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이 있었다. 선구자로 불리는 사람. 마르크 박사야.
18
정엽이 퇴근 후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부장은 말을 꺼냈다.
나머지 암호 다 풀었다.
부장님 9시가 넘었습니다. 퇴근했어요.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냐.
정엽은 뒤돌아 재빨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부장은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엽은 부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암호 푸는데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풀렸어. 부장은 흥분한 기색이었다.
네? 정엽은 당황스러웠다. 너무 빨리 뭔가 해결된 것같아 오히려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도적으로 쉬운 암호를 활용했어. 누군가 봐 주기를 바란 것처럼 말이지. 아직 다 푼것은 아니다.
누가 만들었고 어떤 내용입니까?
소스코드로 되어 있고 귀밑에 칩을 심어 뇌파의 자극을 읽어 내는 장치에 대한 내용이야. 뇌파의 전기 신호에 자극을 주는 거지. 신경회로를 이식하고. 이 과정에서 신체의 운동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릴 수 있게 된다고 하더구나. 뇌파와 전기신호를 외부에서 주입하고 대상자에게 전달자의 의지를 보낼 수도 있고 말이지.
뭔가 획기적인 내용 같은데요. 말로만 들어서는 말이죠.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그런데자료가 있어도 실행하고 컨트롤 하는 노하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잖아요. 아니 근데 이게 실제로 가능합니까? 무슨 SF영화도 아니고.
중요한 게 한 가지 더 있어. 이때 필요한 약품의 종류와 양, 약물의 조합 및 적절한 투약횟수에 대한 내용이라고 하더라. 이 과정을 컨트롤 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라는 거야.
아니 개성에서 누군가 이런 장치를 실험하고 만들고 있다고요? 말이 되나요?
사실 실제로 연구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해. 우리도 하긴 했지. 부장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극비 사항이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미국에서도 일정 단계까지는 도달한 모양이야. 뉴럴 링크인지 뭔지 하는 민간업체도 서서히 상품성을 보고 진행하고 있는 듯 하고. 그쪽은 시작단계에 불과하지만 말야. 그런데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윤리문제도 있겠지. 반복적인 실험이이뤄지지 못해서 한계에 부딪힌 거고. 이 자료를 만든 사람은 마약 성분인 펜타닐과 다른 생화학 물질을 통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뤄낸 모양이야. 전문가한테 물어보니 그렇게 말해주더구나.
이거 정말 대단하네요.
사실 딱 한사람이 있다. 선구자로 불리는 사람이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자료와 관련된 부분을 연구했던 사람. 마르크 박사라고. 개성공단으로 들어가 일하다가 실종된 사람.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그 사람이 유력해. 이런 장치를 고안하고 실험한 사람은.
많은 비난이 따랐을 것 같은데요.
자기 아버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고 일부분 성공을한 듯해. 그 소문이 나니까 여기저기서 그에게 식물인간이나 의식이 없는 환자를 둔 사람들이 의뢰를 했고. 그러다가 잘못돼서 학계에서 추방되고 연구를 접었을 거야. 한국으로 들어온 이유는 누군가가 그를 필요로 했을 테지. 그때 개성에서 연구와 실험이 진행되었겠지. 박사는 자신의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방향을 찾은 것일지도 몰라.
마르크 박사가 국내로 왔을 테고 그렇다면 국내에서먼저 실험이 진행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국내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을텐데요.
국내에서는 드러날 수 없게 비밀스럽게 작업을 해야하는데 대중에게 알려지면 시끄러울 테니. 보는 눈이 있어서 어떻게든 알려질 수밖에 없어. 박사가 연구와 실험을 진행했다면 개성 쪽 일거야. 월경기록이 남이 있을 테니 찾아봐. 어디서 근무했는지.
가명으로 갔을 수도 있죠. 그거야 어려운 것이 아니니
참, 너 그놈이 의심스럽다며 지금 서울지방경찰청에 있는 놈 말야. 네가 개성에서 들은 붉은 눈 얘기를 하니 관심을 보였다고?
네 그렇죠.
그놈이 대충 얘기를 했고 말문이 트였단 말이지. 만약 그놈이 네가 말한 붉은 눈이 맞다면 시위에는 굳이 왜 나타 난거야? 잡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저놈 국정원으로 넘어가면 우리가 정보를 더 캐내기 어려워. 조사해서 가져올 수 있는 게 있다면 확인해 놓으라 했는데. 했어?
네 말씀하신 부분은 이미 처리했어요.
암호의 내용이 맞다면 그놈의 몸에도 뭔가 있을 거고. 그 운동능력의 비밀이 뭔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 공단에서 벌어진 일도 알수 있게 되겠지.
일단 지원팀에 얘기해서 몇 명의 자료를 좀 추렸습니다. 김병철 사령관이 개성을 점령한 뒤 탈영해 귀화한 민경부대원 하고 노동자 몇 명을 조사해 정보를 모을 생각입니다. 서해산업과 관련된 인물도 있더군요.
그래? 부지런히 움직여라.
네 필요한 정보를 파악해 다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관계자들을 좀 만나본 뒤에 마지막으로 그놈을 심문해 볼 생각입니다.
북한 휴전선 민경부대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김순식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정엽은 지원팀에 요청해 귀순한 사람들과 공단관련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중김순식은 5년 전 민경부대를 탈출해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북한의 지긋지긋한 폭행과 굶주림에 지쳐 한밤중에 몰래 gop 남한 초소를 두드려 귀순의사를 밝혀 군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국정원 조사도 험했다고 말을 꺼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국수본에서 찾아오셨네요.
김순식이 말을 꺼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170이 되지 않는 작은 체구였는데 몸에는 살집이 좀 붙어 있었다. 긴 콧날과 각진 턱선이 작은 체격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는 노원의 한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의정부의 한 주물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그의 말투에서 북한 억양이 살짝 느껴졌다.
아, 북조선 일이라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 생지옥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그곳에서 머리박고 있었을 테지요. 그는 그곳 상황을 상상하는 듯 했다.
민경부대는 그래도 탈북을 걱정해 후방보다는 사람들을 좀 더 자유롭게 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뭐,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도 먹을 게 없으니 마을 대민지원과 공사에 이것저것 산나물 캐는 일투성이지요.
뭐가 궁금해서 절 만나러 오신건지요? 본론만 말하시지요. 저도 여기에 이제 적응해서 그쪽일은 이제 아득 합니다.
혹시 붉은 눈이라고 아십니까?
붉은 눈이요? 저는 처음 듣는데 뭘 말씀 하시는 건지요?
얼마 전 개성공단 한 업체의 폭발사고가 있었습니다제가 조사를 하는 중에 붉은 눈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주민들한테는 그렇게 통한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제가 넘어온 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전방 초소 근무가 끝나면 부대로 복귀하는데 그때도 주민들한테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라면 장마당에서 얘기가 많이 돌죠.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북쪽 얘기라면 더 하고 싶지 않은 듯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 했다.
장마당은 어떻습니까? 혹시 마약은.
아 빙두하고 대마 얼음, 아편 등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죠. 공단이 커지고 오히려 암암리에 양이 늘어난 것 같더군요. 시기가 그럽디다. 가격도 좀 더 내려갔고. 거기 홍등가에 가보면 은밀하게 거래가 이뤄집니다.
그래요? 정엽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엽은 명함을 주며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얘기를 해 달라고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커피숍을 나가 지하철역 쪽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탈북자 몇 명을 더 만나봤지만 정엽이 생각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전략을 바꿔 가장 최근에 탈북한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인원수가 너무 적었다. 중국 국경근처에서 탈북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개성에서의 탈북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엽은 일단 포기하고 다른 쪽을 접촉하려 하고 있었다. 서해산업과 거래를 하고 있는 업체에 대한 조사부터 진행했다. 개성에 다시 들어가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정보를 입수할 필요가 있었다. 정엽은 김수필이 사장이 된 후 업체들과의 거래내역과 세무관련 자료들을 분석했다. 그 중 그의 눈길을 끄는 몇몇의 업체들이 있었다. 몇 년 사이에 두세 배씩 매출이 증가하고 있는 업체를 눈 여겨 보았고 특수 거래인도 살펴보았다. 특이한 점은 제약업체와 함께 인력파견업체 모두에서 꾸준히 거래가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수필은 직접고용을 한다고 했고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직원을 모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엽은 업체에 대한 조사를 수사관에게 부탁했다. 며칠 후 수사관들은 정엽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이 수사관님 APA는 특이한 업체에요. 개성공단에 파견된 직원들 모두 여기를 통해서 계약이 진행됐어요. 회사의 지분조사를 해 봤는데 수익이 상당하던데요. 파견회사치고는 매출도 그렇고 수익도 많아요. 5명 정도가 대다수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알려진 사람은 없어요. 정엽이 최초월경했을 때 받은 자료에 비해 숨겨진 거래처와 함께 매출액은 더 늘어 있었다.
그래요? 그럼 그 지분이 누구와 관련이 있는지 좀 조사해 주세요. 차명일수도 있으니까. 저렇게 작은 규모의 회사의 매출 규모가 이 정도라는 것은 뭔가 잘 맞지 않아요. 김수필이 어떻게 사장에 선임됐는지 그 부분도요. 그 외에 이상한 점 있으면 그것도 확인해 주시고요.
아 그리고 혹시 한국 이름 김기현이라고 하는 마르크 박사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주세요.
마르크박사요? 부장님이 이미 자료 요청하셔서 드렸는데요?
네? 부장님이요? 그렇군요. 다른 일도 많다고 하던데 개성 일은 큰 관심 없다더니 의외였다. ‘조사를 맡겼으면 미리 얘기를 하지 잊으셨나’ 정엽은 조사팀에게서 넘겨 받은 김수필과 관련된자료를 팔짱을 끼고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정엽의표정을 본 조사관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지시를 내려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탈북한 전 민경대대 김순식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수사관님. 김순식입니다. 순간 정엽은 김순식이 누군지 한참을 떠올렸다.
아. 김순식씨. 네. 잘 지내시죠?
네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죠. 하하. 그는 멋쩍게 웃었다
이수사관님한테 알려드릴 것이 하나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뭐 저를 찾아오셨으니 정보를 하나 드려야겠죠. 저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과학자의 말투 같았다.
제가 정말 열심히 찾았어요. 모임에서 수사관님이 찾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때 수사관님이 붉은 눈이라고 해서 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죠. 저도 궁금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흥미진진한 사건이더군요.
어떤일인지 기대가 큽니다. 정엽이 기대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연락처를 알려드릴 테니 한번 전화해 보세요.
신재호는 넓은 챙이 있는 검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그의 첫인상은 뭔가에 좇기는 듯 불안해 보였고 깡마른 체형이었지만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절도가 있는 모습이었다. 군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행동과 습관이 몸에 베어있는 듯 했다. 그와는 청량리에서 신설동 근처로 가는 길목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장소를 예약하고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자유롭고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나을 듯 했기 때문이다. 청량리 역에서 신설동 쪽 내리막길로 내려가자 주택가가 나왔다. 신재호는 그곳 근처의 한 빌라에 살고 있었다. 빌라 근처 hk라는 작은 스터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대로변에서 이면도로로 한 블럭 들어가자 치킨집과 작은 식당 그리고 김밥전문점과 상가들이 위치한 골목이 있었다. 스터디 카페는 그곳 2층이었다. 정엽은 계단을 올라 출입문을 열었다. 예약을 했다고 하자 연보라 빛 염색을 한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이는 20대의 여자가 정엽을 맞이했다. 그녀는 H실로 안내해 주었다. 정엽은 음료를 컵에 담아 방으로 향했다. 그는 좀 긴장한 듯 한 모습이었다.
반갑습니다. 국수본의 이정엽이라고 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엽을 보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주변을 살폈다.
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얘기를 하는 게 불편할 듯해서 이쪽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네. 그는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디선가 저를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니 조심하게 됩니다.
여기는 괜찮습니다. 어디서 오셨는지 잠시 얘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붉은 눈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붉은 눈은 김병철의 특작부대 같은 겁니다. 저는 24사단의 소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개성의 군 체계는 김병철 사령관이 부임해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붉은 눈으로 불리는 대 여섯 명이 부대에 들어와서 김병철의 호위업무와 그가 지시하는 비밀스러운 일들을 처리하더군요. 북한의 군은 지휘관과 함께 정치장교와 보위장교가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합니다. 저는 김병철 사령관 부관의 밑에서 명령을 수행하는 일을 했죠. 몇 년 전 붉은 눈으로 불리는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 부대로 들이닥쳐 한바탕 소동이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사령관을 만난 것 인지. 부관은 저들에게 근처에서 김병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더군요. 기존의 지휘 체계와 별개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요? 정엽은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국지전이 종종 발생한 것은 아실 테고. 잠잠해지면 저희는 대민지원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다들 체격이 좋았죠. 북한에서 그런 몸은 보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영양상태나 움직임도 일반인들과는 달라보였습니다. 대민지원을 나가서도 눈에 띄었죠. 갑자기 눈이 붉게 변하기도 하고. 그들의 운동능력을 보았던 주민들이 그들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아. 인원은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열 명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대장격인 한명의 이름이 강석철인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강석철이라. 정엽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일반인들과는 뭐가 달랐습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북한군인들은 좀 대충대충 합니다. 아무래도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체력도 딸립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것이 없어요. 근육의 피로도가 일반인들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듯했고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그날 담 벽을 수리하는 날이었어요. 축대가 무너져 두 명이 돌담에 깔렸습니다. 그대로 두면 곧 죽을 것 같더라고요. 돌담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틈이 좁아 사람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죠. 세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었던 겁니다. 장비라도 불러서 공간을 부셔야 바위를 옮길 수 있었을 겁니다. 시간은 없고 눌린 사람들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어요.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 강석철하고 그 일행이 들어오더니 그 무거운 돌을 밀어서 옮기더군요. 다들 보고서도 믿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 그들의 눈은 붉은 색을 띄었어요. 그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그 사람이 목숨을 건졌죠. 그 일이 사람들한테 퍼졌을 겁니다. 그는 북한 억양이 남아 있는 말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엽은 세 명이 몇 톤이나 되는 바위를 옮겼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 비슷한 일들은 꾀 많았죠.
혹시 붉은 눈이라고 불리는 강석철은 북한군에서 그런 능력을 얻었을까요? 정엽은 그들이 어떻게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추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정보가 있는지를 물었다.
군부대가 이들을 따로 양성하거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공화국 쪽은 그럴 여력도 기술도 없어요. 만약 24사단에서 그들이 근무했다면 제가 모르지 않았겠죠. 부대정보를 담당했으니까. 평양쪽에서 특수한 훈련을 받았을 수도 있을 거라고 보는데 그것도 잘 맞지 않아요. 그럼 왜 그들밖에 없을까요? 북한군에서 저들의 능력치와 비슷한 사람을 본적도 없어요
극비사항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가령 김병철 사령관과 몇 명만 알고 있는 뭐 그런. 그것도 생각을 해 봤는데 저런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24사단에서도 인원이 더 많아야죠. 저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김병철의 특작부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앞뒤가 안 맞죠.
네. 그렇겠군요.
한 가지 얼핏 들은 얘기가 있기는 합니다. 이들이 공단 어디에서 탈출해 왔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비밀실험을 했다던가.
공단이요? 이들이 왜 공단에 있어요? 생산직 같은 경우는 성분심사 거치고 하는 여자들이 주로 업체에서 근무하지 않았나요?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2차 공단이 조성될 때는 규정이 느슨해 졌고 김병철이 실질적으로 개성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는 공단 노동자 건설노동자들이 뒤섞였죠.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그의 말대로. 그래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몰려왔습니다.
그래도 공단에서 그런 실험을 통해 그런 능력을 갖추게 될 수는 없을 텐데 딱히 그런 게 있는것도....
아.. ...
정엽은 순간 서해산업의 연구동을 떠올렸다. 그가 읽은 국정원과 국수본이 자료에서 보았던 내용이었다. 남북 합작의 생산량 증대 연구시설. 그 연구소가 낯설지 않았다.
사실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2차로 공단이 확대되기 시작하고 장마당이 좀 커졌습니다. 1차 공단 시설에서 나온 생산품들이 장마당에 많이 돌아다녔고 약들이 늘어난 것도 그때입니다.
시장에 풀린 마약이죠?
네 그렇죠.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중독자도 늘어났고요. 당에서 백도라지 사업이라 불리는 것을 해서 외화부족을 그걸로 때운 건데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경각심이 많이 느슨해졌어요. 약을 하는 사람도 엄청 늘었고요. 김병철의 부관은 그들에게 뭔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 같은데 주기적으로 어디를 다녀오는 것 같더군요. 한동안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가요? 으음.. 정엽은 서해산업에서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를 알려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정엽은 신재호와 얘기를 마치고 청량리역 방향으로 걷는 중이었다. 서해산업의 김수필이 공단에서 뭔가를 진행했다면 규모를 볼 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에겐 뒷배가 있고 연구소는 단순하게 자료에서 보았던 것처럼 단순하게 농업생산량을 위한 연구시설은 아니다. 붉은 눈과 관련된 모종의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을까? 의료용품 생산시설에서 추가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쪽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대부분이 남한의 제약업체의 oem일테고 생산량과 거래량은 급속하게 늘었다. 그 즈음 의료보험 민영화와 진통제 처방규정이 완화되었고 많은 수익이 났을 것이다. 일부는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럼 대체 무엇일까? 무엇을 더 만들어 냈다는 것일까. 정엽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사이 전화가 걸려왔다.
이 수사관님 부탁하신 내용 자료 찾아서 살펴봤는데 흥미로운 구석이 몇 개 있어요. 언제 사무실로 들어오시나요?
아, 뭔데요?
와서 말씀드릴게요. 전화로는 설명이 힘들어요. 그럼 자료는 제가 들어가서 볼 테니 책상에 올려두고 가세요. 내일 회의시간에 얘기합시다.
김수필, 서해산업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정엽은 그 생각을 하며 청량리역쪽으로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