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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Sep 07. 2022

장비라 쓰고 열의라고 말합니다

한국무용 수업에 필요한 장비(준비물)


‘장비빨’을 두고서 흔히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뉘고는 한다. 한쪽은 실력도 부족하면서 장비 욕심만 많다고 이야기하는 쪽이고, 나머지 하나는 실력이 부족하니 장비라도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다. 나도 예전에는 전자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요즘에는 확실히 후자에 가까워져서 부족한 실력과 의욕을 장비로 채우려는 욕심이 생겼다.


한국무용 수업을 처음 등록했을 때의 일이다. 안내 문자 속 준비물은 오직 ‘버선’ 하나뿐이었으나 실제로 가보니 신입 학생을 제외하고는 다들 연습용 한복 치마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버선은 챙겼으니 연습복이 없어도 별 문제는 없겠지 싶어 두 번째 수업에도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갔다가 결국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뒷자리로 밀려난 후로는 서둘러 연습복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국무용 수업에서는 연습용 한복 치마와 속치마, 속바지, 버선을 기본 복장으로 보는데 이번처럼 부채춤을 추는 경우에는 복장 이외에도 부채가 필수 준비물로 여겨진다. 취미 생활에 돈을 투자하는 것에는 부담이 적지만 취미 생활로 인해 짐이 많아지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 하는 편인데, 고민 끝에 이번 한국무용 수업에서는 짐이 좀 생기더라도 구색을 맞춰보기로 했다. 사놓은 옷들이 아까워서라도 수업에 열심히 나가기를, 그리고 세 달 후 그만두는 일 없이 몇 달, 몇 년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며 장비를 하나씩 채워나가기로 한 것이다.


일상복을 입고 있을 때와 한복 치마를 입고 있을 때의 몸가짐 차이는 생각보다 커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을 때는 마치 새로운 배역에 몰입한 배우가 된 듯하다. 펑퍼짐한 트레이닝 바지에 니트 모자를 쓰고 춤을 출 때는 그저 문화센터에서 취미생활 중인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가도, 한복 치마에 머리까지 가지런히 묶고 거울 앞에 서 있다 보면 가만히 서서 치맛자락만 감아올려 들어도 마치 무용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옷빨이라는 게 과연 무시 못한다 싶다. 옷만 갈아입었을 뿐인데 고갯짓이나 어깻짓도 더욱 예쁘게 보이려 신경을 쓰게 되는 걸 보면 옷차림이 태도에 영향을 준다는 말은 무용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처음 수업에 등록했을 때는 선생님을 통해 연습용 치마나 속치마를 구입하거나 통풍이 잘 되는 검정 티셔츠를 따로 사는 정도로 끝냈던 나도 개월 수가 점점 넘어가면서부터는 다른 장비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분들의 차림새를 보다 보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위아래로 단정하게 한복 차림을 한 분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 모양을 한 분, 그리고 버선 모양의 연습용 실내화를 신은 분이 춤을 출 때마다 일으키는 바닥 마찰음 같은 사소한 것들이 다 부러워질 때가 있다.


여름 동안에는 아이의 방학이다 뭐다 수업에 빠질 일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기껏 사두고서 개시를 하지 못한 물건들이 쌓였다. 새롭게 사들인 초록색 가방은 주름이 져있어서 평소에는 접이식 부채가 접혀있을 때처럼 납작하니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가도 짐을 넣으면 늘어난 아코디언처럼 쭈욱 늘어나 부피가 커지는 디자인인데 재질이 한복 느낌과도 비슷하고 색감도 동양적인 느낌이 나서 보자마자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가방은 평소 보관하기가 어렵고 부피가 커지는 만큼 무게도 함께 늘어나는 경우도 많은데 이 가방은 무엇보다 가볍고 보관에도 용이해서 크게 고민 없이 바로 주문을 해버렸다.


가방 외에도 뮤지엄샵에서 구입한 댕기 모양의 머리 고무줄과 얼굴무늬 수막새 모양을 본뜬 귀걸이도 연습날에 꼭 하고 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에 가지 못하는 월요일이 되면 아쉬움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빨리 초록 가방 안에 연습복과 부채, 그리고 새로 산 물병을 챙겨 들고 댕기 고무줄에 귀걸이까지 한 채로 수업에 참여하고 싶은데 사두고서 정작 쓰지를 못하니 빨리 시간이 흘러 새 장비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막힌 굴뚝에 갇힌 연기처럼 뜨겁게 쌓여갔다.


4주를 빠지고 오랜만에 수업에 참석했던 날에는 귀걸이는 빼먹고 댕기 고무줄만 하고 갔는데 같은 수업의 다른 분들이 ‘어머나, 저거 봐라. 댕기도 하고 왔네.’라고 아는 체를 하자 괜히 쑥스럽고 동시에 으쓱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는 어쩌면 소심한 관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때마침 손녀를 위해 댕기를 사야 했는데 어디서 살 수 있냐며 구입처를 묻는 분에게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뮤지엄샵을 알려드리기도 하고 휴식시간을 틈타 새로 산 가방을 몇몇 분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수업 참석도는 낮지만 수업의 열의 만은 적지 않다는 걸 나름 드러내고 싶었던 건데 어쩌면 그분들에게는 내가 그저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수업 도중에도 새로운 장비를 또 주문하게 되었는데 폭이 넓은 검은색 속바지와 검은색의 긴팔 연습복이었다. 다른 학우님이 주문한 연습복 바지가 그분에게는 잘 맞지 않아 내가 대신 구입하기로 한 건데 치마 대신 겉 바지처럼 하나만 입고 춤을 출 수도 있고 속치마로도 입을 수 있어 다른 분들이 이미 여럿 애용하고 있는 옷이라고 했다. 윗도리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선생님에게 직접 주문을 했는데 한복 느낌의 디자인에 살짝 비침이 있어 시스루 느낌이 나는 옷이었다. 선생님이 입고 있는 옷을 똑같이 주문했는데 가을, 겨울 치마를 구입할 때는 윗도리에 붙어있는 꽃 장식의 색에 맞춰 사면 예쁠 거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이번 주에 수업을 갔다면 지난주에 주문한 연습용 윗옷을 받을 수 있는 건데 태풍을 이유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수업에 빠져버렸다. 선생님이 이제부터는 빠지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자고 그랬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빠지다니 아무리 장비로 의지를 불태우는 나라고 해도 염치가 없을 지경이다. 다음 주는 추석이라 또 수업이 없을 텐데 다음 수업 전까지 학우님이 보내주신 연습용 영상을 보면서 혼자 연습이라도 부지런히 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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