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과 만남
나는 어릴 때부터 강아지랑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백색의 순수함이란. 사람을 매료시킬 만큼 그 자체로도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아무래도 내가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그만큼 강아지를 키우는데 애정을 쏟았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아이들을 볼 때면 무작정 달려가고 봤다.
강아지가 15살의 어르신이 될 무렵, 임상 전공을 정해야 될 때가 왔다. 우선적으로 정해야 할 것은 성인과 소아 치료에 대한 선택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히 소아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하나 문제가 있다. 강아지와 아이의 아픈 모습을 보지 못한다. 강아지를 키울 때도 아파서 동물 병원에 데려갈 때면 마음이 아파 주사 맞는 모습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하루 종일 아픈 아이들만 보아야 하는 소아치료를 선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해 보았다. 결국 성인 파트에 지원하게 되었다.
임상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첫 직장은 종합병원이었다. 병원 규모에 비해 비교적 재활 센터가 작았던지라 성인과 소아의 구분이 없었다. 경력이 낮더라도 시간 분배상 한두 명의 소아를 봐야 하는 상황. 겁은 났지만 신생아나 영유아 정도의 어린아이들은 아니어서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새내기였기에 선임 선생님들께 치료 방법을 물으면서 치료하기에 바빴다. 가슴 아플 세도 없이 바빴던 기억뿐이다.
병원을 옮겨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성인 파트에 지원하여 아이들을 볼 일은 더욱 사라지게 되었다. 매일 환자를 보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을 보다 보니 나는 평생 소아 환자와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인턴을 마치고 병원을 옮길 때가 됐어도 성인 치료 경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인 파트에만 지원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경력은 이어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옮긴 병원에서 성인 물리치료실과 로봇 치료실에 처음 들어가는 순간 어린아이들이 열심히 걷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치료실을 잘못 들어왔나 싶어 문 밖을 나와 치료실 이름을 보니, ‘성인 입원 물리치료실’ 간판이 걸려있는 것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얼른 들어가 왜 소아를 성인 치료실에서 치료하고 있는지 물었다. 설명해주신 내용은 이러했다. 몇몇 특이 질환의 경우, 해당 질환을 보실 수 있는 교수님이 정해져 있는데 그 교수님들께서 성인 담당이기 때문에 성인 치료실에서 치료를 진행했다. 다행히 소아는 치료 자체가 다르므로 일정 직급 이상의 선생님께서 치료를 담당하셨다. 로봇 치료의 경우에도 성인, 소아의 구분이 없이 한 치료실에서 진행되기는 하나 치료의 숙련도가 필요해 담당 선생님께서 정해져 있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치료할 자신이 없을뿐더러 아픈 아이를 볼 자신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내게도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임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언젠가는 한 번 마주해야만 하는 일임에도 나는 그저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세상에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외면하려 해도 세상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역시 예상대로 되는 인생이란 없나 보다. 시간이 흘러 부서 이동이 발표되었다. 나도 소아를 치료해야 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픈 아이들을 본다는 자체로도 어려웠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문득 떠오르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조금씩 참으며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 다행인 점은 치료가 이어지다 보니 조금씩 아이들의 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아이들은 조금 불편한 것뿐 다를 바 없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였다.
운동치료는 주니어(청소년) 정도의 아이들을, 로봇은 유아와 소아 모두를 담당해야 했다. 운동 치료는 청소년기의 아이들 정도라면 체격이 성인에 가깝기 때문에 성인에 준하여 치료하면 되었다. 문제는 로봇이었다. 유아와 소아의 아이들을 치료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야 했다. 성인과 다른 신체 사이즈, 로봇 착용 방법, 보행 시 주의해야 할 점 등 모든 것들이 새로웠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성인 보호자와는 다른 소아 보호자의 태도였다. 성인은 연세가 높기 때문에 보호자가 배우자나 자녀인 경우가 많다. 보호자도 연령대가 높아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 때문에 간병인을 고용하는 비율이 높다. 소아는 이와는 정반대다. 보호자가 부모가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 활동보조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 전까진 부모님의 손길이 필요하다. 결국 부모님 중 한 분은 경제 활동을 중단하고 간병을 시작한다. 그 절박함도 깊이를 더한다.
“제 소원이 뭔지 아세요? 초원이 보다 하루 먼저 죽는 거예요.”
‘말아톤’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대사이다. 장애 아동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소아를 치료하다 보면 이 대사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다. 소아를 치료한다는 것은 이런 부모의 삶도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걷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심정에 보호자 분들께서 때로는 치료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지만 어떤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 알기에 그런 요구조차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아이들의 아픔은 부모의 아픔과 연결된다. 보기 힘든 아이들의 아픔을 외면한다는 것은 부모의 아픔에서도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외면할수록 상처는 배가 된다. 내게는 아픔을 마주할 능력이 없다. 나는 강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복이라는 용기를 덧입고 그들 앞에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그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인과 소아의 치료를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곤 한다. 성인은 이미 완성된 건물에 무너진 곳 외벽을 보수 공사하는 과정과 같다. 반면에 소아의 경우 아무것도 없는 밑바탕에 새로운 건물을 쌓아 올리는 건축과 같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건물을 쌓아가며 성장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네발로 기고, 앉고, 서고, 걷고. 그 모든 과정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소아의 치료는 그만큼 어렵다. 어렵기에 많은 것들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도 치료실엔 몇 명의 아이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그 아이들을 볼 때면 이런 마음 아픈 과정이 떠올라 고개를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치는 나는 치료복을 입고 있는 치료사이다. 용기를 품고 마주하며 다가갈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으로 나에게 오는 아이들에게 한 마디 건네 본다.
“아이들아 아프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