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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광 May 16. 2024

똑 똑 똑, 똥 쌌어요

고양이들의 트리코모나스 연대기

고양이들이 노곤하게 낮잠을 자는 사무실. 적막을 뚫고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들린다.

시간차를 두고 단단하고도 경쾌하게 공간을 채우는 울림. 방향을 찾아 눈길을 돌려보니 바둑이가 화장실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게 보인다. 진지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엉덩이를 한껏 치켜들고 있다.


경건한 두 뒷다리 사이로 단정하게, 똑 똑 똑. 말끔한 대변이 생산되는 소리였다. 모래를 한껏 헤쳐놓은 틈으로 드러난 화장실 바닥 위로, 정갈한 덩어리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서사시의 문을 여는 노크 소리.


바둑(3세, 여아)


‘트리코모나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거창한 라틴어에 로마제국의 영웅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오늘의 빌런이다. 소리도 없이 찾아온 우리 사무실의 불청객.


트리코모나스는 동물의 몸에 기생하는 원충의 일종이다. 갑자기 고양이들 화장실에 다량의 설사가 관찰되어 분변검사를 했더니 나타나셨다. 현미경 촬영본 안에서 활발하게 꼼지락거리던 자식들, 아니 분들..


현미경으로 본 트리코모나스 ⓒ이승진동물의료센터


박멸이 꽤나 어려운 원충으로 여겨지고 변을 통한 전염성도 높다. 따라서 쉼터 같은 다묘환경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 잘 듣는다는 약은 하나뿐이다. ‘로니다졸’. 역사적 빌런을 처치할 영웅의 이름으로는 어딘가 모양이 빠지는 느낌. 실제로 부작용이 명확해서 넓게 쓰기 어렵고, 그 때문인지 단종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다. 약을 쓰면 2주 안에 퇴치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없어졌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사 증세 외에 건강상의 문제는 특별히 없다는 점. 하지만 모든 화장실이 설사로 넘쳐나는 사무실이라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설사와의 전쟁, 이름하여 ‘트리코모나스 연대기’가 시작되었다.


일단 증상이 있는 고양이들을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 격리를 하든, 약을 먹든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기록지를 작성해 가능한 한 아이들의 모든 대변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모래 소리만 들리면 변 상태를 확인하러 갔고, 설사가 확인된 아이들은 격리 조치하면서 관찰했다. 증상이 반복되면 분변검사를 진행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그런데, 약은 어디서 구하지?


여기서부터는 로니다졸을 향한 진의 모험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물량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거의 없는 것으로 알아요.

처음 트리코모나스 감염증을 진단해 준 원장님의 말씀이었다. 아는 병원마다 연락을 해보겠다고는 하셨지만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결국 원장님으로부터 희소식은 없었다. 진은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모든 동물병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약을 구비하고 계신지 물었고, 그 병원에 없다면 다른 병원을 소개받아 그쪽으로 다시 전화를 드렸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다들 알고 계신 약이었지만, 구비하고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설사 증상을 보인 다른 아이의 원충을 검사하러 가장 자주 가는 병원에 갔더니 약을 가지고 계셨다. 희소한 약이라는 생각에 규모가 큰 병원 위주로 문의를 드렸던 것이 착오였다. 파랑새는 정말로 등잔 바로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모래 전체갈이 중인 격리실 바깥의 화장실들, 그러니까 절반 정도


그동안에 전장이 된 사무실은 어땠을까.


여러 아이들이 병원과 격리장을 오갔고,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설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설사나 무른 변은 부서지기 쉬워서 화장실을 쉽게 더럽히고 전염의 가능성도 높인다. 화장실 청소를 평소보다 시간을 들여 꼼꼼히 하고 소독도 훨씬 자주 해줘야 했다. 모래도 전체갈이 주기를 당겨야 했고, 그 때문에 화장실에 모래를 아주 넉넉하게 넣어주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눅눅한 변들과 씨름을 이어가는 중이었으니, 단단하게 뭉친 변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 앞서 들었던 그 노크 소리를 다시 들어보자. 똑똑똑, 혹은 툭툭툭. 아이들의 정상변 보는 소리는 우리에게 사무실을 경쾌하게 울리는 승전보처럼 들렸다.


이윽고 지난한 시간을 견뎌 사무실 설사의 비중이 10% 아래를 향해 가고 있다. 모두가 고생스러운 시간을 잘 버텨주었다. 이 증상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한다고 하고, 원충이 있어도 증상은 나타나지 않은 채 전염만 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약물치료와 무관하게 길면 2년까지도 지속된다고 하니까.




어쨌거나 이렇게 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소설은 후일담이라고 하는 것처럼, 문제 안에 갇혀있을 때는 그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지나온 것만을 다룰 수 있고 그것들이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똥의 연대기를 풀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원충이 어디서부터 왔을까?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새 식구가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나서 생긴 일이었고, 우리도 외부에 있다 들어올 때마다 소독도 하고 있다. 악당의 출처와 잔당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동안 물변으로 가득 찼던 화장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으니 종전을 선언해도 좋을 것이다. 고양이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역시, 정의는 승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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