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나를 구원해내는 법
여러 번의 계약 만료를 경험했다. 나는 계약직이라는 이름표를 달더라도 회사에 소속되는 고용형태가 싫지 않았다. 시급이 적은 알바나 고용 유지가 불안정한 과외를 전전하다 보면 언제나 안정이 고팠다. 계약직은 2년간의 울타리를 제공해주었다. 사원증도 나왔고 4대 보험도 가입되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전세계약에 밀려 이사하듯이 몸에 익은 일터를 떠나야 했다. 약속된 이별의 시간은 사람을 애틋하게 만든다.
가장 아쉬웠던 이별은 경향신문사였다. 나는 야간에 마감되는 지면 기사를 웹에 업로드하고 서버에 아카이빙하는 일을 맡았다. 다음날 신문에 실릴 모든 기사를 빠르게 훑어 읽고 분류에 맞게 배치했다. 최순실의 태블릿이 처음 뉴스에 등장한 날에도, 그 사건이 대선으로 일단락되던 날에도 나는 신문사에 있었다. 남들 퇴근할 때 출근하고 그들이 다 잠든 뒤에 퇴근하는 일상이었지만 그 안에 배움이 있었다.
그리고 2년이 되었다. 기간제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무기간이 2년을 초과한 계약직 근로자를 무기계약이나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되어있다. 물론 알다시피 그렇게 하는 회사는 없다. 처음부터 2년에 살짝 못 미치는 계약기간을 설정하고 기한을 채우면 재계약 논의 없이 스무스하게 안녕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다.
경향신문이 이 법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굳이 기사나 사설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보지를 표방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앞장서 대변하고 있는 신문사가, 법의 취지와 달리 보호되지 않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지는 알 만하다. 하지만 회사는 내게 무기계약 전환을 제안하지 않았다. 팀장님이 인사팀에 직접 찾아가 사정을 하셨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옆 데스크에서 일하며 안면을 텄던 기자들은 내게 작별인사를 할 때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회사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는 토로한다. 그녀를 조여 오는 건 최근 심해진 우울증보다는 비상식적인 고용환경이다. 회사는 건강 악화로 생산력이 떨어진 산드라를 해고하려 하고, 그녀가 항의하자 조건을 건다. 동료들이 1000유로(약 130만 원)의 보너스를 포기하는 데 투표한다면, 산드라의 고용을 유지하겠다고 제안이었다. 카메라는 주말 이틀간 동료들의 집을 찾아가 부탁하는 산드라의 어깨너머를 따른다.
동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자신에게 보너스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설명하며 산드라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하고, 어려운 부탁을 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며 그녀를 비난하기도 한다. 기꺼이 그녀와 함께하겠다고 말해주는 소수의 동료는 몹시 지친 산드라에게 큰 힘이 된다. 너의 보너스와 나의 고용을 바꾸어 달라는 요구를 반복하는 산드라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구걸하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내장이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으로서 내가 결국 처하게 된 건 산드라보다는 산드라 동료들의 입장이었다. 나를 위해 보너스를 포기해달라는 산드라의 부탁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동료들의 얼굴을 경유해서 '너라면 어떻게 하겠나'라는 질문이 되어 내게도 날아들었다. 130만 원이라는 액수가 적어서 선택이 쉬울까? 1300만 원이라면 어떨까? 아니 1억 3천만 원이라면? 얼마가 되었든 내 이익을 위한 선택이 동료의 생계를 위태롭게 한다는 본질을 생각한다면, 액수가 올라갈수록 더 잔인한 질문이 되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계약 만료를 핑계로 한 회사의 고용유지 거부가 부당하다며 저항했다면, 내게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던 기자들은 나를 지지해줬을까. 거기에 본인의 임금 삭감이 달려있더라도 그렇게 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본인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업무를 맡았던 나를 동료로 생각했을까. 같은 사무실 바로 옆 데스크에서 일하던 나를.
영화 속 설정을 내 상황과 굳이 맞물려 이해하려는 건 지루한 감상법이지만 그걸 피할 수 없는 영화, 피할 수 없는 때는 있다. 글 쓰는 삶을 살겠다며 여러 알바와 계약직을 거치는 동안, 작업의 성과는 없었고 생계는 불안했다. 대학원은 다니다 말았고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는 헤어졌다. 그런 시점에 다시 찾아온 계약 만료였고, 계획된 다음 일터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았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고 느꼈다.
다시,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들과 몸싸움 후 산드라를 돕겠다고 나선 동료 이본을 보면서 산드라는 자신 때문에 폭력이 생기는 게 괴롭고 매번 거지가 된 기분이 든다며 좌절한다. 산드라와 나는 모든 질문과 대답을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달리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산드라 옆에 남편과 친구들을 두었다. 무너지려는 그녀를 붙들어 투표가 있는 월요일 아침까지 이끌었다. 그러자 선택과 질문이 산드라를 향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껏 선택하기를 포기해왔다. 이런 영화를 봐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래서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팔짱을 꼈다. 내 문제가 아니길 바랐던 것 같다. 어쩌면 내 욕심일지도 모르는 문제로 동료를 도덕적 갈등에 빠뜨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변화의 지점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동료 안느는 산드라의 질문을 계기로 자기 뜻이 반영되지 않는 결혼생활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산드라를 돕기로 한 동료들 사이에는 앞으로도 서로를 지켜줄 수 있다는 신뢰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마지막 질문에 답을 던지고 나서는 산드라의 얼굴이다.
나는 앞에서 영화의 사실관계 하나를 틀리게 이야기했다. 영화는 산드라 고용유지에 대한 투표가 이미 끝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산드라는 사장을 찾아가 재투표를 건의한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그것을 되돌리는 방식으로 영화는 질문을 시작한다. 변화는 어디서부터였을까. 회사에 목소리를 내볼 생각도 하지 않은 내가 기자들이 내 편을 들어주었을까 하며 판단하는 게 가능할까.
내가 나를 방치할 때 나는 남에게는 물론 나에게도 골칫거리가 된다. 내게 주는 기회가 내 주변에게도 기회가 된다. 거기서 변화가 시작된다. 연대는 동그라미 같은 결속이라기보다 하나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물결이다. 하늘만이 아니다. 사람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