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비 Jun 03. 2019

한국영화를 읽다_불신지옥(2009)

한국 종교-공포 장르의 정체

공포는 원초적인 불안을 자극하는 장르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의 호러 장르는 한국 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포의 기억, 즉 한을 작동시켜 관객을 아연하게 만들죠. 사연이 있는 여성이 불안한 에너지를 가지고 칩입하여 가부장의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코드야말로 <하녀> (1960)를 통해 김기영 감독이 가장 모범적으로 선보인 한국 공포의 ‘원초적’ 코드이자 <월하의 공동묘지> (1967)부터 1970년대부 터 1990년대까지 긴 명맥을 이어온 KBS의 <전설의 고향>을 통해 한국 관객이 반복적으로 체득한 ‘한국적인’ 공포입니다.


 “ 한국의 공포영화는 할리우드의 1950 년대의 B급 영화 ,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 , 혹은 일본의 괴담영화들과는 다르다. 물론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아이콘인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한국의 공포영화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외계인 , 괴물 , 기형 , 살인마 , 좀비 , 정신병자 , 또는 낯선 타인의 등장이 거의 없다 ( 아주 가끔 공포스러운 타자를 ‘ 수입 ’ 하기는 하 지만 , 대부분 대중성을 얻지 못했다 ).” ( 정성일 , 2006)


위의 지적처럼 한국의 공포영화는 일본이나 여타 서구의 공포영화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며 공포스러운 타자를 '수입'한 영화들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0 년대 들어 일련의 공포 영화들이 할리우드로부터 '학습한 공포'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많은 독자들이 아실 겁니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2016)은 좀비라는 할리우드적 소재를 한국인이 가진 재난과 시스템의 불능에 대한 트라우마와 명민하게 연결하였습니다. 최근 젊은 관객층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정범식 감독의 <곤지암> (2018)은 할리우드의 페이크다큐 형식을 곤지암 정신병원이라는 도시전설과 연결하여, 관객들이 이질적인 영화 형식을 비교적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소개하였고요.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도 빠지면 섭섭하죠. 이러한 최근의 영화 트렌드를 조금 앞서 시도한 영화가 바로 <불신지옥>입니다.



엑소시즘: 한국 공포영화에 빙의된 서양 악마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은 소진이라는 여학생의 실종을 둘러싸고 소진의 언니인 희진과 소진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태환, 기독교에 빠진 어머니, 그리고 같은 아파트의 이웃들이 겪는 공포를 다룬 영화입니다. <불신지옥>은 정확한 의미에서 엑소시즘을 다룬 서구적인 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영화의 목표는 소진을 찾는 것이고 그녀에게 깃든 것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을 소진으로부터 쫓아내야 하는지 –즉, 엑소시즘을 행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한국적인 공포 코드인 부성의 부재와 가정의 파탄을 아파트라는 한국 특유의 헤테로토피아적인 공간을 통해 효과적으로 그려낸 점이 더욱 부각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에게 빙의된 영적인 존재가 빙의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고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 다’는 점에서 엑소시즘 장르의 내러티브와 문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기독교라는 서구 종교를 믿고,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가정에 균열이 생기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기이한 에너지를 품은 서구’의 에너지를 영화에 끌어오고 있죠.


한 축에선 한국적인 코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모티브를 분석해보자면, 무당 인물소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무당인 경자는 극을 진행하는 힘이자 영화 속 사건의 전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로 인해 소진이 죽게 되며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경자는 영화 속에서 무서운 힘을 지닌 사악한 존재로 이를테면 서구의 마녀 같은 아이콘입니다. 그런 그녀를 서구적인 마녀와 분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무당이라는 직업과 굿을 하고 색동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공포스러운 주술 행위가 ‘이웃들의 탐욕과 믿음’에 기원한다는 점입니다. 불신지옥의 경자는 2000년대 서울의 건물 구조-아파트- 속에서 생활하는 근대적 존재인 동시에 무당이라는 전근대적 직업을 가진 흥미로운 여성입니다. 그녀의 전근대적 속성은 근대적 공간인 아파트에서 근대의 문제 –살인사건, 이웃과의 단절, 서구 종교에 대한 맹신, 아파트 이웃 간의 불신과 음모-와 만나서 기이한 충돌을 일으킵니다. 근대적 문제를 전근대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과정 자체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심리적 불안을 가하는 셈입니다.



빙의된 소녀, 진실을 추적하는 남성


사건의 발단은 한 소녀가 영적인 존재에게 빙의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녀는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수동성은 소녀들을 ‘죄’나 ‘한’에 의해서 설정된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괴물이 아니라 더 큰 힘에 의해 무작위로 희생당하는 역할로 상정합니다. <불신지옥>에서 소진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자폐증 비슷한 행동을 하다가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것이 신내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죠. 이처럼 수동적이지만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고 그녀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갈등이 유발된다는 점에서, 소녀는 주체성을 가진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 속 편지와 유사한 일종의 장치입니다.


KMDB, kmdb.or.kr


영화의 주인공은 장치 역할을 하는 소녀가 아니라 이 무작위적인 편지의 수신인이자 악마적인 존재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분투하는 탐구자입니다. 내러티브를 진행하는 추동력이자 탐구를 수행하는 주체들이죠. <불신지옥>의 주인공은 소진의 언니인 희진이지만,  일차적으로 탐구하고 추궁하는 역할은 기실 형사인 태환에게 무게를 두고 부여된 것 같습니다. 태환이야말로 시선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인물들을 의심하고 심지어 주인공인 희진에게 폭력적으로 행동하고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갈 수 있는 권리까지 행사하니까요. 그러나 탐구자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선 ‘악마’라는 존재 자체가 모호하고 실체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실체 없음을 무기로 삼아 눈속임과 거짓말을 통해 탐구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간파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눈속임은 탐구자가 실패하는 원인과 연결되죠. 악마가 보여주는 바-혹은 보여주지 않는 바-와 탐구자가 보는 바 사이의 의미의 미끄러짐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선의 미끄러짐은 태환이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처음 경자를 만났을 때는 그녀의 정체를 모르다가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야 알게 되고, 소진을 죽인 범인으로 소진 엄마와 희진을 지목하며 정작 사건의 진짜 전말을 보지 못합니다. ‘보는 것’의 이미지는 희진이 신들리는 장면에서 독특한 미장센으로 구현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얼굴에 자루를 쓴 사람들과 무당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루를 쓴 사람들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인 반면, 무당 복장을 한 인물은 자루를 조금 벗겨내는데, 그 자루 안에 얼굴에는 수많은 눈이 달려있어요. 이렇게 표현된 신들리는 과정을 통해 희진이 보는 자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제껏 보는 자로 설정되었던 태환은 신들린 희진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다가 기절해서 시선 권력을 빼앗기고, 정작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옥상 장면에서는 배제되고 맙니다.


“ 근대문명에서는 보는 것의 힘을 통해 지식-이해-이성이 성립되고 , 또 주체와 대상의 관계 역 시 시각영역을 통해 구조화된다. 그러나 판타스틱 예술에서 대상은 시선을 통해 쉽게 전유되지 않는다. 대상은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강력한 눈 ( 시선 )이나 주체로부터 미끄러져 나감으로써 , 왜곡되고 붕괴되거나 편파적으로 되며 비가시성 속으로 떨어진다.” ( 김소영 , 2000)


이처럼 악마적 존재는 탐구하는 주체로부터 미끄러져 나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정의되지 않습니다. 정의되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실체를 모르는 존재’로서 인물들을 공포에 몰아넣을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거죠. ‘진실’ 혹은 ‘편지의 내용’을 알아낸다면 이 힘을 추방할 수 있겠지만 탐구자의 시선으로는 결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의 기이한 귀환: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Feat. 모래 사나이)


그렇다면 반대편에 서서 탐구자를 괴롭히는 존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요? 편지의 알 수 없는 발신자는 누구이며  탐구자는 왜 그를 두려워할까요? 악의 정체를 규명하는 작업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 인용했던 소설 <모래 사나이>에 대한 분석을 끌어와 시작할 수 있습니다.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는 내서니얼이라는 주인공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소설입니다. 샌드맨이란 어린아이가 나쁜 짓을 하거나 밤에 잠을 자지 않으면 눈알을 뺏어간다는, 망태 할아버지와 비슷한 옛날이야기 속 괴물인데, 내서니얼은 어릴 적 아버지와 코펠리우스라는 남자가 함께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코펠리우스를 샌드맨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소년이 느끼는 아버지상이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로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프로이트가 설명하고 있는 ‘자아이상’ 은 아버지를 모델로 하여 내가 따라야 할 이상적인 인물이며 개인의 초자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초자아에 내재된 아버지의 명령에 개인이 미치지 못했을 때, 이 이상적인 아버지가 처벌하는 가학적인 아버지로 귀환합니다. 말하자면 <샌드맨>에서 내서니얼의 아버지는 샌드맨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이상적인 아버지이고, 코펠리우스는 샌드맨과 동일시되는 나를 처벌하는 아버지, 나를 거세하는 –눈알을 뽑는- 아버지로 분열되어 있으며, <모래 사나이>는 소년이 아버지에 대해 가 지는 분열된 이미지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나쁜 아버지 분열은 지젝이 프로이트를 언급하면서 누아르물에 나타나는 아버지상을 다음과 같이 ‘전통적인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로 구분한 것과도 문맥을 같이 합니다.


“전통적인 아버지 – 법의 통치의 보증자 , 즉 근본적으로 부재하는 자로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 권력의 공개적인 과시가 아니라 잠재적 권력의 위협이 그의 근본적인 특징인 아버지 -” ( 지젝 , 1997)


“다른 아버지 'other father' – 아버지의 이름의 외설적인 , 무시무시한 , 그림자적인 이중체 -... 일종의 ‘ 희열의 주인 ,’ 칸트가 ‘ 근본적 악 ’이라고 불렀던 것 , 윤리적 태도로서의 , 순수 정신성으로서의 악함의 불가능한 표상에 가장 가까운 아버지적 형상...” ( 지젝 , 1997)


영화에서 아버지상은 한 가지가 아니며, 항상 1) 전통적인 아버지와 2) 다른 아버지라는, 두 명의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지젝의 구분은 종교-공포영화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악마의 관계로 확장해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통치의 보증자이자, 보이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행사한다는 전통적인 아버지의 정의는 그리스도와 서구 종교의 권력에 대한 묘사로 손색이 없으며, 무시무시하고 그림자적인 근본적인 악함이야말로 악마에 대한 서술에 꼭 맞지 않나요? 영화 속에서 산과 악 관계가 아버지상의 두 얼굴에 대한 영화적 변용일 수 있다는 가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살펴보면, 두 이미지가 얼마나 떼어내기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불신지옥>에서 초현실적인 힘의 모호함에 대한 양면적인 해석은 소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경자와 이웃들은 소진을 귀신이 내린 아이라고 경외하면서도 그 악마적인 공포에 두려움을 가지고 결국 소진의 기이한 힘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 당합니다. 그러나 소진의 어머니는 자신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빌어, 자신의 딸을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영화에서 소진에게 씐 것은 귀신인 동시에 구원자이기도 하며 그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정체가 정의되는 순간이었을지 모르는 옥상 장면에서 조차, 관객은 ‘봐’라고 말하는 소진 엄마의 지시와는 다르게 화면 속에서 소진의 정체를 ‘볼’ 수 없지요. 소진이 귀신인지 구원자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태환의 딸이 살아나서 신들림을 암시하는 복선을 보임으로써 이 경계는 더욱 흐려집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죽여왔던 무시무시한 힘이 이번에는 누군가를 살렸고, 살아난 인물이 무슨 행동을 할지 영화 속에서는 전혀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호한 악마를 대적하는 순간 영화 속 탐구자들은 기이한uncanny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기이함이라는 감정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친숙한 것이 억압되었다가 다시 생각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젝의 아버지 분열과, 기이함에 대한 논의를 염두에 둘 때, 나쁜 아버지 상을 대표하는 영화 속 악령이 무서운 이유는, 친숙한 아버지상인 종교적 권위가 낯선 방식으로 귀환했기 때문입니다.


악마적 아버지상의 모호성은 한국의 역사-문화적인 맥락과 연관 지어 해석할 여지도 제공합니다. 서구에서 악마성과 구원자의 특질이 이분법적으로 제시되고 악마의 존재 자체가 공포의 원인이 되는 반면, 한국영화에서는 악마의 모호성이 사건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한국 영화의 특징적인 아버지상의 모호성은, 전쟁과 도시화로 인한 핵가족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남성들이 가부장적 아버지상과 본질적인 단절을 겪었다는 점에서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남성들은 그들이 약속받은 가부장의 권위를 얻지 못했 소년으로 잔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존재했다고 믿지만 2000년대에는 부재하는 강력한 가부장 아버지가 막강한 악마의 모습으로 귀환할 때, 소년들은 그 권위에 현혹되면서도 아버지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즉 악마성을 추격하는 공포영화는, 이제는 아버지 세대가 되어버렸으나 아직 권위를 이양받지 못한 세대의 들이 느끼는 괴물적 아버지상에 대한 불안의 알레고리다-라는 해석도 가능한 거죠.




앞서 탐구자들과 악마들, 그리고 빙의된 소녀의 관계를 라캉의 도난당한 편지에 대한 세미나의 내용을 빌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공포 장르의 해석에서 인물들의 자리바꿈은 편지 빼돌리기보다는 존속살해와 더 가까워 보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가 편지로 상징되는 언어적 기표에 대한 인물들의 자리바꿈을 그렸다는 점에서 ‘문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 탐구자와 악마의 관계는 문명 이전의 단계에서 처벌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먹고 먹히는 폭력적이고 신화적인 원초성을 염두에 둔 자리바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야의 그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처럼, 우리는 괴물적 아버지의 귀환을 아주 오랫동안 두려워해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고문헌


-E.T.A. 호프만. (2017) 모래 사나이. 창비.  

-Fink, B. (2017)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Freud, S. (1919) The Uncanny.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ume XVII: An infantile Neurosis and Other Works. pdf.

-Royle, N. (2004) The Uncanny. Routledge.

-김소영. (2000) 근대성의 유령들: 판타스틱 한국영화. 씨앗을 뿌리는 사람.

-슬라보예 지젝. (1997)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 분석. 주은우 옮김. 한나래.

이전 10화 한국영화를 읽다_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