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의 길이
시작은 ‘잠시만’이었다.
진의 동네에 구조가 시급했던 고양이가 있었다. 구조와 치료는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몸이 아직 온전치 않거나 이미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를 방사해야 할 때 찾아오는 고민의 시간. 이 아이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이미 우리 집이든 진의 집이든 더 이상 임보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진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다. ‘당장 잠시라도’. 그 마음이 3개월 단기 오피스텔 임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3개월은 한 달만 더, 한 달만 더 하면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차피 공간이 생겼으니 도울 수 있는 다른 고양이들에게도 품을 내어주고 싶었고, 그렇게 생긴 묘연과 인연을 타고 임보처의 수명은 자꾸만 늘어갔다. 어느새 1년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는 단단해진 진이나, 뜯어말리는 나나 이 고양이 공간이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공간을 꾸리자.
구상은 다양했다. 요가 수련과 고양이 돌봄이 공존하는 곳, 커피 향과 테이블 사이를 고양이들이 넘나드는 곳, 혹은 서점 옆 고양이 쉼터 등등. 이것들의 일부(어쩌면 전부)는 여전히 우리의 소망 안에 있지만, 먼저 선택한 형태는 ‘사무실’이 되었다. 비용 대비 너른 공간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안에서 우리도 '우리의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묘생과 집사의 일상에 두루 도움이 되는 용품이나 우리의 사연을 담은 굿즈를 만들면 어떨까? 고양이들과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 책이나 영상으로 엮으면 어떨까?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생에 관해 고민을 나눌 수 없을까?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우리가 만들어 갈 것들을 이리저리 굴려보겠다는 의지를 담아 사무실 가운데에 커다란 테이블을 놓았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모든 것이 고양이들의 화장실을 치우고 약을 먹이는 일에 밀리고 있지만.
이곳에서 고양이들도 사무를 본다. 캣타워 위에서 햇살도 쬐고, 서로 그루밍도 해준다. 낮잠 시간을 잘 채웠다가 저녁에 우다다 파티도 치르려면 하루가 빼곡히 바쁘다. 출근하는 집사들 괜찮은지 냄새도 맡아줘야 하고, 가끔 방문하는 손님 응대도 추가 업무사항이다. 아프지 않고 명랑하게 묘연을 기다리는 주업무에 다들 성실히 임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삼십여 마리 이상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직접 방문해 주셨던 수의사 선생님은 경험해 본 쉼터 중에서 특히 관리가 잘된 환경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영상통화로 상담받는 동물행동교정 선생님도 우리 사무실의 운동장을 칭찬해 주셨다.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라는 걸 집사들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한낮의 사무실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대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기도 한다.
일꾼은 세 사람. 진과 혜진 씨와 내가 시간대를 나눠 따로 또 같이 출근하며 꾸려가고 있다. 매사에 꼼꼼하고 다재다능한 총책임자 진과, 몸을 돌보지 않을 만큼 부지런하고 꿋꿋한 혜진 씨 덕분에 나의 무임승차가 가능한 구조다. 거기에 주말마다 우리 사무실을 찾아주는 자원봉사 학생 세 분도 빼놓을 수 없는 감사한 식구이다.
진이 처음에 생각했던 '잠시만'은 어쩌면 여전히 유효한 말인 것 같다. 우리에게도 고양이들에게도, 이 사무실이 종착지는 아닐 테니까. 고양이들은 더 좋은 평생의 보금자리를 만나 하나둘 사무실을 떠날 것이다. 그저 그 ‘잠시’가 편안한 기억으로 채워지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만약 모두가 그럴 수는 없겠다고 생각되는 어느 날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잠시가 아닌 평생의 안식처를 이룰 것이다. 그게 모두에게 아늑하고 여유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밤마다 부동산 앱을 뒤적거리는 진의 손가락에는 그런 마음이 눌러 담긴다.
그때까지는 이 사무실이 우리가 함께 머물 소중한 공간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긴 ‘잠시’가 될지 모르지만 잘 부탁한다고, 밤동안 친구들을 잘 지켜달라고 인사하면서, 오늘도 출근시간을 지키지 못한 마감조는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