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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Oct 19. 2022

김밥집 아주머니가 서른 둘 청준에게 건넨 위로

올해, 1년 넘게 자취하던 집 근처에 맛있는 김밥집이 하나 생겼다. 요리에 영 관심이 없는 편이라 끼니 때우는 일이 늘 숙제처럼 여겨지는데, 김밥집이 생겨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늘 빵과 커피, 또는 배달음식으로 속이 불편한 식사를 했었던 나에게 선물처럼 나타난 김밥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기자마자 방문해서 김밥을 사 먹었던 첫날 느낌이 왔다. 이 집은 내가 자주 애용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 푸짐한 재료와 따뜻한 쌀밥, 그리고 간이 잘 되어있는 국물까지. 모든 게 완벽한 조화였다. '무슨 김밥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다. 따뜻한 김밥이 그렇게 맛있는지 이 아주머니 덕분에 알았다. 


그렇게 한 6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머니와 만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제도 퇴근길에 아직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계란말이 김밥'을 주문하고서 기다리다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어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질문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떻게 20년을 한 직장을 일하셨어요? 2년도 힘든데..."라고 푸념 섞인 질문을 건넸다(아주머니가 많이 편해졌나 보다).


얼마 전에 방문했을 때 먹은 볶음 김치와 참지가 들어가 있는 김밥이 너무 맛있어서,

"이 동네에 오래 있어주세요! 오래 먹고 싶어요!'라고 인사를 건네니,
"제가 엉덩이가 무거워서 어디 잘 안 가요. 전 직장에서도 20년 동안 일했는걸요?"

라고 답하셨던 게 기억이 났다. 사회생활 6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새롭게 도전한 일의 경력은 겨우 2년밖에 안 되는, 서른두 살 청춘인 나에게 아주머니의 '20년'경력은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멀다). 어쨌든, 요즘 고민이 '일', '직업'이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툭하고 튀어나왔나 보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자신의 긴 이야기를 건네주셨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 다 경험이에요. 이직을 하게 된다고 해서 지금 그곳에서의 시간을 후회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뭐가 됐든 다 경험이에요. 한 곳에 있으면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이직을 하면서 다양을 경험을 쌓다 보면 또 어딘가에 정착할 곳을 찾게 될 거예요. 그리고 있던 곳에서 느끼고 배웠던 것들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몰라요. 실패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 했었거든요. 젊었을 때 메밀국수 집에서 일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이 엄청 도움이 많이 돼요. 그리고 제가 20년 동안 상담사를 했었고, 지금 이렇게 요식업을 하는 건 처음이에요. 이 나이에 가게를 하게 될 줄도 몰랐고요. 그런데 그것도 도움이 많이 돼요. 그런데 상담일을 한 덕분에 사람에 대해 어려움이 없고, 기본적으로 마음이 열려있으니까 손님과 대화하는 게 어렵지 않아요.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거든요. 누가 와도 괜찮아요. 김밥집을 한다고 해서 김밥만 싸는 게 아니잖아요? 손님들과의 연결도 중요한데 그런 게 잘 되니까요. 그리고 일단 기본적으로 찾아와 주는 게 진심으로 너무 고마워요.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인생 길잖아요. 우리 80까지 일해야 할지도 몰라. 늦은 게 아니야. 알겠죠?"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지금 내가 듣고 싶었기도 했고, 스스로 얘기해주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요즘 길을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회사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만 같고, 이 공간에 머무는 것이 그리 즐겁지가 않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 맞나?'라는 고민이 머릿속이 맴돌다가도 '이제 한 곳에서의 오랜 경력이 있어야 하니까 이직은 하지 말고 최대한 버텨보자'라는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제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이 시간, 이 만남, 이 경험 또한 다 내 삶에 좋은 거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아, 그리고 어제 대화를 나누며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아주머니의 전 직업은 '상담사'이셨다고 한다. 늘 대화를 나눌 때마다 참 잘 들어주시고 따뜻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직업이 참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했다. 아 물론, 모든 상담사가 따뜻한 것도, 상담사만 따뜻한 것도 아니지만!)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가끔 이런 감사한 분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선물 같은 만남.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제 김밥집을 들르지 않았더라면, 그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소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나눌 수 없는 이야기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문득 아주머니에게 거리를 두지 않고 마음을 열고 '맛있어요, 오래 해주세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고 건네었던 나 자신에게도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정말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 콘텐츠 에디터로서 인터뷰를 진행해왔던 나는 어쩌면 낯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제의 대화로 나는 그 김밥집이 더욱더 좋아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는 길에 의문이 있지만 그래도 틀린 길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또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오늘도 나는 나에게 좋은 날을 선물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오늘은 날 위해 어떤 이벤트가 선물되어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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