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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Mar 20. 2022

사뭇치는 그리움을 알게 된,

당신이 사뭇치게 그리운 어느 밤,



시간이 지나면 당신에 대한 내 감정들이 흐릿해질 줄 알았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는 듯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나보다 더 차가운 손으로, 차가운 내 손을 걱정하던 당신의 그 따뜻한 목소리는, 당신이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는 멀어져만 갑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못해준 기억들은 자꾸만 생생해집니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어 당신에게 좋은 옷 한벌 해주지 못한 게, 손주 사위 보고 싶다는 당신의 그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한 게, 그 모든 게 후회로만 남습니다.

거리에는 왜 이렇게 당신과 같은 모자를 쓴 할머니가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게는 매일같이 당신과 같은 모자를 쓴 할머니가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한번 더 찾아갈 걸, 한번 더 손잡아줄 걸, 한번 더 안아줄 걸,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할 걸, 이렇게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가끔, 아주 가끔, 당신을 원망합니다. 보고싶으니까 바빠도 들렀다가라고, 보고싶으니까 밥 한끼 같이 먹자고. 아니 그냥 잠깐 들렀다가라고 그 말 한마디 해주지 않은 당신을...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Georgios Jakobides,

Grandma's Favorite, 1893, 개인소장



아닙니다. 돌이켜보니 당신은 늘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했을 뿐이지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손녀가 나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당신의 친구들까지도,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특별한지를 말할 만큼, 당신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내가 그랬듯이,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Georgios Jakobides의 그림을 보고, 그리고 제목 <할머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나를 떠올렸겠죠.


원망합니다. 온갖 상처투성이인 당신이 내게 준 큰 사랑을 미처 몰랐던 나를, 속깊은 당신의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 했던 어리석은 나를, 당신의 사랑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듣게한 눈치없는 나를. 당신의 사랑을 받는 데만 익숙해저버려 그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 나를.

가슴을 아무리쳐도 이토록 먹먹하고 이토록 애달픈 이 마음. 먹먹하고 애달프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세상의 어떤 단어들로 표현조차 되지 않은 이 마음. 사뭇치게 그립다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



필립레슬리헤일Phillip Leslie Hale, Grandmother's Birthday, 1915,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삶의 순간순간 나도 모르는 새 당신이 떠오릅니다.
봄이 오면 꽃을 좋아하던 당신이, 여름이 오면 필립레슬리헤일Phillip Leslie Hale 그림 <할머니의 생일> 속 주인공들처럼 생일선물로 꽃을 받고는 누구보다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던 당신이, 가을이 오면 친구들과 단풍구경을 가야한다며 새 옷을 입어보던 당신이, 그리고 겨울이 오면 나와 영원히 함께할 것 같던 당신이...

그저 당신께 미안할 뿐입니다. 못해줘서 미안한 게 아닙니다. 아직 놓아주지 못 해서 미안합니다. 해준 게 없어서 후회가 깊어서, 그래서 아직, 어쩌면 오래도록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서, 그저 당신께 미안합니다.

여전히, 나는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언젠가, 그 언젠가, 내가 나이가 들어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나는 아마 당신만을 보내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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