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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1.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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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엽은 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와 상황을 정리했다 광장에서의 폭행과 개성에서의 사건으로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거 뭐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나’ 광수대 근무 이후로 연달아 온몸을 쓰는 사건은 오랜만이었다. 광장에서 있었던 시위대 사건과 개성에서 총격을 당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경기남부의 조폭 남문파를 수사했을 때가 떠올렸다. 수원 영통의 뒷골목에서 검거 중 칼을 맞아 병원에 한 달 정도 누워있을 때였을 것이다. 누워 있는 순간 삶은 끊임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던 자기 개발서의 진부한 문구가 생각났다. 연희가 찾아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울고불고 했던 기억도 새삼스러웠다. 지금은 자신이 총에 맞아도 그러려니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낫다. 하룻밤 숙면을 취하자 몸에 근육통이 느껴지는 것 빼고 움직이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우선 서해산업을 방문해야 하고 근처 장마당과 건설 중인 추가중인 공단 시설에 대한 파악도 필요하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수혁 대위를 대신해 김시후 대위가 정엽에게 필요한 업무를 도와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김수혁과는 달랐다. 180이 넘어 보이는 키와 다부진 근육질의 체형이었다. 수염을 깍은 자리는 파리해 보였고 입매는 무거워보였다. 각진 얼굴에서는 뭔가 고지식함이 풍겼다. 김수혁이 수더분한 인상이었다면 그는 턱을 깍아 놓은 석고상 같은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정엽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김시후를 보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개풍군 일대로 이어지는 도로로 그는 차를 몰았다. 며칠 전과 같은 도로의 표지판과 시골길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격된 곳을 지나갈 것이다. 정엽은 순간 움찔했다. 김시후는 그의 이런 모습을 곁눈질로 살짝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곧바로 어제의 그 장소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정엽은 순간 그 일이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수사관님 괜찮으십니까?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이 부근이라고 하던데요. 

네, 이 근처입니다. 도랑에는 풀들이 차량의 모양으로 눌려 있는 흔적이 보였다.

큰일을 겪으면 온몸이 움츠러들죠. 기억이 참 무섭습니다. 정엽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 온지 3년이 됐습니다. 평화유지군 파병이 결정된 후 처음으로 왔으니까요. 오래됐다면 된 것이고 아니면 아닌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여기 자치권이 인정되면 많은 부분이 바뀔 것 같기도 합니다. 휴전선 근처 일대 평화 생태공원 조성사업도 곧 속도를 낼 것이고요. 잠깐의 침묵 후에 정엽이 말을 꺼냈다. 

공단 폭발 사건은 평화유지군에서 어떻게 조사와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까?

제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일단 개풍군과 해주 쪽 주둔 부대에 거의 다 왔습니다. 

여기로 지원하신건가요? 아니면 파견이었습니까? 전에는 어디서 근무하셨는지요. 

네, 헌병대에 있었습니다. 짧은 대화 이후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렸다.


 군용 지프는 마을 회관 비슷한 곳으로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는 듯 경사로가 낮은 곳으로 진입했다. 시멘트로 대충 지어진 마을회관 옆으로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벽면 시멘트의 상태는 낡았고 줄과 열이 잘 맞지 않아 보였다. 몇몇 가구는 집 근처에 외양간을 만든 듯 했다. 평화유지군의 천막이 오히려 세련 돼 보이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막사는 크게 4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의료진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콧물을 흘리는 한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서 진료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엽은 이곳이 과연 2023년이 맞는것인가. 아프리카 빈곤한 국가의 모습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억센 억양의 북한 말이 곳곳에서 들리지 않았다면 제3세계 저개발국에 파견을 나온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엽과 수혁을 구해준 장교는 칠레 인이라고 했다. c동 4막사에서 폭발 조사 담당자인 심영환 대위는 자료를 쌓아두고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하는 듯 보였다. 정엽을 보고 심영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연락 받았습니다. 심영환은 30대 중 후반으로 보였고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주름이 잘 잡힌 상의가 인상적이었다.   

공단 근처 연구소 폭발이 일주일 전에 있었으니까 아직 완성된 보고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폭발물에 대한 시료조사를 의뢰했기 때문에 곧 결과가 나올 예정입니다. 간략히 상황에 대한 내용은 보내드렸습니다만. 

네, 그 부분은 이미 확인을 했습니다. TNT 100kg정도의 폭발을 일으킬만한 화약이 사용됐을 거라고 합니다. 2미터 두께의 콘크리트를 파괴할 수 있고 채석장 발파 정도의 폭발이었겠죠. 지지대와 기둥만 무너뜨리면 건물이야 주저앉으니. 하지만 그 정도의 양을 한 번에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저희도 조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심영환이 말했다. 

평화유지군 부대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무장해제 전 빼돌린 물품일수도 있고요. 그 시설은 연구시설로 불리는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공단에 속해 있지만 특별한 용도로 활용된 것 같은데. 생산시설이 아닌 겁니까?

음. 수사관님 정확하게 시설이 어떤 용도인지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릴 부분은 아닌 듯 합니다. 저는 폭발 조사만 진행 중이거든요. 

그럼 따로 수사는 진행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정엽은 의아한 듯 물었다. 

수사는 그렇습니다. 저는 수사관이 아니라서요 특별하게 따로 내려온 지시는 없었습니다.

그래요? 이유가 있습니까? 

그 부분은 부사령관님과 말씀을 나누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협조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귀찮은 일을 마주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연구소로 불리는 시설은 폭발로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정도의 폭발을 일으키려면 적지 않은 양의 폭약이 들어가야 하죠. 폭발 후 부대에 비상이 걸렸고 갑자기 평양에서 박격포나 대공포 공격이나 폭격이 시작된 줄 알고 모두가 긴장했습니다. 사건에 대해서 누군가 입장을 밝히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고의적 테러라면 우리가 했다는 등의 액션이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는 조용합니다. 폭발물 잔해 성분검사는 진행 중에 있습니다. 검사결과가 나오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공단에서 발생한 화재는 서해산업이라고 하는 곳에서 났습니다. 주로 의약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더군요. 시설이 전소되지는 않았습니다. 불이 번지기 전에 경비가 확인해서 옮겨 붙는 것은 막았다고 하더군요. 누군가 새벽에 돌아다니는 것은 확인했는데 용의자가 아직 특정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군인답게 적절하게 상황에 대한 요약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폭파된 시설은 보았는데 한쪽 면에는 웅덩이처럼 파여 물이 고여 있더군요. 근처 반경 1km정도의 유리창이 흔들렸을 테고 주민들도 동요했겠는데요. 정엽이 말했다.

 신고 전화와 함께 사이렌이 울리고 교전이 발생하는 줄 알고 모두가 긴장했죠. 공단 쪽은 사건이 벌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하고. 다행히도 이후에 또 다른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격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괜찮으신가요? 그는 정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함께 있던 김수혁 대위가 다쳤죠.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혹시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하는 데라도 있는지요?

 사실 가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북한 쪽 탈영군인이나 자본주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이정도 일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사령관님의 지시사항으로 상황파악 후 범인 검거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지침이 있었습니다. 폭발물 조사 담담인 심영환은 노트북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주민들한테 나온 말은 없습니까? 몇몇 사람을 좀 만나보고 싶은데요. 미리 얘기도 해 두었고요. 혹시 새로운 단서나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지 해서요. 오히려 그런 곳에서 예상치 못한 단서가 가끔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정엽은 막사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책임자가 아니라서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요청을 하시면 될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정엽은 시후와 함께 막사 밖으로 나왔다. 간이 건물형태의 숙소와 평화유지군 부대의 차량과 정비시설 그리고 간의 의료 및 치료소가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피로한 기색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듯 얼굴은 검붉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다. 정엽은 주위를 둘러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의료 병동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이런 씨팔 놈의 나라가 어디 있어? 우리 애 좀 찾아 달라고 하니까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이 썩을 곳을 다 불을 싸질러 버리고 내래 죽을 것이여. 노인처럼 보이는 긴 머리를 한 사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저었다. 막사의 군인들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 모두 각자의 업무로 돌아가는 듯 했다. 관계자들은 여러 번 같은 일을 겪었는지 상황이 끝나자 무관심했다. 정엽은 막사를 걸어 나오며 그와 부딪혔다. 남자는 곧바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여기를 다 없애 버려야해. 긴 머리칼의 남자는 소달구지에서 커다란 통을 꺼내 사방에 정체 모를 액체를 뿌려대고 있었다. 라이터를 켜자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갑자기 큰 비명과 같은 소리가 들리고 막사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비병이 소화기를 들고 불길이 일은 곳에 뿌려댔다. 노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제압돼 끌려가고 있었다. 김시후는 물끄러미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정엽은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여기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급격한 상황변화에 혼란스럽기도 하겠죠. 쿠데타로 인해 사람이 꾀 많이 행방불명 됐어요. 폭탄이 터져 깔린 사람들을 구조할 수 없어서 사체를 그냥 처리하기도 했고. 잡혀간 사람도 있고 총에 맞아 죽기도 했을 거고. 아니면 공단 근처 사창가나 술집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의 말을 듣자니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정엽은 아직 이곳의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잠깐 저 사람 좀 만날 수 없을까요? 

수사관님께서 굳이 주민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시후는 이곳 주민들을 마주하는 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주민들의 상황에 대한 파악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해두죠. 이곳 상황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조금 전의 흥분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막사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옷차림은 남루했고 헤진 곳을 여러 번 덧댄 듯 했다. 소달구지에 있던 건초와 볏단이 옷에 들러붙어 지저분해 보였다. 철창 앞에는 간이 의자가 있었고 정엽은 들어와 의자에 몸을 걸치듯 앉아서 장발의 남자를 불렀다. 칸막이가 없는 공간이었다. 문을 열어달라고 해 정엽은 안으로 들어가 탁자를 두고 앉았다.   


어르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머리칼이 하얗고 멀리서 봤을 때 노인으로 보였지 가까이서 보니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정엽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 모습이 풍겼다. 풍성한 머리 숯은 백발이었지만 컬이 져 굵었고 희미한 노란색도 띄고 있었다. 또렷한 콧날과 두터운 입술 큰 골격이 도드라졌다. 보는 사람에따라 혼혈인이 아닐까라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뉘긴데? 

공단 화재와 폭발 사건을 조사하러 왔습니다만. 

말투를 보니 남쪽에서 왔구만 기래. 뭐가 궁금하기요. 그는 관심이 없는 듯 가래침을 퉤하고 뱉었다. 

보아하니 여기 여러 번 오신 듯 한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건가요. 여기 관계자 얘기를 들어보니 지난번에는 훈방조치 됐지만 이번에는 안 될 것 같다고 하던데 왜 이곳에 불만을 드러내시죠? 정엽이 그를 자세히 보니 진한 쌍꺼풀도 이국적이었고 피부톤도 좀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말투는 틀림없이 개성사투리였다.

공단이 들어서고 자본주의 물먹은 것들이 들어오더니 세상이 엉망이 된 기라. 군대가 돈을 벌려고 혈안이 돼있고 여자애들은 사창가로 가고 빙두와 아편 그리고 얼음이 돌아다녀. 아무도 그걸 막지 않아. 어디 남조선에서 왔다면 이 상황을 설명해 보시오.

김병철이가 반기를 들 때 내심 기대 했고 만. 그놈도 돈에 환장한 놈 이였으니.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김병철은 개성 5군단 사령관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래 맞다. 그놈이 반란인지 혁명인지 일으키고 인민들을 잘 먹이려 한다는 얘기를 했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닌 기라. 지역 사람들을 동원해서 일 부려먹고 김정은 일파들 막아줬더니만 남조선과 붙어먹는지도 몰라. 공단 홍등가 봤나? 그거이 자본주의 인가? 학교 다니던 애들 돈 벌려고 몸 팔고 약 팔고 술집은 미친놈들 천지가 되 버렸지. 외국 놈들도 여기를 우습게 알아. 딸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해. 노인은 큰 소리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가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고 정엽의 옷을 손으로 잡아 끌어당기자 곧바로 제지를 당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기라. 인민들이 천막에서 살고 있지 않나. 곧 겨울이 되는데  어찌 버터 낼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래 남쪽에서 왔다하니 저들은 언제 여기서 나가나? 이곳의 혼란은 언제 수습될 건가? 말해보라우. 

그것은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혼란이 정리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죠. 개성일대가 독립된 나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아닐지. 어쨌든 조만간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중얼거리며 욕설을 하는 사이 정엽은 조사실 바깥으로 나왔다. 잠깐 동안의 소란이 진정된 후 부대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 일상으로 돌아간 듯 했다.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은 어느새 다시 늘어서 있었다. 하늘은 여지없이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개성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엽과 시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총격을 당했던 지점을 지나가는 길에 정엽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김 대위님 저 사람이 말한 공단 근처의 홍등가는 어딥니까? 

 제가 알고 있기로는 한 6년쯤 된 것 같습니다. 공단이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에 생겼으니까요. 그 자 말이 맞기는 하죠. 뭐 자본주의의 이면 아니겠습니까? 달러 들어오고 돈이 몰리니 소비를 위한 곳이 생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지요. 다들 한탕 해 먹으려 하는 생각일겁니다. 남한 식 룸하고 웬만한 음식점은 다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중국 쪽과 밀수가 많이 이뤄질 겁니다. 최초로 공단이 생긴지 15년이 넘었죠. 평화유지군이 들어온 지도 3년이 됐으니까요. 공권력이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죠. 치안도 마찬가지고요. 평화유지군은 싸움을 막는 거지 전쟁을 끝내지는 못하는 겁니다. 관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겠죠. 집창촌이 백 미터쯤은 되고 술집과 유흥가가 늘어서 있습니다. 개성의 조직이 뒷배를 봐주고 있는 듯 한 데 군부와 당의 세력이 엮여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부대는 지역 일대 치안까지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 그 이상의 여력이 없습니다. 자경단처럼 보이는 놈들도 있더군요. 순찰을 돌면서 큰 문제가 터지지 않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고요. 


 차는 개풍군에서 나와 공단으로 향했다. 10km앞 공단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공단입구 근처에는 아파트와 같은 주거 밀집 시설이 들어서 있었고 일렬로 늘어선 가판과 상가는 오래된 지방의 야시장과 유사했다. 입구는 구식의 아케이드를 닮아 있었다. 주변의 상가와 음식점들 그리고 동남아시아 사람들도 간혹 눈에 들어왔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사회주의 국가의 장마당이 아니었다. 메가로폴리탄 가운데 하나인 중동의 도시 같기도 했고 SF영화의 미래도시 뒷골목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와는 몇 세대 뒤쳐져 있는 듯 한 인상이었다. 시장 초입에 차를 세우고 정엽과 시후는 시장을 둘러보았다. 가판에서 팔고 있는 의류와 생활용품은 중국제품들이 눈에 띄었고 흥정하는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 들었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그리고 정체모를 동남아 말들이 뒤섞어 공간을 채웠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들은 언제부터 여기에 있는 거죠. 정엽이 물었다. 

평양과 분쟁이 벌어지고 재건사업이 시작되면서 건설노동인력들이 상당부분 유입되었죠. 밀입국자도 상당할 테고요. 정식으로 입국절차를 받아서 들어오지 않은 인력들도 있을 겁니다. 사실 이게 문제죠. 

시장 초입에서 벗어나 백여 미터를 더 들어가자 어둑한 골목이 눈에 띄었다. 멀리 공단의 조명이 흐릿하게 띄엄띄엄 드러났다.    


잠시 기다려 보시죠. 시후는 오른쪽의 슬레이트와 컨테이너 가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곳을 가리켰다. 전력난 상황에서도 공단의 전기를 끌어 쓰는지 이곳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다. 줄을 늘어뜨린 전선에는 형형색색의 전구가 매달려 있었고 하트 모양의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곧바로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문 앞에서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저도 김수혁 중위와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 왔죠. 2차 공단이 활성화 되고 외국의 건설 인력들도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일겁니다. 모르긴 해도 이 일대는 북한의 다른 지역보다 10년은 발전했고 소득수준도 높죠. 공단 임금과 이곳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임시 정부와 당 그리고 군부로 흘러들어갈 겁니다.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뒷골목 상권에서는 다툼이 심하죠. 큰 싸움도 빈번합니다. 시후는 담담하게 말했다. 

개성은 이미 중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군요. 마치 싱가폴이나 바티칸 같은 도시국가로 변해버렸네요. 정엽은 창밖을 보면서 대답했다.   

네 그렇죠. 시장으로 나가 보시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빙두 부터 펜타닐, 필로폰, 대마 lsd, 총기류 등 모든 것이 은밀히 거래돼요. 시장과 우범지역을 거닐 다 보면 호객 행위 하는 몇 명이 보일 겁니다. 믿지 못 하실 테지만 상상 이상이죠.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게 행정시스템이 아직 미비해요. 둘은 장마당으로 향했다. 밤이 되자 뭔가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곳저곳에서 흥정하는 소리와 함께 가판에서는 술을 마시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막걸리와 대동강 맥주, 류경 소주 그리고 빈양주병도 보였다.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구한다는 말이 맞는 듯 했다.

잠시 둘러보고 올 테니 한 시간 뒤에 뵙고 같이 개성으로 돌아가시죠.  정엽은 말을 마친 후 차에서 내려 장마당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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