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 화내는지도 몰라”
– 아이유, Unlucky
작가는 직업인 의사보다는 들어주는 사람, 치유하는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듬고 안아주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노래 가사처럼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 화내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당신이 옳다”고 말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제안은 몹시 따뜻하고 몽글몽글합니다. 내 슬픔이 옳다는 말은 바쁜 사회에서 너무 귀하니까요. 슬퍼할 시간에는 힘을 내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내가 슬픔에서 빠져나오게 응원하고 지원해줄지언정, 나의 슬픔 자체가 옳다고는 쉽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 마음이 옳다고 말하면 영원히 그 마음 안에 살지도 모르는 걸요. 그러나 작가는 오히려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해주는 그 한마디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역설합니다. 누군가를 우울한 사람, 즉 현재 잘못된 상태에 처해있으며 개선되어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대신, 그 마음이 어떤 모양이든 반드시 옳다고 말해줘야 한다고요.
그러나, 작가의 글은 의사의 업무 영역과 혼돈되어서는 안 됩니다. 작가는 한 사람으로서 지인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독자를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라는, 작가의 다른 직업이 책날개에 버젓이 적혀있는 한, 작가의 의견은 동시에 의사의 의견으로 읽힐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작가도 의사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고 거듭 강조했는지도 모르지요.
또한 작가의 위로는 마음에 대한 것이지 행동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 친구를 때려달라는 아이를 위해 거짓말을 한 부모님의 사례가 기억납니다. 유사한 사례들은 종종 ‘옳다/그르다’와 ‘사실이다/거짓이다’를 넘나들며 첨예한 부분을 부드럽게 흐리고 넘어가려는 위험한 구석이 있습니다. 누군가 부정적인 마음을 느끼는 상태에 처한 것이 ‘사실’이며, 그런 마음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 일 경우, 그 사실을 위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옳음’은 아닙니다. 어떤 마음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고, 안타까운 동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마음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사실'에서 '옳지 않음'으로 슬쩍 넘어가려는 유혹을 뿌리칠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주장한 위로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재활 운동인 셈이지요. ‘비록 당신이 옳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을 기꺼이 알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추하게 눈물 콧물 다 쏟고 운 뒤에는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 또다시 헤매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 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독서 모임을 위한 질문
1. ‘우울증’이라는 명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의 진단으로 우울함의 다양한 증상을 획일화하는 걸까요?
2. 무조건적인 공감이 항상 옳을까요? 내가 받고 싶은 공감은 어떤 모습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