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화두는 어디로 향하는가
염화시중拈華示衆
영화는 불교의 화두 하나를 던지며 시작합니다.
“그는 진리를 묻는 제자 앞에 말없이 한송이 꽃을 들어 보였다.”
이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는 화두로, 석가가 사람들 앞에 연꽃을 들어 보이니, 오직 그의 제자인 가섭만이 석가의 뜻을 헤아리고 미소를 지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합니다. 말이나 글로 인한 전달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도를 전함을 뜻한다는데, 이 ‘마음’이라는 것을 배용균 감독은 ‘이미지’라고 해석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화두를 사용하는 이유도 언어가 내재한 편견을 뛰어넘어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것인데, 이 궁극적인 진리를 위한 화두를 감독은 회화적인 이미지를 통해 영화라는 영상매체로 표현한 것이죠. 꽃이라는 ‘이미지’로 도를 전한 석가와 같이 감독은 영화적 이미지를 통해 의도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영화의 서사가 구도자적인 성격보다 방황하는 중생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인물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을 들어, 영화는 불교적 해탈을 개인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해탈이라는 불교적인 관념을 개인의 수준으로 차용한 ‘끊임없는 고뇌를 통한 인간적 성숙’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네요.
이와 같은 관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불꽃, 물, 연기와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제시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장면이 장례를 치를 때 불을 피우는 장면으로 확장되거나, 혜진이 물에서 허우적대는 장면이 기봉이 폭포에서 곤욕을 겪는 장면으로 확장되기도 하죠. 절간에서 생활하며 나오는 연기가 후에 혜곡의 시신이 타는 연기와 시각적으로 연결성을 지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지들은 서사와 뚜렷한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이는 마치 작품 가장 처음에 제시된 화두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화두는 언어의 명료성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오히려 그 불명료함을 통해 인간의 사유를 촉진하는 장치입니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연의 이미지 역시 모호하되 항상 인물의 주위를 맴돌면서 인물의 삶의 기저에 항시 존재하고 있는 삶에 대한 미련이나 애정,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드, 자아, 초자아로서의 세 승려
기봉을 인간 주체의 자아라고 분석할 때 혜진과 해곡은 각각 기봉(자아)의 다른 측면인 이드와 초자아라고 상정할 수도 있습니다. 혜진은 부모 없이 자란 자연의 아이입니다. 부모가 없어서 슬프냐는 기봉의 말에 혜진은 ‘부모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슬프냐’고 답하죠. 또한 혜진은 거리낌 없이 새를 죽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혜진은 슬픔과 죄의식이 결여된 존재이자 가장 원초적인 자연적 존재로서 이드의 자리를 갖습니다. 한편 혜곡은 도에 통달한 인물로 보이며 기봉이 고뇌할 때마다 꾸짖는 정서적 아버지의 역할을 해요. 이는 자아의 도덕적 판단을 지배하는 초자아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한편 세속적인 가치와 구도를 향한 염원 사이에서 고뇌하는 기봉은 둘 사이에 놓인 자아이고요. 세 사람을 각각 이드, 자아, 초자아로 놓으면 이 영화를 주체의 방황하는 가치관에 대한 알레고리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세 사람이 하나의 주체에 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에, 혜진, 기봉, 혜곡은 모두 물에 빠져 고난을 겪는 등 같은 사건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기도 하는 거죠.
이 작품을 무의식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생각해볼 때, 기봉의 눈먼 어머니는 ‘시선이 없는 모성’을 상징하며 기봉의 무의식적 우울의 원인이 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격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추측하여 원하거나 어머니가 욕구하는 대상의 자리에 스스로 위치시킴으로써 점차 개인적인 욕구를 가진 주체로 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어디를 보는지 자녀는 알 수 없죠. 어머니는 아무 곳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식은 그녀가 보는 곳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시선을 받는 데 실패한 인물은 자아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우울감에 방황합니다. 마치 어머니의 시선을 숙부인 클로디어스에게 빼앗긴 햄릿처럼, 기봉의 고통의 원인 중 하나는 모성적인 시선에 부재인 셈이죠.
1989년 대한민국: 영웅의 부재와 중생의 고뇌
기봉은 결국 혜곡의 장례를 마치고 절을 떠납니다. 혜곡이 죽음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던 성질이 기봉에게 부가된다면, 기봉은 이제 번뇌를 잊은 구도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죠. 그러나 카메라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고뇌를 안고 있는 어두운 표정입니다. 기봉의 어두운 정서와 고통은 영화 초반부터 일관적으로 드러납니다. 기봉이 도를 닦는 과정은 깨달음에 다가가는 즐거움의 과정이 아니고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묘사되는데, 그는 심정적으로 고뇌하는 것은 물론 물리적으로도 나무를 하다 손이 베거나 급류에 휩쓸리는 등 끊임없이 고통받습니다.
기봉의 개인적인 좌절은 시대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는 군사정권 통치의 장기화를 배경으로 국민들의 정신적인 공허함과 절망감이 높아져 가던 때입니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서 읽을 수 있는 감성 체계 중 하나가 바로 정신적인 방향성의 실종입니다. 기봉의 정신적 지주였던 혜곡의 죽음 역시 방향성이 소멸된 사회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죠. 또한 기봉의 방황은 그가 “사바세계”로 표현되는 한국사회의 가치들을 두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국가를 이루는 기반으로서 상징성을 지니며, 가부장제도로 대표되는 유교문화가 가정을 움직이는 원리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기봉의 아버지는 부재하고 어머니는 결함을 가진 인물이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해 보이지 않아요. 기봉의 와해된 가정은 국가가 제시하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지 못하고 소외된 모습입니다. 이는 국가이데올로기에 의해 위협받는 소시민의 절망이라는 주제와 다시 연결됩니다. 기봉은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국가 주도의 도시-가부장 이데올로기의 공간을 벗어나 불교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여전한 고통과 혜곡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방향성의 상실뿐인 것입니다.
영화는 속세와 떨어진 종교의 세계를 그리지만, 결코 사회와 격리되어 있지 않아요. 오히려 두 세계 사이를 방황하는 기봉을 통해 당시 한국사회가 내포한 고통을 그리고 있지요. 영화가 "사바세계의 고통"이라고 부르는, 바로 지금 우리들도 느끼고 있는 이 고통을 말입니다.
참고문헌
Stephen Teo. (2013) Domestic Space and the Family in South Korean Cinema. The Asian Cinema Experience: Styles, Spaces, Theory. New York: Routledge.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https://www.kmdb.or.kr/main#
정형철. (2009) 형상적 사유의 존재양식: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들뢰즈적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