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의 『내 잠 속의 모래산』을 핑계로
이 거리엔 상상하지 않은 일들만 일어나네 잠깐 고개를 돌리면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저 어리둥절한 풍경 앞에서 다시…저기 누군가 아주 현실적인 혜화동의 오후에 주저앉아 문득 웃음을 터뜨릴 듯한데
- <리얼리스트> 중에서
거리두기는 내 특기다. 사회적 거리두기 말고, 사회랑 거리두기. 되도록 많은 커뮤니티에서 가능하면 많은 사람과 어울리던 때도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게 정말 나였나 싶어진다. 지쳤다기보다는, 질려버린 것 같다. 불편한 사람들이 겹쳐서 다가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시스템의 부조리에 실망하는 일이 더 많았다. 바꿔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슬프도록 고단한 나의 앞가림이 모든 걸 막아섰다. 그럼에도 소속되는 것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고, 그 안에서 도망치고 숨다보니 결국 거리두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굶어서 죽은 시인은 빈 술병을 흔들며 흘러가고 흘러가는 그의 흔들리는 등 쪽으로 聖 페테르부르크의 저녁은 자욱하고 자죽한 네바 강변에 죽치고 앉아 죽은 시인은 낚시질이나 하고 죽은 그의 낚싯대 곁에 나는 쭈그려 앉기나 하고
- <삽화처럼, 聖 페테르부르크에서> 중에서
우리를 둘러싼 프레임은 늘 다층적이다. 책장 속의 책, 책 속의 챕터, 챕터 속의 문장. 나는 아마 그 사이에 낀 삽화 정도가 아닐까. 책장이 흔들리면 삽화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소속된 것의 운명 자체를 배반할 일이 아니라면 그 안에서 은밀한 자유를 찾아야 한다. 함께 속한 다른 것들이 흩어지는 동안에, 사라지는 동안에. 내가 아니라 나머지를 모두 그림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풍경을 그저 바라보며 앉아있는 일.
풍경과 거리두기, 이거 비겁한 걸까?
시간이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사내는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벌써 키 작은 풀잎들은 눈밭에 묻혀 있었다.…이건 어이없는 모노드라마군. 사내는 부러진 의자에 앉는다. 결국 이 눈밭에 서 있던 것은 가건물이었을까.…깨진 거울들 몇 개 부옇게 흐려져 눈밭에 꽂혀 있었다. 저, 난반사하는 생, 이제 무언가 그를 덮칠 것 같다. 갑자기 격렬한 웃음을 터뜨리는 사내 위로, 핀 조면, 서서히 저문다.
- <눈밭에 서 있는 남자>
『내 잠 속의 모래산』에서 시인의 작업은 사진가의 그것과 유사하다. 사진가는 반드시 가야 할 곳을 찾아가 취재를 하고 정확한 지점과 대상을 골라 촬영한다. 그것들을 모아 편집을 하기도 하고 거기에 빛을 투과하여 인화해낸다. 그리고 결과물을 전시한다. 이 성실한 장면 채집자에게 소극성을 지적할 수 있을까.
판정을 내리려면 그가 보고 담아낸 것들을 확인해야 한다. 현실과 꿈, 도시와 숲을 가리지 않고 오가는 이 풍경에는 배회하는 것들이 있었다가 낙하하는 것들이 있었다가, 이윽고 붕괴하는 것들에 그 초점이 맞춰진다. 시인은 무너지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그에 따르면 무너지는 것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지점에서만 우리의 위치가 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해야만 이 상투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독자를 불러모아서 떨어지는 아이와 떨어지는 꽃잎을, 그 부드러운 선과 무너지는 이 풍경들을 함께 지켜보자고 말한다.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그 아늑한 풍경을,/멀리 있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누군가는 이 황혼녘의 부두로 스며든다는 것은./그러므로 멀리 있는 그대여 그대 멀리 있는 이여,/가장 단순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것들을/무심히 바라보시길. 서해 바다의 브라운관 속에서/처연히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져서, 무너짐으로써/고요히 무너져가는 것들을.
- <코끼리 -L에게, 마지막 엽서.> 중에서
세상이 내게 왜 이러나 싶을 때마저도 부둥켜 안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 되지 않는 짝사랑에 달라붙어있기만 하는 일은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롭다. 나의 안전공간이 될 거리를 확보하자. 그럼에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말자. 지켜보는 자에게는 힘이 생긴다. 내 배경과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를 가진 그 공간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면서, 내 시선을 가져보는 일. 나를 둘러싼 것들을 정확히 호명하고 함께 지켜보는 일의 가능성을 기대해보고 싶다.
어디든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밤의 천체가 있지…하지만 생각나지 않네 이것이 나의 리듬이었던가, 생각나지 않네 너무 많은 질문들에 관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다만 한 여자의 부드러운 등 그리고 다른 삶을 지나가는 다른 표정들이 얼마나 선량할 수 있는가, 따위
- <너무 흔한 풍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