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국수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너에겐 집 같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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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산업은 설비가 갖춰지고 본격적인 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실험가동 상황에서 북한의 근로자들 수 십 여명이 매뉴얼대로 약품 생산을 진행했다. 또 다른 생산설비에서 생산한 제품들은 다음 주에 나올 것이다. 순차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나게 된다. 마르크가 공단에 오기 전 김수필은 이미 공장 가동과 관련된 업무를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마르크가 특별히 관여할 것은 없었다. 다만 마르크는 아직도 의구심이 있었다. 생산규모로 볼 때 마약으로 활용될 수 있는 많은 제품들의 수요처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대체 어떤 이유로 공단에서 이렇게 많은 마약성 약물을 생산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설비는 지속적으로 확장이 가능하도록 해 놓았다. 김수필에게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마르크가 계획한 실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마르크는 김수필과 종종 만나 생산라인 가동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의논했다. 지하 실험시설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는 왠지 모를 흥분과 연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상기된 상태였다. 김수필은 6개월 이후에 실험체가 준비 된다고 했고 동물실험으로 점검을 해 놓으라 권유했다. 물론 실험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마르크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마르크는 굳이 동물실험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말을 해 놓겠다고 했다. 연구동의 실험 생산이 끝나고 시제품이 생산라인에서 나오기 시작한 날이었다. 생산된 물품은 실험 동으로 옮겨져 창고에 물량이 저장되기 시작했다. 의료용품과 패치 그리고 여러 신경 진통제와 관련된 의약품이 주를 이뤘다. 생산물품과 자재 관리는 김수필과 회계팀 직원이 맡아서 처리를 하고 있었고 생산된 물량은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매주 한번 생산된 의료 제품들이 월경을 통해 남쪽 판매처로 실려 갔다. 공단내 다른 업체들의 제품들도 하나씩 늘어갔고 공단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도로포장과 관련된 기본적인 외부환경도 갖춰지고 있었다.
생산품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 일부 제품들은 개성시내로 들어갔다. 공단 생산품의 품질이 나쁘지 않은지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북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계약상으로 일부 제품들은 북한에 배급용으로 전달하거나 그 중 일부가 소량 시장에 풀리기도 했다. 장마당에서는 남한 상표가 붙지 않은 여러 생활용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르크는 동물실험 부터 진행했다. 처음부터 실험을 재설계하고 아버지의 사례와 자신이 맡은 환자는 뇌 스캔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의식 스캔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세분화된 데이터와 정교한 실험설계가 필요했다. 이제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다.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의식의 전이 기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펜타닐 계열 약물의 다양한 조합이 필수였다. 약물의 성분에 따른 의식 통제의 정도와 지속시간, 부작용 등에 대한 정리도필요했다. 마르크는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신체의 운동능력이 한계에 달하는 순간 눈의 혈관이 터지고 붉어질 수 있다는 것. 다만 이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하면 근육이 파열되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근육이 녹는 증상인 횡문근융해증과 비슷했다.
'붉은 눈'은 의도하지 않은 실험의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마르크는 또 하나의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실현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개성을 이상적 사회주의 모델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를 고민해 본 것이다. 정치적인 변화도 동반해야 한다. 물론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벌어질 수 있다.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에 시장경제가 도입될 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그 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으려면무엇이 필요할지를 고민했다. 이상적 사회, 그의 아버지가 마르크에게 들려주었던 말이었다. 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개성에 악재가 터졌다. 김병철에 의해 월경이 봉쇄됐고 생산된 물품은 창고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세력과의 교전이 심해지자 김병철은 공단을 인질로 삼았다.
남한과의 관계를 고려해서인지 국지전은 소강상태로 들어섰다. 김수필은 개성에 발이 묶였다. 이 상태가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거래처도 걱정이었고 생산라인은 멈춰 손해가 막심했다. 물론 모든 것이 그의 수익은 아니지만 상황이 길어질수록 적자는 늘어날 것이다. 공단관리 위원회와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아봐도 그들도 답변을 들을수 없었다. 지난달 몇 번씩 이뤄지던 공습경보와 대공포는 잠잠해 진 것 같았다. 남한정부와 개성 5군단 김병철의 사령관의 판문점 물밑접촉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정도가 지나자 왕래가 다시 시작되었다김수필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생산을 재개하려 하고 있었다. 공단에 갇힌 상태에서 마르크박사와 김수필은 당연히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마르크 박사는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김수필이 가끔 사적인 이야기를 묻곤 하면 마지못해 답하기도 했다. 마르크는 김수필에 대해 딱히 호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는 남는 시간 동물실험을 재개했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오류를 조금씩 개선해 나갔다. 특히 영장류를 실험대상으로 할 때 약의 배합에 따라 갑작스레 이상행동을 보인다거나 근력이 개선되는 과정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사람에게 이 부분은 어떻게 적용될지를 예상해 보았다. 일단 동물실험과 관련된 데이터를 정리했고 자료는 김전호실장이 요구한대로 전송을 진행했다. 김전호는 실험에 따른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했다. 그가 강조한 충분한 임상실험이 가능할것이라는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마르크는 이 상황에 대해 김수필과 한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마르크는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판문점에서의 회담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업무와 관련된 모든 인원들은 침묵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이 조금 지나 공단출입이 재기됐다는 소식이들렸고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전선일대는 큰 변화는 없고 개성 공화국 정부는 남북 간 협력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대변인발 방송을 했다. 그날 밤 김수필은 자신의 숙소에서 오랜 만에 긴장을 풀고 술을 마셨다. 자리가 무르익자 마르크도 그 자리에 참여했다. 마르크는 뉴욕지부에서 안보실 직원을 만난 후 한잔도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분위기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말았다. 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둘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한 두 명씩 직원들이 숙소로 들어가고 장소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마르크 박사님? 오늘은 박사님께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이제는 한 팀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네? 마르크도 약간은 취기가 돌았는지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했다.
술을 근 몇 년간 마시지 않았는데 역시 술은 좋군요. 마르크는 살짝 긴장이 풀려 있었다.
박사님 취하니 미국발음과 억양이 나오네요. 모국어의 힘은 대단합니다. 마지막으로 한잔하시고 저를 따라 연구동으로 내려오시지요. 걱정했던 모든 것들이 해결돼서 당분간은 스트레스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요. 김수필은 그렇게 말하고 남은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박사님께서 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둘은 그렇게 비틀거리며 연구동 쪽으로 걸어갔다.
박사님의 연구시설은 지하 1, 2층입니다. 지하 1층에는 동물실험용 샘플과 약품 자재들이 있죠. 이 건물의 설계에 참여한 것은 저입니다. 저는 지하 한 층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했죠. 엄격한 출입보안 통제시설과 함께. 대외적으로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 층입니다. 저와 박사님 그리고 한명이 더 알고 있죠.
흠 그렇습니까? 뭣 때문인지 좀 알고 싶은데요. 마르크는 뭔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박사님도 대충은 알고 계지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계실 리는 없을 테고. 굳이 그렇게 모르는 척 안하셔도 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김수필은 마르크를 지하 연구시설로 안내했다. 이곳은 마르크도 몇 번 와 본 곳이다. 지하 출입문 입구로 들어와서 그들은 두 번째 방 좌측 벽면으로 들어갔다.
여기 출입문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기묘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마치 단테의 희곡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그림 같았다. 김수필이 그림을 옆으로 밀어내자 보안장치가 달린 문이 나왔다.
현재 출입이 가능한 사람은 저와 박사님 그리고 부사장 김동문 이렇게 셋입니다. 동문은 아실 테고. 그럼 들어가시지요. 김수필은 손바닥을 인식시키고 비밀번호를 쳤다.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물밑 듯이 들이 닥쳤다.
아무래도 지하실이라 습기가 많기에 특별하게 신경 썼습니다. 습도조절을 통해 실내를 쾌적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죠. 박사님은 다음 주부터 펜타닐 제조에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네? 뭐요? 마르크는 당황한 듯 물었다.
실험용으로 쓸 것을 어디서 구하실겁니까? 샘플은 이제 바닥이 났는데. 원료는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넉넉하게 만들어 일부는 실험용으로 활용하시고 일부는 남겨 놓으시면 됩니다. 남겨놓은 물량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겁니다. 마르크는 김수필이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실험용으로 쓰이는 것은 일부분 일 테고 원료의 양을 보니 상당한데 그 많은 물량을 어디에 쓸 겁니까?
박사님, 계약서를 완성하실 때 이곳의 모든 일은 극비에 해당한다고 확인하셨을 겁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의료용품들은 남한 제약회사의 원료와 일부 병원에 납품되는 것이지요. 그 정도로만 알고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네요. 김수필은 갑작스레 정색하는 모습으로 마르크를 보았다. 박사님께서는 제조와 더불어 앞으로 하시게 될 실험에 신경 쓰시면 될 겁니다.
음…..
마르크는 김수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뭔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탐욕스런 눈빛을 날카롭게 벼르고 있는 듯 했다. 한편으로 그는 이곳이 김수필의 욕망이 투영된 그만의 왕국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와 가까워지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피곤해서 쉬겠다는 말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어쨌든 통행문제가 해결됐으니 바빠질 것 이라고 생각하고 샤워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눕자 지금까지의 여러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김전호 실장과 계약서를 쓸 당시에도 개성에서의 일은 일급기밀 국가 프로젝트인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우울증 관련 약품과 함께 통증감소를 위한 진통제인 오피오이드 계열은 투약 량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펜타닐이다. 이 약은 적은 양으로도 너무나 많은 중독자를 양산한다. 남한에 이미 약물문제가 심각한데 이들은 이것을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김경섭 교수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저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 김경섭 교수가 차렸던 연구소는 결국 화재로 전소되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충격이었고 안타까웠다. 김경섭 교수는 한계에 부딪힌 자신의 연구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알려주지는 못했다. 저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려주겠다는 말은 어떤 뜻이었을까? 혹시 군과 관련된 모종의 연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연구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김전호는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더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은 없었다. 취기에 마르크는 곧바로 잠으로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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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잘 봤습니다. 정엽은 새벽에 출근해 조사관들이 찾아 놓은 자료를 살펴보았다. 서해산업의 거래는 몇몇 업체에 집중 돼 있었다.
이들 업체에서 이상한 점은 발견했나요? 직원들이 출근 한 뒤 정엽은 회의를 소집해 조사한 내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수사관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설마 밤을 샌 것은 아니죠? 워낙에 도깨비 같은 분이라. 30대 초반의 여성 조사관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세무조사한 부분과 거래 업체들을 살펴봤는데 서류상으로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매출이 늘어난 것은 수요에 따른 공급 확대가 이뤄진 거죠. 의약품 제약원료가 될 만한 원자재 수입과 그에 따른 제품 출하량이죠. 원료는 아무래도 단가 차이가 있을 테고 경쟁력도 있다면 당연하고요. 기업의 입장에서는다만 특이한 것은 두 건입니다. 조사관은 정엽에게 두 업체의 내용을 따로 전해 줬다.
APA인력 파견업체 그리고 최진형이라고 하는 인물과의 거래가 의심스러워요. 최진형은 시흥에 새로 설립된 제약회사의 대표인데 이 사람은 김포 시골에 사는 70대 할아버지에요. 지분이 제일 많아요. 기록을 찾아봐도 기업을 하거나 한 흔적은 없고 그냥 농사만 지은 사람이에요. 명의만 빌려준 바지사장 느낌이죠. 김수필의 사장 선임은 이 사람의 의지가 작용했다고 보는게 맞는데잠시 서류를 들추며 조사관은 말을 계속했다.
APA 인력파견업체는 아무래도 유령회사 같아요. 차명을 이용해서 자금세탁을 주로 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어요. 확인을 해 봐야겠고. 저기로 흘러 들어간 자금을 찾으면 분명해 지겠죠. 현금의 일부가 여러 곳을 거쳐 서해산업의 한 직원 명의 계좌로 흘러간 것은 포착했어요. 신상기록을 보니 말단직원이 대담한 일을 벌일 수는 없을 테고 누가 개입되었다면 권한이 있거나 아니면 차명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겠죠. 그 사람은 이렇게 조사를 진행할 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고전적인 자금세탁 방법입니다.
그렇군요. 고생했어요. 저 둘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해 주세요. 정엽은 회의실을 나왔다.
서해산업에서 저렇게 차명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다. 지분을 가진 사람을 이권으로 포섭했거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겠지. 정엽은 그렇게 생각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이냐 김수필’ 정엽은 조금씩 서해산업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엽은 오후에 경찰서로 향했다. 붉은 눈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네. 이첩이요? 아니 왜요? 갑작스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엽은 당황해서 말을 꺼냈다.
아직 구치소 까지 넘어가기에는 며칠 더 남았는데요조사를 끝내신 겁니까? 정엽은 서둘러 경찰서로 향했다. 지난번 만났던 담당자를 보자마자 정엽이 목소리를 높이자 몸집이 다부져 보이는 반장은 그를 조사실로 안내했다.
잠시 앉으세요. 옆에 앉은 반장은 차를 한잔 내어 주었다.
정엽도 경찰에 있을 때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정치적 사건이었었는데 누군가로부터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피의자를 조사하던 정엽은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순간이었지만 다 잡은 고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어디로 보낸 겁니까? 정엽은 여러 번 물었다.
잠시 진정하시고. 얘기를 좀 들어주십시요. 형사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놈이 입을 열었다는 것이 알려졌어요. 얼마 전에 의식을 잃고 폭력적 성향을 나타내더군요. 아예 다른 사람처럼 굴고 짐승처럼 고함과 소리를 질렀죠. 유치장에서 난동을 부려 진정을 시키려 들어갔는데 다들 당했죠. 당체 당해 낼 수가 없으니 의료진과 몇 사람이 더 달라붙어 간신히 진정제를 투여했습니다. 이후 검사를 하더니 이상한 소리를 합디다. 머리에 이물질이 있다고 하던가? 칩 같은 것이라고 하네요. 이후 승합차가 오더니 그놈을 데려가더군요. 팀장님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젓고 검지 손가락을 세워 위쪽을 가리켰습니다. 정엽은 형사의 의중을 알아 차렸다.
일단 팀장님부터 만나보세요. 하나라도 더 알고 있는 게 있겠죠. 형사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사무실로 들어가 팀장을 찾았다. 팀장은 보고서를 작성하는지 분주한 모양새였다. 그도 뭔가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다.
국수본의 이정엽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시겠다 했죠. 그는 곤란하게 됐다는 표정으로 정엽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이송하라는 얘기가 나와서 그것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과장님이나 서장님 만나도 비슷하게 얘기하실 겁니다.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수사관님도 윗선에 물어보세요. 뭐라고 얘기해 주겠죠. 그놈이 그래도 뭔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 판단해 이첩을 요구했을 겁니다.
정엽도 대충은 상황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팀장을 닦달해봐야 나올 것은 없다. 그도 조직의 명령에 따르는 것일 뿐. 이미 1과가 움직였을 수도 있다. 개성으로 다시 가기 전 붉은 눈에 대한 정보와 공단에서 있었던 일을 더 알아봐야 한다. 수 년 만에 벌어진 대규모 집회 그리고 폭력사건의 열쇄가 될 핵심 인물이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피의자를 이첩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가치가 있고. 뭔가 입을 막아야 할 게 있는 것이다. 사태를 파악해 보기 위해 경찰서를 나와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사무실로 전화를 하자 외근을 나갔다고 했다. 부장도 일을 알고 있을까? 경찰과 다르게 국수본은 사건에 대한 정보수집과 인지수사에 포괄적 권한을 갖는다. 정엽을 비롯한 수사관 하나가 이미 국가기관인 셈이다. 사건의 이첩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용의자를 순식간에 빼 갔다는 것은 이들을 전부 움직일 수도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부장에게 일단 문자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사실관계를 확인해 봐야 한다. 중요한 용의자다.
사건과 관련해 누군가 움직인 것은 분명하다. 수원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향했다. 개성에 가기전 꼭 만나야 한다고 했다. 정보가 있는 것인가. 시내 곳곳에는 경찰 특공대가 눈에 띄었다. 서울광장에서는 발생한 총기사고와 폭동 이주민 노동자들의 소요 등이 번갈아 일어나며 긴장이 고조돼 있는 상태였다. 대로변과 역 근처 여기저기 경비경찰들이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불심검문과 마약단속을 둘러싼 실랑이도 벌어졌다. 늦은 밤이 되면 이면도로 뒷골목은 약에 중독된 이들이 휘청거리며 길을 배회하는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체감됐다. 이주민 범죄율이 증가하자 이민청으로 불만과 민원이 폭주했지만 총통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힘으로 불만을 누르고 있었다. 위태로웠다. 종로3가 뒷골목 한적한 오래된 식당이 약속장소였다. 장소로 가는 도중 수상한 몇 명이 정엽에게 은밀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들을 검거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장소는 1990년대 스타일의 레트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오래된 장소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잠시 후 수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검정색 가죽 자켓과 청바지 차림이었다. 수원은 나이가 들자 선 굵은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정엽은 김주영 선배를 보는 듯 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그냥 형사라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구나. 정엽이 수원에게 장난처럼 말을 꺼냈다.
왜? 형사는 뭐 다 이렇게 입나 형사의 옷이 따로 있어?
아 됐다. 가죽자켓에 운동화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나타나 앉아 있으니 그렇지. 좀 변화를 줘.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왜 이런 퀴퀴한 대로 불렀어?
아, 이 사람이 진짜. 퀴퀴하다니 여기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저녁 먹은 집이야. 아버지 기일이 멀지 않아서 그냥 같이 오고 싶었어. 형을 만난 것도 아버지와 관련이 있으니. 정엽은 웃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래됐지. 여기 그래도 맛은 괜찮아. 아 참. 그리고 연희누나도 불렀어. 정엽은 놀란 표정으로 수원을 바라봤다.
야,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꼭 만나야 한다는 이유가 그거였어? 잠시 후 문을 열고 연희가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네 그래. 이게 얼마만이야. 수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희가 자리에 앉았다.
연희는 숄더백을 메고 해링본 무늬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엷은 펌을 해 한층 어려 보였다. 정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막걸리를 마셨다. 둘이 만난 것은 거의 3주전이었다.
자 다들 한잔씩 하자. 연희가 잔에 술을 따라 주었고 그녀는 뭔가 좋은 일이 있었는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하지만 뭔가 어색한 모습을 숨길 수는 없었다. 연희가 저렇게 과장된 모습을 보이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녀의 술잔을 채워주며 정엽은 건조하게 말했다.
오랜만이네. 정엽이 연희를 보며 말했다.
그게 연인한테 할 소리냐? 돼먹지 못한 놈. 연희가 차갑게 쏘아 붙였다.
와 연희 누나 오늘 스타일 좋은데. 진짜 한 10년은 젊어 보여. 텔레비전 리포트 보다 실물이 낮다니까.
너는 참 분위기 파악 못하고 어리긴 뭐가 어려. 벌써 삼십대 후반이 다가오는데.
아참, 좌천됐다더니 잘 해결됐나보네.
이게 진짜. 아주 그냥 이젠 막 맞먹으려 드네. 아직 안 짤렸다 됐냐?
에이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걱정 되서 하는 소리지 뭐. 너무 그러지마.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정엽은 천천히 음식을 먹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 다시 개성으로 들어갈 거야. 이번에는 끝을 봐야지.
그렇겠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미련을 남기지 말고 찾아볼 것 다 찾아봐. 수원은 예상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제 뜸들이지 말고 다 털어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수원이 말했다.
내가 여기서 더 얘기하면 기밀누설이야. 저기 연희도 있어. 이번에도 연희가 또 특종으로 이거 터뜨리면 나인지 다 알거란 말이지.
야, 내가 언제 너라고 한 적 있어? 취재원 보호는 내 생명과도 같아. 걱정할까봐 일부러 얘기 안했다는 둥 핑계 같은 거대지 마. 연희가 쏘아 붙였다.
그렇게 이해해 줘. 사실 나도 갑작스레 이뤄진 거라서. 그리고 너는 취재원 보호라고 하지만 누군지 다들 짐작을 해서 문제야. 정엽은 팔짱을 끼고 연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형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나? 내가 준 첩보가 몇 개인데 그걸로 인지수사 해서 실적올린 것 모를 줄 알아. 일로서 묻는 게 아니라 형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해줘. 수원이 말했다.
정보가 있으면 나도 수사가 더 쉬울 거란 말이야. 형도 아버지 죽음에 빚이 있다고 했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은 개성이었어. 다 관련이 있을 거야. 김판수 죽은 것 형도 이미 알고 있는 거지? 그쪽으로 모든 정보는 모일 테니까. 정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에 있었던 대규모 폭력집회 기억나? 거기서 검은 옷 입은 사람 몇 명 봤지? 순식간에 움직여서 진압경찰 수 십 명을 휩쓸어 버린 사람. 영상 빨리 돌린 거다 뭐다. 말 많았잖아. 둘 다 봤을 거 아냐. 물론 바로 검열돼서 삭제 됐지만. 그 사람을 국수본에서 조사했어. 갑작스레 눈이 붉어지고 사람이 전혀 달라져. 극강의 운동능력과 반사 신경을 갖게 되는 것 같고.
뭐? 그냥 사라진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어? 수원이 물었다.
그의 몸에서 이상한 게 나왔는데 귀 밑에 칩이 있었어. 확인해보니 생체신호와 의식을 스캔할 수 있는 장치였고. 그 분야의 귄위자는 마르크 박사야. 2차 개성공단의 시작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왔고 개성에서 근무했어. 지금은 실종상태야. 오래전 CIA에서 하던 MK울트라 프로젝트라는 게 있었어. 냉전의 산물이기도 하고. 미국 놈들이 생체 실험을 자국민들한테 많이 했잖아. 걔들 음모론도 많고. 그런 유사한 프로젝트였는데 당시는 기술 발전이 안됐으니 그 실험은 그냥 최면 같은 정도였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달라. 뇌의 전기신호를 스캔하고 칩을 이식하는 것도 가능해. 여기에 필요한 조건을 마르크 박사는 알아낸 것 같아. 펜타닐과 여러 약을 섞어서. ‘붉은 눈’은 그의 기존 연구와 달라 만약 이들의 박사의 연구 성과였다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 일거야. 아마도 마약이 그 운동신경을 강화하는데 쓰이는 촉매제 같은 것일 수도 있어. 집회에서 검거된 놈을 조사했더니 약물성분이 검출됐어. 마르크 박사라는 말을 듣자 연희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박사님이 여기에? 연희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듣자 여러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뭐? 마약? 펜타닐은 같은 마약은 인간 신체의 반응속도를 느리도록 만들고 중독되면 좀비처럼 변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펜타닐을 촉매 같은 걸로 사용할 수 있어? 수원이 의외라는 듯 말을 꺼냈다.
그야 그만의 노하우겠지. 얼마 전에 개성에 다녀오면서 우연히 메모리를 하나 입수했어. 그안에 암호화된 파일이 있었는데 해독하니 실험에 대한 기전과그 실험 데이터가 있었어. 연희는 묵묵히 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연희누나는 왜 말이 없어? 아까는 표정이 좋더니 평상시와는 좀 다른데. 이거 대단한 특종거리 같은데. 수원이 연희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연희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묵묵히 술잔을 들이켰다.
암튼 그런 상황이야. 그런데 마르크박사가 국내로 들어왔다면 당연히 여기서도 뭔가를 했겠지. 개성에서만 하지는 않았을 거고. 그 데이터도 지금 극비로 취급 돼 어디선가 활용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리고 국내에 펜타닐계 마약과 진통제 성분이 급속하게 퍼져나간 것은 2차로 공단이 활성화된 이후야.여기에 뭔가 큰 그림이 있을 거야. 의료와 보건정책도 바뀌었고 마약성 진통제 성분의 처방이 더 완화됐지. 오피오이드 진통제의 수요와 처방은 수 십배 늘었어. 건강보험의 의무지정제가 폐지되고 사보험의 시장규모도 커졌지.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아니 우연일 수 없지. 공단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두고 있는 업체는 서해산업이야. 그 수익은 다 어디로 갈까. 그 업체는 마약성 진통제와 원료를 생산하고 펜타닐계열 패치역시 마찬가지야. 연구시설의 폭발은 또 다른 뭔가의 시작일 수도 있어. 수원은 집중해서 정엽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사건의 파급력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고 있는 듯 했다. 정엽은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의 간첩혐의를 난 믿을 수 없어. 국민을 선동하려 했다는 것도. 근데 다들 그렇게 몰아갔지. 개성을 취재한다는 핑계로 입국을 했고 전향해 아예 귀순했다고? 그럴 분이 아니야. 정엽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둘 한테 이 얘기를 한 이유가 있어. 며칠 후 다시 개성으로 넘어가서 다시 조사를 시작할거야지난번은 전초전이었고 서해산업도 한번 들렀지. 대충분위기를 파악했어. 이제 평화유지군 부대장 이병수 사망사건 조사를 핑계로 이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남한에 급격하게 마약이 퍼진 시점과 이 모든 것이 같은 시기에 맞물려 있어. 내가 개성에서 총격전에 휩쓸릴 때 나를 노린 게 그 무리들 중 하나였던 것 같아. 붉은 눈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이미 민경부대에서 탈영한 새터민한테 확인했어. 평화유지군한테도 들었고. 그 붉은눈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알아 내야해.
총격까지 당했어? 연희가 놀란 듯 물었다.
스친 정도야, 걱정 안 해도 돼. 그때 난 거의 의식을 잃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친 존재를 기억해. 그런데 그 자와 이번에 시위에서 잡혀 경찰청에 있는 자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것은 아니지만. 정엽은 말을 계속했다.
수원의 아버지는 나와도 친했어. 처음에 경찰이 됐을 때 날 많이 도와주셨지. 잠입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고. 난 항상 빚을 진 기분이 들어 마지막에 선배를 지켜주지 못했어.
주영 선배가 마지막으로 남긴 수첩의 종이에서 개성과 관련된 흔적을 남겼고. 당시 팀장은 그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았어. 내가 얘기를 꺼내도 별거 아니라고 했고. 그렇게 무시했지. 몇 달 후 우리 팀은 공중분해 돼. 근무지와 부서를 다 섞어버렸지. 오정훈은 승진해서 본청으로 갔고. 수원이도 나름 조사를 했을 거야.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로 묶인다면 어떨까? 연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식당의 문이 열리고 회사원으로 보이는 너 댓 명이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정엽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고 얘기를 계속했다.
연희야, 이 얘기는 아직 엠바고야. 확실한 물증이 필요할 때 까지. 좀 더 두고 보고. 네가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뭔데. 말해봐. 연희는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르크 박사가 개성에서 만약 붉은 눈과 관련된 연구를 했고 그 데이터를 누군가 활용했다면 국내에서도 연구가 진행될 수도 있어. 어디서 누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 그 책임부서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거야. 언론의 시각에서는 뭔가 다른 게 나올 수도 있을 테고. 북한 당국은 일을 벌일 상황이 아냐. 지금은 내전에 가까우니.
참 김희수 부장님은 잘 계셔? 조만간 한번 찾아 뵙겠다고 해. 어머니 사건 조사하면 다시 확인할게 있으니까. 어쨌든 유일한 목격자고 관련자니까. 도움을 받아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응 내가 한번 말씀드려 놓을게. 최대한 다시 기억나는 것이나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확인해 달라고.
아 맞다, 그때 같이 간 후배 기자가 연희누나 부서의 부장이지? 수원이 말을 꺼냈다.
부장님은 그 사건으로 한동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지금도 어머니 영상을 못 보시겠다고해 그때 생각으로 눈물이 나서.
자 이제 수원이 얘기를 들어봐야겠지. 김판수 죽은 것 그리고 네가 조사하고 있는 오정훈 경무관에 대해서 네가 파악한 것을 말해봐.
형은 참. 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 조사하고 있지. 형이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복수심이라고 불러도 좋아.
그때 네가 첩보로 나한테 말한 거 나도 대충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어. 김판수가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사실 네 아버지는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는 분이야.
아버지가 속해있던 그 팀 형사들 오정훈 그리고 김판수와 연결고리가 있는지 그걸 파악하고 있어. 그런데 쉽게 안 나와 그냥 심증뿐이고. 막혀 있는 상태야.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요즘은.
네가 나한테 준 아버지 수첩에서 나온 단서. 개성이라는 말은 왜 남겼을까. 그때 선배가 숨이 멎을 때 들었거나 누군가 그때 죽어가는 선배한테 그놈들의 얘기를 듣고 메시지를 남겼을 수도 있겠지. 국과수에 검증을 의뢰했을 때 뒷면 마그네틱 카드에 적힌 것은 개성이었잖아. 아버지의 음성도 그랬고. 오정훈은 나도 알아보고 있어. 지금은 경무관이 되었지. 꼬리가 길면 흔적은 남아. 그도 피해갈수 없어. 분명연결고리가 있을 거야.
수원을 보내고 정엽은 오랜만에 연희와 시내를 걸었다둘은 한 동안 침묵했다. 연희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 잠시 침묵한 후 정엽은 뭔가 결심이 선 듯 잠시 걸음을 늦췄다.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했어. 개성에 가게 된 것도 얘기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한동안 연락도 제대로 못했고. 내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잖아. 넌 그때마다 힘들어했고. 지난번 집회조사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너한테 생각할 시간을 준거야.
고작 그거야? 그것도 수원이가 연락하게 만들어? 정엽은 연희를 쳐다보고 꼭 안아주었다. 잠시 거부하다 연희는 정엽을 받아들였다.
나쁜 새끼. 연희가 순간 핸드백으로 정엽의 가슴을 몇 번 쳤다. 고작 그거로 헤어지려 했어? 우리사이가 그거였어?
둘은 묵묵히 대로변을 걸었다. 가끔 술에 취한 몇몇의 무리들이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마포대교 북단에서 여의도 쪽으로 향했다. 겨울 초입의 한강변은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정엽은 연희와 5년 정도 만났다. 처음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수원의 아버지 김주영의 장례식 장이었지만 몇 번 만남이 이어지고 몇 년 후 연인으로 발전했다. 가끔 그들은 국내외 여러 여행지를 다니며 추억을 만들었다. 한번은 연희가 아버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엽도 아버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최연경은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어머니와 참 많이 다퉜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고 나서는 정엽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젠가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들은 연인이 된 후 베트남의 나트랑으로 처음 해외여행을 떠났다. 여행 마지막 날 둘은 해변에서 맥주를 마셨다. 늦은 오후의 노을이 해변을 붉게 물들였다. 멀리 서핑을 하는 사람이 손짓을 하는 것을 연희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연희는 정엽의 아버지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몰라? 연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바다를 쳐다보다 말을 꺼냈다.
응, 어머니가 말해준적이 없어. 어머니 성격상 말해주지 않았을 거야. 아냐 모르지 나중에 알려주려 하셨는지도. 그런데 이제는 영원히 모를 것 같아.
그러는 너는? 정엽이 물었다. 연희는 오랫동안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내가 왜 총통정부를 극도로 혐오하는지 알아? 아버지는 그들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 아버지는 국방연구와 관련된 일을 하시고 계셨어. 어릴 때라 자세한 것은 잘 몰라. 국가 안보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셨고 거의 매일 새벽에 들어오셨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어. 아버지는 연구소를 차렸어새로운 연구 수주를 받았다고. 그 말은 기억나. 모처럼 일찍 들어온 날이고 술이 좀 취해 있었거든.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새로운 사업체 운영과 연구에 쏟았어.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 뭔가 잘못 된 듯 했지. 아빠의 얼굴이 점점 검게 변하고 안 좋아 지는 거야. 그리고 일이 터졌어. 아버지의 사업체가 결국 정부사업 수주를 받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 됐다고 했어. 그날 연구소에 불이 나고 아버지가 그 화재로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결국 연구소 운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경찰 조사결과가 나왔고 유서가 발견됐대. 그녀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파도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녀의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근데 그거 알아? 연희는 잠시 멍하게 파도를 응시했다. 파도는 쉴새 없이 포말을 반복해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것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어.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정엽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집에 차압딱지가 붙는 것도 채권자가 빚을 독촉하는 것도 참을 수 있어.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것으로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나도 한때는 그런 아빠를 원망했지. 그 정도를 버티지 못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냐고. 엄마는 아프셨고. 그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지.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한 게 그 때문이었을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어힘들더라도 어쩔 수 없었지. 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한 달에 한번 씩 누군가가 매달 돈을 보내는 거야.
처음에는 누가 잘 못 보낸 줄 알았지. 은행에 가서 물어보니 송금오류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일단 모르는 돈이니 그냥 뒀어. 그런데 매달 같은 금액이 반복해서 입금됐어. 어머니 치료비와 생활비가 될 정도는 되는 돈이더라고. 크지는 않아도. 그리고 나한테 익명의 메일이 하나 왔어. 자신은 아버지와 같이 일을 했다고 송금은 아버지가 부탁한 것이라고. 나는 답변을 보냈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고 진실을 알려달라고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꼭 알아야 한다고 했어. 생활비를 보내줄 정도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거야. 2학년 겨울 방학이었어. 나는 무작정 메일을 보내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지. 오래전 아버지가 마르크 박사를 만나러 LA에 간다고 했거든. 사실 거기가 어딘지 상관은 없었어, LA든 뉴욕이든 일단 가서 무조건 만날 때 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 겨울방학에 난 LA로 날아갔어. 그가 송금을 하는 날에 맞춰 메일을 보내고 일주일정도를 기한으로 잡았어. 그 안에 못 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코리아타운 근처의 허름한 모텔의 퀴퀴한 냄새가 아직도 기억나. 옆방에서 들리던 여자의 신음소리, 덜그럭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아직 생생해. 연희는 맥주를 마시며 잠시 바다를 쳐다보았다. 막막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연희는 사우스 웨비뉴를 따라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자연사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몇 시간 동안 걷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청량한 가을과 같았다. 다운타운 곳곳에는 활기가 넘쳐났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근처 벤치에 앉거나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어갔다. 밤에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LA의 야경을 한동안 보았다. 다음날 연희는 산타모니카 해변을 거닐었다. 근처에서 책을 읽고 햄버거를 사 먹으며 노을을 쳐다보았다. 이틀째였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직 3일 정도는 여유가 있어.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르크역시 그 무렵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연희를 만나야 하는 것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김교수와 약속 때문이었다. 김교수는 연희가 이 일에 말려들거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을 때 그 영향이 연희에게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장래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마르크에게 부탁한 자금 역시 훗날 저들이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사건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조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마르크는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 숙소로 향했다. 일단은 학회에 참석해야 했다. 레녹스를 지나 사우스 웨스턴 도로로 향했다. 사고가 있었는지 차량이 몰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제길 시간을 잘못 맞췄네’. 그는 중얼거렸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온 것을 깜박했다. 연희를 만날지 결심이 아직 서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자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김교수의 부탁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최소한 연희가 진실을 알 권리는 있는 것이다. 마르크는 차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학회는 큰 무리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3차원 뇌 스캔에 대해 발표가 이어졌고 행사 이후 마르크는 최신 학계 소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학회가 끝나고 마르크는 숙소에 도착했다. 이틀간의 일정이었다. 연희가 보낸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마르크는 고민 끝에 답변을 보냈다. 페어몬트 호텔 로비에서 7시에 만나기로. 해변은 평화로웠다. 마르크는 노을이 붉게 수평선을 물들이는 순간 멀리 있는 대관람치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호텔로 들어가자 한눈에 연희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동양인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연희의 옆 모습이 김교수와 얼핏 비슷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그녀가 묻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연희?
마르크는 조용히 앉아 이름을 불렀다. 흰 피부와 큰 눈망울이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이목구비는 뚜렷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긴 생머리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갸름한 얼굴과 뚜렷한 콧날은 도도해 보이기도 했지만 귀여운 인상도 있었다. 김경섭 교수의 얼굴이 어느 정도 그녀에게 남아있었다. 그녀는 얇은 코트를 걸치고 청바지 차림으로 긴장한 듯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마르크가 다가가자 연희는 멍하니 마르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하는 한국어가 서툴러도 이해해줘.
마르크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연희는 당황하고 있었다. 커피를 시킨 후 둘은 마주 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라는 것 알아. 매달 보내주는 금액도 그렇고 그건 아버지와 약속한 거야. 마르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은 진실을 알고 싶어서 왔다고. 아버지는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당신이 우리에게 돈을 보내는지 연희는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마르크를 처다 보았다. 연희가 침묵으로 하는 말을 들었는지 마르크는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르크가 김연희의 아버지 김경섭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교환 학생 때였다. 당시 컴퓨터 공학을 가르쳤던 그는 마르크의 천재성을 눈여겨보았다. 마르크는 프로그래밍 실력도 뛰어났다. 마르크의 어색한 한국어 억양도 몇 개월이 지나자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김경섭은 그가 마지막 학기에 냈던 리포트 <의식 스캔과 의사전달 및 의지의 통제>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아이디어에 불과했지만 학부생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기존의 방법으로는 한계에 도달한 자신과 다르게 전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도는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였다. 그 무렵 김경섭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안보실에서 그가 쓴 논문을 보고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이다처음 김경섭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기술이며 부작용이 있기에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이들의 제안에 흔들렸다. 김경섭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강사 생활과 매년 진행되는 R&D 연구비 수주도 버거웠고 부인의 치료비라는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도 해야 했다. 그는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었다. 교수를 찾아가 이런저런 사정을 예기하고 선물과 연말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안보실의 제안은 그래서 솔깃했다. 1년 후 경섭은 이들의 끈질긴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다. 국방연구소의 연구를 수주할 수 있도록 이들은 구두 계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교수님은 몇 년 후 학교를 그만두고 어느 순간 연구소를 운영하기 시작했어.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켜 국방관련 수주를 확답 받았다더군. 나머진 기밀이라고 나에게도 참여를 제안했고.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전 나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이었지. 나는 어머니 때문에 종종 한국에 들르곤 했거든. 나도 박사님과 비슷한 연구를 막 시작할 때이기도 했고 오래전 한국에서의 인연으로 아버지와 계속 교류를 했고 비슷한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은 거야. 마르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교수님의 말로는 국가 주도 프로젝트였다고 했어. 자세한 부분은 비밀유지 조건이라 전체 내용을 말해 줄 수는 없다는 거야. 세부적인 부분은 좀 달랐지만 이 분야는 교수님과 내가 선구적으로 연구한 분야이기도 했어. 교수님은 처음에는 힘이 들더라도 사업이 진행되면 수의계약 으로 결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지. 연희는 주의 깊게 마르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연희가 말을 꺼냈다. 그녀는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너는 아직 어릴 때였어. 그 사업은 극비프로젝트였으니 당연히 소수의 인원을 빼고는 아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나도 필요한 부분까지만 교류를 했지. 교수님의 연구가 정확하게 어떤 연구였는지는 모르고 있어. 의뢰인들은 빠른 성과를 요구한 모양이야. 하지만 연구는 서두른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나 역시 그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았어. 서울에서 만났을 때였지. 나는 동물에게. 신경회로를 이식해 칩으로 의식을 통제하는 방식을 시작했어. 뇌파측정을 통한 신경전달물질에 대한 연구를 추후에 하기 시작했는데 교수님도 비슷한 실험을 했을 것이라 생각해. 나도 당시 내가 연구한 신경전달 물질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기도 했으니.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며칠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가 있었어요. 연희가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쯤이었을 텐데. 교수님은 부분성공이 이뤄졌다고 했어. 그 데이터를 실험을 제안한 곳에 전달했을 거야. 마지막으로 박사님은 연구가 신무기와 관련된 수위계약이 될 것이라고 했고. 마르크는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안 된 것이죠. 아버지는 빛에 몰렸어요. 집에도 차압 딱지가 붙었고. 연희가 말했다.
김교수는 누군가로부터 협박을 당했을 수도 있어. 비밀이 새나가기를 바라지 않는 조직이나 개인일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요구 받았을 거야.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었는지 몰라. 나는 교수님이 말해준 대로 그 과정이 자연스레 진행될 줄 알았어.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메일이 하나 왔지. 나는 뭔가 안 좋은 느낌을 받았어. 그는 이대로 그만둘 수 없고 무작정 저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고도 했어. 그게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메일이었어. 연구소에 화재가 났다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고. 김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 누군가 10만 달러를 보냈더라고.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어. 김교수가 차명으로 보낸 것 일수도 있고. 교수님이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상해 주신 부분인데 처음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어. 일부를 연희한테 보내달라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그럼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닌가요? 연희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으로 마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들은 박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불합리하거나 윤리에 위배되는 문제에 대한 것을 박사님에게 요구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박사님은 그것을 따를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총통정부는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 많은 노력을 해. 그 과정의 일부일수도 있을 거야.
아버지가 따로 너에게 남긴 얘기는 없었어? 마르크가 물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정엽과 연희는 마포대교 한 복판의 벤치에서 일어났다여의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여의도 공원이 보였다. 12시가 가까워오자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지나는 차량의 불빛이 멀리 물길에 반짝거리며 혜성처럼 긴 꼬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엽은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께에 걸쳐주었다. 연희는 감정과 추위 때문인지 몸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때 나트랑에서 박사님과 한 얘기 들려준 것 기억해?
응, 기억하지. 네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해 준 얘기니까. 정엽이 너한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 달라고 한 얘기는 아냐.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은 꼭 알아야 겠어. 그건 수원이도 마찬가질 거야. 너도 어머니 사건을 알고 싶은 것처럼. 아빠는 국가 주도 프로젝트를 수주할 예정이라고 했어. 마르크 박사님의 말도 그랬고. 그런데 왜 안됐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 절대 아니야. 분명히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을 거야. 연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아까 네 말을 들었을 때 마르크 박사님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어. 연희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부장이 마르크 박사를 언급했을 때 좀 놀랐고. 마르크 박사도 비슷한 계약을 하고 일을 시작 했다면 김경섭 교수님이 처한 상황에 몰렸을 수도 있지. 박사님은 그 위험을 감수한 것인지 모르고. 그는 이미 실험을 성공시켰을 수도 있을 거야. 이제 곧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지금 마르크 박사는 행방불명 상태라고 하지만. 아직 단서는 있어. 우리는 참 여러 가지고 비슷한 점이 많아. 나도 너도 그리고 수원이도. 정엽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게 우리를 묶어 두는지도 모르지. 난 네가 국수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너에겐 국수본과 김부장이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지. 그 조직은 너를 이곳에 묶어 둘 수 있는 집 같을 거야? 내 말이 맞지? 그것에 대해서 난 뭐라고 하지 않아. 사람은 다 다르니까. 너한테는 김 부장이 아버지 같을 수도 있어. 너를 스카웃했고 믿어 주고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넌 목숨도 걸어가며 임무에 뛰어들지. 내가 몇 번을 봤어. 경찰에 있었을 때도 넌 그랬어. 하지만 난 아냐.
넌 그걸 인정해야해. 만약 그들이 그 힘을 부당하게 사용해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진실을 밝힐거야.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고 싶어. 아버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난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야. 난 이제 돌아갈게. 얘기를 하니 이제 좀 속이 후련한 것 같아. 연희는 묵묵히 앞으로 보고 걷고 있었다. 저 멀리 택시가 보였다. 그녀는 택시를 불렀다. 정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뒤에서 가볍게 안아 주었다. 그녀의 손이 정엽의 손 위로 포개졌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택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택시에 오르며 연희는 가볍게 정엽을 쳐다보았다.
갈게.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뒷문을 닫았다. 정엽은 멀어지는 택시를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정엽은 방향을 돌려 마포 쪽으로 걸으며 그녀가 한 말을 여러번 생각해 보았다. 새벽의 공기가 차가웠지만 추위보다는 오히려 정신을 맑게 만드는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