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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서윤 Apr 23. 2023

무엇이 인간인가

지구를 아우슈비츠로 만드는 인간의 무능력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2007, 돌베개)>를 읽고 신인종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생각을 담은 서평입니다.

*디아스포라: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하는가? 학생 시절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 우선 이름을 밝히고, 어느 지역 출신이며 무슨 대학교 무슨 과, 무슨 학번인지를 말했다. 활동 중인 동아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이런 자기소개는 사실상 자기소개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집단의 나열이다. 이런 형식적 소개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인간은 때론 자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일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의 활동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소속된 집단이 한 인간의 특정 부분을 대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인간인지 답하기 위해선 이 부분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속된 집단의 특성만이 강조될 경우,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삶이 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람들은 모호한 기준들로 불분명하게 나뉠 수 있다. 모호한 기준들 중 대표적인 것이 인종과 민족이다. 생명과학이 현 인류는 단일 종임을 밝혔고, 역사가들이 민족은 근대성의 산물이라 주장했지만, 여전히 인종과 민족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거대한 집단으로 작동한다. 앞서 집단의 특성이 한 개인의 특성을 압도할 경우, 집단에 속한 개인의 삶이 매몰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특히, 집단적 특성이 타 집단에 의해 타자화 될 때 개인들의 매몰은 더욱 심화된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가 서술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이 대표적 예시이다. 


    독일 정부는 유럽 전역에 퍼져있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집합시켰다. 이 순간 유대인들은 민족적 주체성을 잃었다. 베네딕트 엔더슨은 민족을 '정치적 공동체로서,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지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어지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렇다면 민족은 누구에 의해 상상되어지는 것인가? 민족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민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타민족 사람에 의해 상상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철저히 타민족에 의해 상상된 '유대 민족'일뿐이다. 즉,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에 수용됨으로써, 자기 정의를 잃고 타인의 상상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아우슈비츠 내 대다수 독일인들은 유대인을 막대했으며 무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심으로 유대인은 수용소에 갇혀 마땅한 존재라 믿었다. 이는 수용소 내 유대인들의 처참한 몰골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먼 옛날부터 여러 사회에서 타자화 된 유대인들의 부정적 이미지가 중첩된 결과이다. 디아스포라로 인해 항상 이방인 신세였던 유대인들은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악독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편견은 '유대 민족'의 집단적 특성이 되었고, 독일인은 '유대 민족'의 부정적 이미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생학을 적극 차용했다. 당시에는 객관적 사실이었던 우생학을 차용해 게르만족의 유전적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유대민족을 청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독일 정부는 왜 우생학까지 들먹이면서 유대 민족을 탄압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해야 했을까?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며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너'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있어야 한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의 교류를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 서로를 규정한다. 하지만 공통점의 기원을 따지며 공통점이 오직 '나'와 '우리'만의 고유한 것이라 주장하고(독일 정부가 주장했던 게르만족의 유전적 우월성), 차이가 배척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 타자화가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망한 독일에게는 전범국이자 패전국으로서의 독일이 아닌 새로운 '나' 그리고 '우리'가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를 꿰뚫어 보고 새로운 독일을 위해 유대 민족을 '너'와 '그들'로 상정하고, 그들을 깎아내림으로써 순식간에 새로운 '나'와 '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대 민족을 타자화하여 얻어진 독일 역시 타자화 된 '우리'일뿐이다.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없는 '우리'는 결국 '타자'에 의한 '또 다른 타자'일뿐이다. '또 다른 타자'는 절대 '우리'가 될 수 없다. 결국 홀로코스트는 '우리'일 수 없는 '또 다른 타자'라는 망상의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화로였다.


    프리모 레비는 상당히 건조하게 아우슈비츠라는 화로 속 생활을 묘사한다. 문체 때문인지 글에서 민족성을 기반으로 한 유대감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매일 고된 노동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민족적 유대감을 형성하긴 어려운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은 타민족에 의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유대 민족'이 어떤 국가 출신인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어떤 노동 계급에 속하는지에 따라 세분화되며 또다시 집단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프리모 레비만 해도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이었으며, '이슬람'에 속했다가, 화학자 코만도로 소속이 변했다. 그리스 출신 유대인들도 연합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도모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수용소 내 유대 민족의 재집단화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주된 원인은 '디아스포라의 해체'라고 생각했다. 디아스포라는 유대민족의 중요한 특징으로 그들의 역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각지로 퍼져 나가며 서로 다른 언어, 사회, 철학을 가지게 되더라도, 달라진 서로를 만날 수 없었기에 유대 민족은 계속해서 단일한 민족을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디아스포라는 유대교와 더불어 '유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유지시키던 중요한 장치였다. 하지만 수용소는 디아스포라를 해체했고, 이는 너무나 달라진 서로를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인에 의해 민족적 주체성을 잃었던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해체되며 상상과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현실 속에 민족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정의하던 커다랗고 강력했던 집단의 상실을 또 다른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즉, 디아스포라 해체로 인한 '유대 민족'의 상실이 유대 민족의 재집단화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프리모 레비는 자아를 잃지 않고자 노력했기에 아우슈비츠라는 화로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것이 인간인가>의 많은 유대인들이 삶의 의지를 잃고 금방 죽어버린다.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남은 이는 분명 강인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살아남은 모두가 인간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닌 듯하다.


    화로에서 태워지다 겨우 살아남은 유대 민족 중 일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수용소를 건설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수용소가 세워지게 된 배경은 홀로코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유대 민족의 공통된 삶의 터전이었던 '이스라엘'이라는 땅을 유대 민족만의 것이라 주장했다. 그 결과 유대민족의 새로운 '우리'인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었고, 팔레스타인은 배척되었다. 홀로코스트가 유대민족에게 부여한 피해자라는 새로운 집단적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전 세계가 이스라엘을 묵인했다. 마치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에게 면죄부를 쥐어준 것 같았다. 이 역시 민족적 특성에 압도된 개인들의 매몰이다.


    지금까지 홀로코스트로 훼손된 유대인의 민족성과 이를 이용해 망상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한 독일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홀로코스트가 유대 민족에게 어떠한 새로운 민족적 특성을 부과했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처음 이 책을 읽고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은 결국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는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던 인간의 무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화로에 넣을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수많은 '너'들을 '그들'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버리고, 수많은 '나'들 역시 '우리'로 집단화하는 인간의 이러한 무능력 때문에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일어난 것 같아 너무 슬펐다.


    다양한 '너'들이 '그들'이 되고, 다양한 '나'들이 '우리'라는 집단으로 매몰된다. 프리모 레비는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라고 했다. 레비가 말한 암묵적 도그마에 의해서 '너'들은 '그들'로, '나'들은 '우리'로 바뀐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너'와 '나'가 아닌, '그들'과 '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며, 민족주의는 강력해지고, 성 차별 역시 건재하다. 유대인들이 죽어가던 수용소는 없어졌지만 세계는 여전히 거대한 수용소이다.


    유대 민족처럼 인류 자체도 디아스포라이다. 유대인이 이스라엘에서 퍼져나갔 듯이 우리 모두는 아프리카 북부 어딘가에서 퍼져나갔다. 뚜벅뚜벅 걸어가 누군가는 아메리카 대륙에, 누군가는 유럽에, 누군가는 아시아에, 심지어 누군가는 배를 타고 지금의 호주까지 갔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다른 환경, 언어, 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때문에 같은 지구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같은 인류라는 것을 쉽사리 상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구는 수용소다. 인종, 민족, 종교, 성 등을 이유로 끊임없이 서로를 구분하고 나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나뉘다 보면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불분명한 기준에 의해 잘난 인간, 평범한 인간, 못난 인간으로 구분된다고 쉽게 상상해버린다. 이렇게 인간은 차이를 차이로 보지 못하고 차별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구를 수용소로 만드는 인간의 근원적 한계이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인가? 즉,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여야 한다. 프리모 레비가 계속해서 생각했기에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지구라는 수용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 인간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 개인과 집단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을 정의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지구라는 이름의 수용소는 문을 닫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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