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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Jun 01. 2022

수줍게 달려가 덩실덩실 몸을 깨우는 시간

한국무용수업이 있는 매주 월요일

“사진 찍으러 가시나 봐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분이 말을 건넨다. 문이 열리자마자 쭈뼛쭈뼛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겨 벽만 바라보는 나의 옷차림이 이웃의 눈에는 촬영용 의상처럼 보였나 보다. 평소에는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는데 집에서부터 연습복을 입고 나선 탓에 오늘따라 이웃과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 영 쑥스럽다.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이번에는 아파트 입구 한편에 서서 콜택시를 기다린다. 다행히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바람에 흩날리는 푸른빛 한복 치마를 양팔로 모으며 속으로는 ‘택시야 빨리 와라, 빨리 와라.’를 되뇐다. 


‘하, 어차피 갈 거 조금 더 일찍 나올 걸.’


유턴하는 대신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내려 횡단보도를 뛰듯이 건너는데 안 그래도 속치마로 인해 부풀어 오른 치마가 바람에 마구 펄럭거리기 시작해, 정지선에 맞춰 서있는 차 안의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관중도 없이 괜히 나 혼자서 창피해한다.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도착한 연습실에서는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이미 수업이 시작되고 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맨 뒤로 가서 춤을 따라 추는데 굳은 몸이 풀리지 않아 치마를 움켜쥔 손등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근육이 평소보다 불편하다. ‘굴신’하고 외치는 선생님의 구령에 무릎을 굽히는데 연세가 많은 분들의 무릎에서도 나지 않는 소리가 매번 굽힐 때마다 뚝, 뚝 하고 나자 거울에 비친 내 이마와 귀가 붉게 물들어버린다. 


기본 동작을 매주 반복하고 있지만 이 기본 동작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덕분에 아침부터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나도 춤을 출 때만큼은 마음이 가볍다. 틀려도 뭐라 하는 이가 없고, 틀려도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다. 틀린 발 동작, 허우적거리는 팔 사이에서 나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 보면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장구 리듬에 따라 마음도 덩실거린다. 


느린 진도에도 안무를 다 외우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인 한국무용 기초수업교실은 집 근처 문화회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문화교실 중 하나다. 수강생의 연령대가 높은 만큼 수업의 난이도나 진행 속도가 느리고 지향하는 목표도 가볍고, 낮다. 수강생들은 선생님처럼 잘 추고 싶어 하기보다는 월요일 오전의 굳는 몸을 춤사위로 깨우는 것에 더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에는 더위를 식히려 밖에서 차를 마시거나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의 자잘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는데 사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다양한 연령층 안에서 (아마도)유일한 삼십 대를 맡고 있는 나에게도 다들 존댓말을 써가며 다정하게 대해주셔서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사함을 느낄 때가 많다.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나이만 젊었지 몸을 쓰는 능력은 조금도 나은 것이 없어서 춤을 추는 동안만큼은 다른 수강생과의 나이차를 잊어버린다. 처음에만 해도 내가 왜 이 수업을 듣기로 한 건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고, 나도 괜히 분위기를 흐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와 함께 이 수업을 듣기 시작한 동기님과 그 외 선배님들 사이에서 잘 어울려 지내고 있다. 


사실 아이,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토, 일요일이 지나고 나면 월요일 아침에는 진이 빠져서 그저 마냥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대청소를 하고 다 같이 바닷가에 갔다가 저녁에는 놀이공원까지 다녀온 후라 이번 주는 유난히 더 힘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소파에 드러누워 쉬고 싶은데 이렇게 한 주를 빠지고 나면 또 한 주를 꼬박 기다려야 무용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뒤늦게서야 마음을 고쳐 잡았다.


원래라면 일찍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스트레칭으로 몸도 풀어야 하는데 가야겠다고 결심이 선 시각이 이미 수업이 시작된 후라 민망함을 무릅쓰고 집에서부터 연습복을 챙겨 입고 나갔다. 늦장을 부린 탓에 아침부터 여러 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늦게라도 나타난 나를 반겨주는 다른 수강생들 덕분에, 열을 내며 춤을 춘 덕분에 떨쳐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피로도 어느새 사라진다. 


뻣뻣한 몸과 관절에서 울부짖는 뚝뚝 소리, 그리고 집에서부터 챙겨 입은 연습복이나 수업 도중에 끼어 들어가는 건 부끄럽지만 그래도 서툰 모습으로 춤을 추는 순간은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다. 때로는 틀린 걸 알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리 돌고, 저리 돌며 덩실 거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지 모른다. 매주 월요일 문화회관 연습실에는 잘하는 사람은 있어도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덩실 거리는 게 즐겁고, 피곤해도 나와서 몸을 움직이며 한 주의 시작을 깨우는 많은 수강생만 있다. 그러니 오늘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퍼런색 치마를 펄럭거리며 달려간 보람이 있다. 집에만 있었다면 종일 축 쳐져있었을 몸과 기분이 두 시간의 수업 덕분에 문화회관 앞 햇살 아래에 핀 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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