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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광 May 20. 2024

내 친구를 부탁해

낯선 고양이와 등을 맞대고 앉았을 때

“엄마 왔어요!” “엄마가 미안해!”


우리 사무실 식구인 진과 혜진 씨는 보통 고양이들에게 엄마이기를 자처한다. 두 사람이 고양이에게 보이는 헌신을 보아도, 고양이들이 두 사람을 대하는 모양을 보아도, 임보 엄마는 적합한 이름 같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관계 설정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보호자라 그런지, 내가 엄마나 아빠라고 생각하면 몸 구석구석이 가려워진다.


내 첫 고양이 히리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 이미 부모로서는 낙제점을 받았고, 히리는 나를 정확히 집사로서 대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똑바로 하지 않으면 엄하게 혼내는 고양이였다. 나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선에서 히리를 동거관계로서 대하기로 했다. 내가 해야 할 몫을 다하되 히리로부터 어떤 태도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히리도 마지막에는 나를 보호자로서 믿어주고 기대어 오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우리가 얼마나 서로 의지하고 사랑했었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다. 히리와 나는 몹시 긴밀한 사이였지만, 어쨌거나 부모-자식의 느낌은 아니었다는 말.




우리 사무실이 꾸려지고 아직은 어수선했던 시기였다. 진은 밥그릇 사이즈부터 목재 격리장 주문제작에 이르기까지 고양이들을 위한 공간을 꾸리기 위해 온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에 맞춤하게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나는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얼을 타며 손가락을 빨기 일쑤였다. 나는 이런 나를 위해 구체적이고 분명한 -가능하면 소소한- 역할을 부여해 주십사 진에게 부탁했다.


"그러면 격리장에 있는 아이, 손을 좀 태워줘."


이제 막 구조되어 영문도 모른 채 앉아있는 작은 몸집의 고양이. 어쩐지 나를 닮은 듯, 동그랗게 겁먹은 얼굴. 귤이였다.



처음 만난 귤이는 마치 콩 같았다. 격리장 구석에 몸을 공처럼 돌돌 말아 넣고, 마음은 그보다 더 작은 콩처럼 꽁꽁 싸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조금만 가까이 가도 도망가고 하악질을 하며 무서운 티를 냈다. 이런 아이를 어떻게 손을 태워야 하는지, 무섭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격리장 옆 벽에 기대어 귤이와 등을 맞대는 방향으로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둘이서 아무 말 없이 숨소리만 주고받으며 앉아있는데 어쩐지 귤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난 여기가 너무 낯설어. 너도 누군지 모르겠고. 이대로 괜찮은 거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별 수확 없이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에도 나는 같은 자세로 귤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그러다 며칠 뒤에는 똑같은 자세에서 격리장 안에 팔만 집어넣고 가만히 있었다. 또 그다음 날에는 츄르를 조금 건네 보기도 했다. ‘하루에 한 뼘씩만’ 하는 마음으로 귤이와 거리를 좁혀갔다.


그러다가 귤이가 가장 덜 불편해하는 부위를 알게 되었다. 등이었다. 엉덩이 쪽은 불안해하며 방향을 바꾸었고, 얼굴 근처로 손이 가면 목이 사라질 것처럼 머리를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등 가운데 손이 닿을 때는 움찔하기는 해도 당장 자세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렇게 등에 손을 대고 있는 시간을 늘려나갔고, 차츰 앞뒤로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자 귤이도 천천히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어딘가에 코와 입을 비비고 싶어 하고, 그게 사람의 손가락이어도 괜찮다는 걸 알려 주었다. 유독 만져주길 바라는 부위는 사실 뒤통수라는 것도. 그건 사무실 식구들 중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출근하면 귤이 격리장으로 먼저 가 지난밤의 안부를 물었고, 귤이는 가장 덜 불편한 인간인 나에게 기꺼이 몸을 내주었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서 나는 알았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구나.



귤이는 구조 당시부터 감기를 앓고 있었고 구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약을 먹어야 했는데, 손을 전혀 타지 않으니 어려웠던 형편이었다. 쓰다듬기를 어느 정도 허용해 주었을 때도 직접 아이를 안고 약을 먹이기는 무리였다. 나는 츄르를 사용해 입가를 향한 거리 좁히기를 다시 시도해 갔고, 결국 츄르 끝에 알약을 끼워 쑥 밀어 넣으며 약을 먹일 수 있게 되었다. 귤이가 손을 타게 되고, 약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입양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 내가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해낸 일 인분의 역할이었다.


처음 만날 날 들었던 귤이의 목소리는 물론 내 것이었을 테다. 진이 의욕 넘치게 시작한 쉼터였는데 나는 어떻게 도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진에게 방해가 될까 그런 이야기를 모두 꺼낼 수는 없었고, 그래서 조금은 외로웠던 것 같다. 쪼그라들어 있던 내가 사무실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내 친구 덕분이었다.


눈망울에 겁이 가득해 그 무게에 끝이 살짝 쳐진 눈매. 친해지고 나면 먼저 눈빛을 보내며 소리높여 인사하는 내 친구 귤이.


여러 달을 우리와 함께 보낸 귤이도 다행히 좋은 입양자를 만나게 되었다. 입양 이동에 함께한 날, 입양자는 우리에게 원보호자로서 조언을 구하셨다. 아이의 성격이나 주의사항 같은 걸 말씀드려야 했지만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먼저 나가버렸다.


제, 제 친구를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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