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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광 Jul 18. 2024

가만한 기적의 속도

호스피스 병동의 구슬이 할머니

“아니야.” “어미야.”

어디선가 구성진 울음이 들려와 집안을 채운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같지만 진과 내게는 반가운 방송이다. 구슬이 할머니가 우리 모두를 향해 던지는 잔소리. 오늘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으이양” 하고 우는 소리가 영락없는 할머니의 구시렁 소리 같다. 우리가 그 소리를 따라 하면 구슬이가 또 응답하고 그런 대화가 오가면 ‘아 오늘도 구슬이가 괜찮구나, 소리를 잘 내는구나’ 그렇게 안심한다.


할머니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성묘가 된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처럼 치아 등의 건강 상태로 추측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호 중인 고양이들 중 최고령일 거라는 건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나이테 없는 고목이 그렇듯이.




구슬이를 처음 만난 건 진이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다. 워낙 지저분한 몸상태였기 때문에 진은 일단 아이의 상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맛있는 간식으로 유도해 보아도 잘 다가오지 않던 구슬이는 뒤뚱뒤뚱하며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조심스레 뒤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아파트 단지 뒤편에 공사용 연장들이 쌓여있는 공터였다. 구슬이는 거기서 쓰레기가 가득 담긴 구정물을 마시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진이 소리를 내어 저지하고 얼른 깨끗한 물을 가져다줬지만, 구슬이는 고개를 돌려 더러운 물을 다시 마시러 갔다. 몇 번이나 말린 뒤에야 겨우 깨끗한 물에 입을 대는 구슬이를 보면서 진은 구조를 결심했다.



구조 후 알게 된 구슬이의 건강 상태는 예상대로 복잡했다. 일단 기력이 너무 없고 그루밍을 전혀 못해서 온몸의 털이 떡져있었다. 그 덩어리들이 딱딱하게 굳어 여기저기 부서진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호흡기 증상이 심해서 눈과 입가도 지저분했고, 가장 큰 증상은 만성적인 설사였다. 약을 먹는 동안은 좀 나아졌다가도 끊으면 곧 다시 발생했고, 특수 사료를 급여하면 좀 낫는 것 같다가 재발하기를 반복했다. 여러모로 특별 관리가 필요했기에 진은 구슬이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구슬이를 위한 공간에 다른 고양이들처럼 수직공간은 필요 없었다. 점프는커녕 계단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구슬이의 활동량은 극히 적었다. 진은 거실에 칸막이를 세우고 구슬이를 격리해 주었다. 아직 어린 고양이들이 벽을 넘나들며 구슬이를 귀찮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홍옥이만 빼고. 눈치도 안 보고 세상 발랄하기만 했던 홍옥이는 폴짝폴짝 담벼락을 넘으며 할머니 밥을 같이 먹고 옆에 드러누웠다. 우리에겐 사납고 손을 전혀 안 타던 구슬이였지만, 방학 때 놀러 온 손녀를 바라보듯 홍옥이에게는 곁을 내주었다.


"호스피스 병동 같아.”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돌멩이 같은 자세로 매일 누워만 있는 구슬이를 보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고양이답지 않은 모습으로 하루하루 연명만 하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 그런 자조가 일었다. 그런데, 의미가 있었다. 구슬이는 느리지만 서서히 좋아졌다. 처음에는 패브릭만 깔아줘도 다 헤집어 놓고 맨바닥에만 앉아있던 아이가 이제는 카페트나 낮은 소파를 골라 앉는다. 아침저녁으로 집안을 걸어 다니는 루틴도 생겼고 약간이지만 스스로 그루밍도 하게 되었다. 이런 작은 기적이 일어나기까지 진은 구슬이의 자리를 볕이 드는 곳으로 옮겨주고, 들러붙은 털 덩어리를 잘라주고, 바둥대는 아이를 담요로 끌어안고 약을 먹였다. 내 눈에 무모해 보였던 진의 노력이 구슬이에게는 닿았다. 설사가 가라앉는 데만 일 년 반, 집안을 왕복하며 산책을 하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 느리지만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사실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구슬이는 이미 중성화가 되어있었고, 심지어 치아가 전발치 되어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케어를 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심각한 상태까지 내몰리게 되었던 것일까. 우리를 만나기 전에 구슬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슬이는 지금 우리 곁에 있고 매일 한 발을 내딛을 힘을 더 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별의 시간이 구슬이와 우리에게도 올 것이지만, 그저 사는 동안 행복하기를. 그리고 조금 더 소박하게는, 올해가 가기 전에 구슬이를 따뜻하게 목욕해 줄 수 있기를. 우리 귀여운 할머니에게 작은 기적이 몇 번만 더 일어나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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