...!” 이 문단에서 나폴레옹 연하는 문장의 뒤는 순전히 주인공의 상상인데 이는 마치 앞서 언드러시 토 머를 기억하는 전우가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하며 그가 펼쳤던 상상의 축소판 같은 느낌 도 준다. 어쨌든 이런 식의 하이브리드 진술은 소설 전반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실 이 문단 앞에 등장 하는 “Il sourit, attendri, au souvenir de cette scène. 그는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듯 미소를 머금 는다.”라는 문장도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문장이라기엔 다소 월권적이다.
1부의 마지막은 이처럼 주인공의 강한 논평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정초 된 문장, 인식, 상상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세계 인식 방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주인공은 2차 대전 직후 인 50년대에 동유럽 각국에서 실종자들의 장례 작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소재를 파악할 길이 없는 이들 을 사망처리했던 일을 언급하며, 병원에 온 이래로 늘 폭력적이고 통제불능인 모습만을 보여주던 언드러 시 토머가 바로 그즈음에 (마치 고국에서 자신을 사망처리 한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불현듯 조용 하고 무기력한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어 카레르는 다음의 문장을 통해 자신이 의료기록과 신문 기록을 조합해 만들어낸 이 서사적(혹은 상상적) 인과관계가 진짜 현실적 인과관계 이기라도 한 것처럼 확정 짓는다. “On l’a déclaré mort, et il est mort. 사망 선언이 내려지자, 그는 죽었다.”
이렇게 진술과 논평을 뒤섞는 방식은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막고 작가 자신의 시선을 강요하는 것처 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독자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볼 권리가 없다는 듯이. 전 층위에 걸쳐 두루 나타 나는 작가의 이 같은 태도에 혹자는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겠고, 또 이것은 오만한 작가적 자아의 발로 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이와 관련해, 다소 속류적인 접근법이라는 비판을 감 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가의 특수한 계급적 배경을 한번 검토하고 넘어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학습지 교재 회사에 다니는 여자 친구의 삶을 '천민'적이라고 말하고, 뢰 섬에 별장을 두고서 작가, 영화감독, 혹은 출판사 사장인 친구들을 초대해 매일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 저명한 러시아 근현대사 연구자이자 프랑스 학술원의 종신 원장인 어머니를 두고 있으며 그 자신도 베스트셀러 작가 겸 영화감독으로서 온갖 문학 페스티벌과 영화제를 옆 동네 놀러 가듯 다니는 사람, 여자 친구를 위 한 선물로 <Le Figaro르 피가로>지에 외설적인 소설을 장난으로 실을 수 있는 사람. 그의 특수한 계급적 지 위는 이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그의 '오만한 작가적 자의식’에 대한 우리의 속류적 의혹에 아주 맞 춤한 설명을 제공해주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그가 쾨텔니치를 취재하러 갔을 때에도, 비록 그 도시가 술집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자기가 싸우는 상대방이 건달인지 경찰인지 분간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 로 혼란스럽고 경계가 흐트러진 곳이라고는 하나, 외국에서 왔다며 다짜고짜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 는 이들이 FSB(KGB)의 간부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며 개인적 관계까지 맺게 되는 일은 그들이 프랑스 가 아닌 어디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이들이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카레르의 취재 대상이었 던 의사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그에게 자신은 언젠가 프랑스에 가보는 게 꿈이라며 수줍게 말을 건네고, 제공이 금지되어있는 언드라시 토머의 의료 사본 파일까지 그를 위해 몰래 찔러주었던 대목이라 든지 FSB 요원 사샤와 그의 아내 아냐가 프랑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낭만적 환상 등을 떠올려보면 우리 의 이 모든 의혹이 점점 더 정당한 무게를 부여받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게 정말 맞을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백인 최 상류 층 남성이 자신이 겪은 '상류사회적 에피소드'를 (무척 난잡한 구성과) 자신의 오만한 논평적 시선 으로 버무려 내놓은 기름진 코스요리라는 식으로? 흠, 나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는 것 같다.
2부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장면과 마주친다. 쾨텔니치에서 돌아온 후 소피와 크게 다툰 카레르는 생 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염없이 거리를 산책하다 <Tank탱크>라고 하는 메디테이션 센터를 발견하게 되는 데, 이곳은 사방의 빛이 차단된 무색무취의 거대한 욕조에 들어가서 모든 감각으로부터 차단된 채 내면 에 잠기는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임을 직감한 카레르는 곧장 소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자 소피는 카레르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C’est quoi, dit-elle, l’idée? De revenir dans le ventre de ta mère? Tu ne crois pas que tu ferais mieux d’en sortir, plutôt? 대체 무슨 생각이 야? 자기 어머니의 배 속으로 돌아가겠다고? 오히려 이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카레르 자신이 금세 “Sophie a raison. Je suis adulte, j’ai quarante-trois ans et pourtant je vis encore comme si je n’étais pas sorti du ventre de ma mère. 소피의 말이 옳다. 난 성인이고, 마흔다섯 살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지 않은 듯이 살고 있다.”라며 인정한 그녀의 이 일갈은 실은 이렇게 쉽게 넘어가선 안될 더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2011년작 <Limonov리모노프>에서 엠마뉘엘 카레르는, 우크라이나의 궁벽한 오지 제르진스크의 깡패에 서 시작해 강한 자기애와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뉴욕의 부잣집 집사를 거쳐 파리의 유명 자전소설 작가 가 되었다가, 몇 년 후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파시스트였던) 친 세르비아 진영에 참전해 유럽 지식인 들의 규탄을 받고, 이후엔 전 소련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 함께 러시아 급진 파시스트 정당을 창 당하여 러시아 극우 청년들의 아이콘이 된 인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사벤코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여기 서 카레르는 리모노프가 자신은 뉴욕 5성급 호텔의 화장실과 러시아 지하 수용소의 화장실을 모두 사용 해본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한 대사를 옮기며, 이와 비교해 주어진 계급적 영역에서 거의 이동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한다. 이 주어진 삶이란 즉 그의 사회적 계급, 다시 말해 러시아 귀족 가문의 후손이자 비야트카 부지사의 손녀이고, 몰락한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서 자신의 능력 하나만으로 학술원 종신 원장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사회적 계급이다.
그는 다른 장에서 과보호적 어머니, 그리고 거의 존재감이 없는 아버지로 이루어진 자기 가족의 풍경을 어린 시절 러시아인 유모가 들려준 코사크인의 자장가에 빗댄다. “Spi mladiénets, moï prikrasny Baiouchki baiou... Dors mon enfant, ma merveille, Dors, mon enfant, dors... 잘 자라 내 아이, 나의 보물, 잘 자라, 내 아들, 잘 자라...”라고 시작 되는 이 러시아어 자장가는 전사로서 전장에 나가 있는 아버지와, 자신의 아이도 언젠가 전사가 되어 자 기 곁을 떠나겠지만, 지금은 아이가 그저 편안한 잠을 이루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내용인데, 카레르가 인식하는 자기 부모님의 모습은 이와 정확히 반대라는 것이다. 카레르가 느끼는 존재의 불안 은 상당 부분 여기서 오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자신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신만의 사회적 성취를 이 루지 못하리라는 공포, 혹시 자신이 부여받은 그 특권적인 위치가 없었다면 자신은 (자신의 연애관계들 이 그렇듯이) 무엇을 하든 이내 얼마 안 가 자신의 변덕스러운 기분과 과도한 자의식으로 모든 걸 망쳐 버리고 마는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말이다. 마치 자신의 외조부 조르주 주라비슈빌리처럼. 그는 자신이 외조부처럼 자기 삶을 규정하는 서사를 끊임없이 생산해 낸 결과 자의식의 벽 속에 스스로를 고 립시키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리라. 그렇다면, 외부 감각을 차단시키는 자쿠지 안에 둥둥 떠서 내면의 의 식에 집중하는 모습은 소피의 말 그대로 어머니의 뱃속과 같이 어두우면서도 편안한 자기 근거리의 세계 안에서 자기 보호적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자의식의 벽을 치는 그 자신 삶의 모습과 너무나 닮 아있다.
나에게 이 자쿠지 장면은 카레르가 자신의 특권적인 위치와 아울러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과 도하게 서사화하는 자신의 성향을 아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그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카레르의 소설에서는 특정한 이야기에 매혹된 작가 자신의 모습이 꾸준히 비쳐 왔다고 말했는데, 이 작품 <러시아 소설>에서 그 이야기란 자신 의 해석 장치에서 끊임없이 비어져 나오는 서사화 기제인 것 같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서사화 기제 자체 를 소설의 주제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층적 목표의 효과적 달성을 위해 제시된 것이 외조부의 이야기를 파헤친다는 표층적 목표라고 봐야겠다. 2부의 초입에서 그는 조부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싶다며 재차 러시아로 떠나는 다큐멘터리 촬 영 일정을 기획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에 (그러나 다소 애매하게) 반대하는데, 이는 외조부가 2차 대전 때 친독협력자로, 레지스탕스에게 잡혀가 살해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저명인사인 자신의 명 성에 위협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레르는 조부에 관한 모든 것을 제대로 알아 두지 않으면 자신도 그처럼 "사라져 버려야"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까 두렵단다.
이는 그의 눈에 외조부가 자신과 너무나 닮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지성과 교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실하지 않았고 살아가는 요령도 없어 종국에는 사회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만 그. 자신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대 작가와 동급으로 여기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과 남에게 쉼 없 이 이야기를 했던 사람. 그가 애인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카레르의 외삼촌이 수소문해 모아 가지 고 있었는데, 여기서 외조부는 자신을 작은 매 새끼라고 부르며, 자신을 잡아먹어버린 운명에 대해, 자신 이 이루고 싶었던 원대한 꿈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착란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기술한다.
외조부는 어떤 편지에서 자신을 착취하는 악덕 사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렇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성격을 단련하는 하나의 스포츠로 여기기로 결심했단다. 이 정력적이고 '니체적인'태도는 자쿠지 에서 나온 카레르가 불현듯 에너지를 얻어 (우연한 계기로 벌어지는 싸움 같은 것을 기대하며) 다시 길 거리를 걸어 다니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는 길거리에서 니체적인 사색의 끝에 자신의 모든 어려운 문 제들, 어머니, 조부, 러시아어, 작가로서의 정체감, 소피와의 관계 문제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으로 서, 쾨텔니치로 돌아가 아무런 시놉시스도 계획도 없는 영화를 찍는 것을 생각해낸다. 그는 곧장 처음 쾨 텔니치에서 함께했던 팀원들을 불러 모으고 제작지원금을 위한 시놉시스를 제출하는데 그 내용을 요약 하면 '이 영화의 주제는 이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란다.
이 쾨텔니치로의 돌아감 retour à koetelnitch4를 통해 그는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 스스로 대체 여기서 무슨 이야기가 편집되어 나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게 되는 이 여행의 애당 초 목적은 무엇이었냐는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서사적으로 정초 된 내면적 이야기가 아닌, 이른바 ‘진짜 삶’이라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다. 쾨텔니치라는 벽촌은 이전의 르포르타주 작업 덕분에 지극 히 우연히 연고가 생기게 된 곳이기는 하나, 그곳은 외조부의 땅이며, 외조부의 언어(혹은 어머니의 언어) 인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들의 땅이기에, 만약 그곳에서 자신이 ‘진짜 삶’이라는 것을 발견해낸다면 그것 은 곧 외조부에 대한 장례가 될 수도 있을 터다.
생각해보면 카레르는 처음 르포르타주 작업을 위해 쾨텔니치에 있었을 때도 줄곧 이런 ‘진짜’를 찾고자 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의사와 지방 관료들의 잘 갖춰진 설명이 아닌, 병원 창립 기념일 행사에서 “entre toasts enthousiastes et danses à perdre haleine, pourrait être la rencontre d’une vieille infirmière à la retraite 열광적인 축배들과 숨 가 쁜 춤들 가운데, 한 은퇴한 늙은 간호사와의 만남"을 줄곧 기대했다. 물론 이때도 그런 사람이 전해줄 법 한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는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미리 다 그려두었었고 말이다. “Truculente babouchka qui nous raconterait l’arrivée du Hongrois en 1947 et nous laisserait entendre, l’œil pétillant de malice, qu’il avait beau ne rien dire, il avait plus d’un tour dans son sac, le grand coquin 1947년에 헝가리인이 처음 도착했던 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속이 빤한 능구렁이였다는 식으로 꾀바른 눈을 반짝이며 말해 줄 그런 걸걸 한 러시아 노파 말이다.”운운.
4 카레르가 쾨텔니치에서 실제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2003년 베니스 영화제 선정작.
그런 카레르의 앞에 나타난 아냐는 처음엔 그가 그토록 찾던 바로 그 ‘진짜’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처럼 보였다. 그 벽촌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던 그녀 는 카레르 일행에 대한 천진난만한 설렘을 숨기지 않는데, 이는 그녀의 <folle de joie 좋아 미칠 지경>라는 엉뚱한 프랑스어 표현을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 (여기서도 논평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카레르는 그녀 의 모습이 "자칫하면 손뼉까지 칠 기세"였다고 한마디 덧붙인다.)
그녀는 그들(촬영팀)이 도착했을 때부터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사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 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야기한다. 그들이 병원 축하연에서 사고를 친 사건도 이미 온 도시에 소문이 나있 단다. 카레르에 따르면 아냐는 ‘자신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이 그런 사고를 친 것을 마음 에 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단다.
쾨텔니치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protégée par la langue française 프랑스어로 보호되는” 그녀는, 공식적인 설명 의 연막 속에 숨겨진 언드러시 토머의 진실을 전달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냐는 자신의 애인이자 FSB 요원인 사샤가 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얼굴을 찌푸리며 그것은 모두 "정치적인 발언에 불과"하다고 말하 는데, 하지만 당신들은 다행히도 자신을 만났으며 이제 ”nous pouvons compter sur elle 자기만 믿으면"된다고, 대 신 자신은 “il faudra seulment faire très attention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란다. 이 모든 것은 카레르가 그토록 원했던 ‘진짜’와의 만남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 그가 바라고 기대하던 그 ‘진짜’가 마치 "러시아 소설"처 럼 너무나 잘 갖춰진 모습으로 나타난 이 알맞음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불길한 뒷맛을 남긴다. 소설 속 카레르는 그날 밤 바로 소피에게 전화를 걸어 “lui expliquer avec exaltation que c’est ça, un reportage 이런 게 바 로 르포르타주야,라고 흥분하여 떠들어”대지만, 서술하는 카레르는 의도적으로 이를 한 편의 촌극처럼 그린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약속한 시간이 되었지만 아냐는 나타나지 않는데, 실망해서 짐을 챙겨 떠나려는 그들의 앞에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낸 아냐는 실은 그들을 다음날 토머가 일했던 공장에 데려가려 했었다 말한다 카레르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계속 바람 맞힐 거짓말쟁이임을 직감한다. 이때 아냐는 그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며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불러준다. 이는 카레르가 어떤 비아냥 거리는 어조 없 이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 “Elle chante bien, mais ce n’est pas seulment ça : elle n’imite personne, elle chante avec son âme, c’est elle tout entière qui chante.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아무도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존재 전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아냐가 노 래를 부르는 이 장면은 그가 실제로 촬영해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으로 올라간 다큐멘터리 <Retour à Koetelnitch>에 삽입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 트레일러의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5 어쩌면 이 순간에 그는 '거짓말쟁이 여자의 노래'라는 것이야말로 이 고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융숭 깊은 ‘진짜 삶’이라 느 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로 농밀한 감동을 받았던 것이리라.
그랬기에, 소설의 끝자락에서 아냐와 그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듣고 그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겠다. 설상가상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온 쾨텔니치에서 그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듣게 된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그는 아냐가 무언가 흥미로운 사건을 만들어주지 않 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를 통역사로 고용했었는데, 예상과 달리 그저 제대로 해보려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그녀의 모습에 실망하곤 우울해져 그녀에게 냉정하게 대했었다. 아냐의 어머니 갈리나에 따르면 아냐는 그날 자신이 통역을 잘못해서 그가 실망한 줄 알았고 이후 그 일에 대한 후회가 그녀의 삶 전체를 그늘지게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진짜 삶’이었던 그녀가 어김없이 찾아온 자기 내면 의 변덕 탓에 상처 입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해 이제는 사과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 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소설은 막바지인듯한 이 지점에서 문득 뭔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한다.
5 https://youtu.be/i9DVy7m6Kf4
아냐의 어머니 갈리나 세르게예브나는 카레르에게 연이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FSB 요원) 사샤가 팔라치(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아냐를 죽인 것이라고 소리친다. (통역사) 사샤는 이를 듣 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헛소리라고, 너희 같은 외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뉘앙스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필리프와 카레르는 갈리나의 그 말이 정말 사실일 가능성 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FSB 요원) 사샤가 아냐의 죽음 이후 며칠 동안 총을 들고 부랑자처럼 길 거리를 쏘다녔고, 유치장에 쳐들어가 범인을 죽이려 했던 일 등은 그들을 헷갈리게 하는 정황이다. 아냐 는 미치광이 묻지마 살인범에게 죽은 것인가? 아니면 사샤가 고용한 팔라치가 아냐를 죽였고 사샤는 지 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카레르와 필리프는 실체적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추리를 거듭한다.
그런데, 장례식 이후 갈리나 세르게예브나와 사샤를 포함한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추도식 자리가 마련 되고, 그 추도식에서 갈리나 세르게예브나는 사샤를 비난하는데, 이번에는 그 비난의 내용이 조금 달라 진다. 그녀는 저 사람에게 얼마나 적이 많은지 아느냐며, 그들 중 한 명이 아냐를 죽인 게 틀림없단다. 사 샤는 그 말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사샤에게 죄 책감을 안겨주기엔 더없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 면 그 말들 가운데 진실이란 없을 수도 있겠다. 라쇼몽처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이야기가 난무하 고 갈리나는 비난의 화살을 돌려 아냐의 남동생 세료자가 땔감도 해오지 않고 집안을 내팽개치고선 체첸 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다 소리치는데 세료자가 체첸에서 하는 병영생활을 농땡이로 표현하는 것은 너 무나 아이러니한 말이라 좌중이 모두 웃는다. 갈리나는 자신이 좌중의 관심을 모은 것을 알고는 더욱 흥 을 받아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여기서 카레르는 완전히 지쳐있는 것 같다.
식장에서 나온 카레르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 사샤와 둘이서 자동차 를 타고 게 되는데, 거기서 사샤는 카레르 일행이 처음 쾨텔니치에 왔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아냐와 자신은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클로드 프랑수아의 샹송 테이프 들을 챙겨 왔더랬다. 어떤 ‘진짜 삶’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카레르 만이 아니 었던 모양이다. 이어 사샤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둘이 결혼할 때 아냐가 실은 자신 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절반은 프랑스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보낼 스파이로 길러졌 고, FSB 요원인 당신에게 접근한 것 역시 프랑스의 스파이로서 정보를 빼낼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자신은 당신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이 모든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사샤는 이것은 허황된, 동화 같은 이야기라 하면서도 혹시 모를 1%의 가능성 때문에 자꾸만 그쪽으로 마음이 간단다. 그러면서 카레르에게 거듭 혹시 아냐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구석은 없었느냐고 묻는다. (카레 르는 아냐가 프랑스어를 잘하긴 했지만 외국인으로서 잘하는 수준이었다는 잔인한 말을 해야만 했다.) 서로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고 그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푹 빠져 살아가고 있던 그들. 카레르는 그 들이 자신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Et maintenant, y croyait-il encore suffisamment pour penser que le double assasinat de sa femme et de son fils avait quelque chose à voir avec cette histoire? Je n’ai pas osé le lui demander 지금도 그는 아내와 아들의 죽음이 이 이야기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난 차마 이것은 물어보지 못 했다.” ‘진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믿었던 그들도 실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서사 속에 서 움직이고 있었으며, 어떤 ‘진짜 삶’에 대한 신비감을 품은 것 역시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는 돌연한 인 식. 질펀한 삶의 곡절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사샤가 아냐와 아들이 무참히 살해당한 이 비극적인 순간에도 그녀가 실은 프랑스의 이중스파이였고 둘은 함께 사랑의 모험을 하고 있 던 것이라는 그 공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는 결국 서사와 삶은 나눠져 있는 게 아니며 외려 서 사 그 자체가 삶의 양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대목 이리라. 이를 확증하듯 카레르는 이것이 자기가 찾던 바 로 그 “histoire이야기”인 것 같다고 말한다.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카레르의 작품에서는 서사와 주체 사이의 관계 탐구라는 구도가 반복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결론처럼 서사 그 자체가 삶이라면, 결국 주체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정초해나가는 그 본질적인 부분에 매혹되었던 것이고,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해 서사에 대한 카레르의 생각이 변화해간 과 정은 결국 인간을 대하는 카레르의 시선이 변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거짓말로 점철된 인생을 살다 끝내 일가족을 몰살하고만 장 끌로드 로망을 내세운 르포소설 <적>과 살인범을 아빠로 둔 아이에 관한 작품 <겨울 아이>등 초기작에서 카레르가 서사에 대해 보인 태도는 명백히 두려움이었다. 자신의 할아버지 조르주가 그러했듯, 과잉된 서사적 본능이 자신의 삶을 자아의 감옥 속에 가두게 될 것 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카레르의 후기 작품에서는 이러한 시선이 다소 변하는데, <나 아닌 다른 삶>에 서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을 의미화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처제의 이야기를, <리모노프>에 서는 자기애 하나로 우크라이나 벽촌의 깡패에서부터 파리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거쳐 급진주의 정당의 당수까지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서사화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의지이자 용 기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의 결과 그는 이후 <왕국>에서 공동체(서구)의 서 사를 탐구하게 되기까지 했으리라. <러시아 소설>은 인간에 대한 카레르의 태도에 있어 전환점의 역할 을 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외조부에 대한 탐구를 중심 줄기로 삼아, 사실 그 외조부의 이야기를 밝히는 작업 자체는 거의 아무것도 진전된 게 없는 채로,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사건들을 마치 내담자가 정신분석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듯 고백하며, 자신의 감정, 그 감정을 자신 이 해석하는 방식과 자신이 상상을 전개하는 방식까지 낱낱이 활자로 옮김으로써, 그리고 그 고백의 끝 에서 결국 서사라는 것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삶을 만들어가는 ‘양식’이라는 결론을 발견해내는 것을 통해, 그는 치유를 얻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은 정신분석을 위한 기록지 같기도 하다. 하기야, 왜 아니겠는가. 어쩌면 글쓰기란 본래 그와 같 은 자기 치유 과정 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