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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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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Nov 07. 2024

껍질 벗긴 고구마줄기는 사랑이랬다

    육수가 폴폴 끓으며 진해지는 동안 고구마줄기 껍질을 열심히 벗기고 있다. 끝에서 십 센티 떨어진 곳을 톡 하고 부러뜨려 한 번 벗기고, 그다음은 과도로 쓱 벗긴다. 어차피 한 입 크기로 썰어 먹을 거라 벗기는 도중에 손으로 두 동강을 내도 괜찮다. 껍질을 까는 동안 손 끝과 손톱 안은 검은색에 가까운 보랏빛으로 물들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옅어질 거라 개의치 않는다. 손톱이 지저분해지는 게 싫어서 그만 두기에는 껍질 까는 일이 재미있어서, 국물이 깊게 밴 고구마 줄기를 맛볼 일이 기대되어서 멈추지 않고 쭉쭉 벗겨낸다.

   

    어떤 채소든 언제나 말끔하게 손질된 걸 주던 엄마가 어느 날에는 밭에서 나온 그대로인 재료를 보내줬다. 흙이 잔뜩 묻은 고구마줄기와 마늘을 받고 당황하여 전화를 걸었더니 바빠서 그냥 보냈다며 직접 까서 먹으란다. 기분이 조금 나빴던 건 직접 껍질을 벗기는 일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엄마의 말투 탓이었다. 여태 내가 껍질을 벗겨달라고 엄마를 조른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엄마는 내가 성가셔할까 봐 진작에 손질을 해서 보내준 거였겠지만 전화 속 목소리는 마치 내가 맨날 엄마에게 손 가는 일을 억지로 부탁했던 걸 이제 못 해주겠다고 내치는 듯하여 속이 좁은 나는 금세 마음이 삐뚤어져 버렸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말했다.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겨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애정이 없는 사람을 위해 공짜로 손질을 해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며 직접 까보라는데 정말 그럴까. 고작 고구마줄기 껍질에 모성애처럼 커다란 사랑이 담겨 있는 걸까. 모를 것 같기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내게는 고구마 껍질 까는 일이 꽤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라 엄마와 달리 시간만 넉넉하면 누구에게라도 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은 빼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거라도 괜찮으니 고구마줄기가 생기면 꼭 좀 챙겨달라는 내 부탁을 까먹은 엄마가 얼마 후 큰집에서 받은 고구마 줄기로 김치를 만들어 보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껍질 까는 게 사랑이라더니 이제는 김치까지 담아 주다니 엄마의 사랑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가 의심해 본다.


    내가 원했던 건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재료 쪽이었지만 고구마줄기 김치는 그대로 먹어도 맛있고 여차하면 국물 요리에 넣어 먹을 수도 있기에 엄마의 사랑이 어떠하든 사양할 이유가 없다. 도토리묵을 넣고 묵밥을 만들 때에 배추김치 대신 고구마줄기 김치를 넣어 본 적이 있는데 그 맛이 꽤 좋았기 때문에 이번 역시 묵밥을 만들어 먹는 동안 다 먹어 치웠다. 갓 담은 배추김치에 비하면 양념도 더 잘 배어 있어 덕분에 얼마 남지 않은 김장김치를 아낄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보내준 고구마줄기 김치 한 통을 다 먹어치우고도 여전히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는 고구마줄기를 향한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는 먹고 싶은 건지 까고 싶은 건지 헷갈릴 정도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장보기 앱에서 고구마 줄기를 주문했고, 4천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으로 한 줌 정도 되는 고구마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양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별 수 없었다. 고구마줄기를 보자마자 얼른 껍질을 까고 싶어 안달이 나버렸으니 말이다.


    아침 겸 점심으로 전골요리를 만들기 위해 육수를 끓일 동안 다른 채소와 함께 구매한 고구마줄기를 손질한다. 고구마줄기는 버섯이나 잎채소보다 먼저 넣어줘야 구석구석까지 맛이 배기 때문에 첫 번째로 손질해 준다. 한 번 먹을 만큼만 꺼내 흐르는 물에 씻은 다음 과도와 손 끝으로 하나씩 껍질을 벗기고 있으면. 음. 과연 재미있다. 쫙쫙 벗길 때마다 쾌감이 있다. 자몽 껍질이나 석류 껍질을 벗길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다.


    손질된 고구마줄기와 버섯, 두부를 넣고 끓이다가 먹기 직전에 소고기, 숙주, 쑥갓을 넣는다. 건더기를 찍어먹을 소스는 연겨자를 푼 간장으로 족하다. 잘 익은 건더기에 국물 조금을 옹기그릇에 담아 가져와서 먹다 보면 속도 편안하고 배도 적당히 차오른다. 숙주나 쑥갓은 푹 익으면 식감이 좋지 않지만 고구마줄기는 다르다. 물론 숙주와 쑥갓도 매우 좋아하지만 끓인 전골을 한 번에 다 먹지 못해 남을 경우에는 맛없음을 감안하고 먹어야 하는데 고구마줄기는 나중에 먹으면 더 맛있다. 이번에는 냄비에 대체로 버섯과 고구마줄기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남은 국물에 불린 당면을 넣어 먹기로 한다. 전골 한 그릇으로 하루 식사를 다 해결하다니 일석이조다.


    저녁까지 맛있게 먹은 후로도 엄마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손질된 재료를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에 정말 사랑이 담겨있을까.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인 재료를 나누는 일이 아닌 좋아하는 식재료를 나누거나, 정성을 다해 재배한 것을 나누는 일, 그리고 먹기 편하게 손질된 재료나 음식을 챙겨주는 일에 언제나 애정이 함께 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분명 애정을 담기도 할 것 같다. 엄마가 나를 위해 마늘과 고구마줄기를 다듬는 일이나 내가 아이를 위해 포도 껍질을 벗기거나 귤의 속껍질을 벗기는 일에도 잘 찾아보면 작은 사랑이 담겨있다. 딸이 먹을 거라 생각해서 선뜻 먼저 손질을 하기도, 어떨 땐 딸이 요구하니까 구시렁거리면서 하기도 하는데 만약 애정 없는 사람이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재료를 손질해서 달라고 한다면 당장 거절은 못해도 훗날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것 같다. 재료 나눔으로 손절까지 생각하는 것 보면 역시나 엄마 말이 옳다. 고구마줄기의 껍질을 까는 것이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누군가를 위해 굳이 껍질을 까서 준다는 건 적어도 엄마와 내게는 사랑인 것이다. 앞으로는 엄마가 먹을 것을 챙겨줄 때마다 그 사랑을 꼭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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