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영화 <안개>는 왜 원작소설의 제목 <무진기행>을 그대로 쓰지 않았을까? 굼금증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무진기행>이라는 제목은 무진이라는 장소를 특정함과 동시에 소설이 가진 기행소설적 성격을 미리 알려줍니다. 이 기행紀行이랄지 기행奇行을 행하는 주체인 주인공의 심리를 중심으로 소설이 진행될 것임을 알리는 역할도 하죠. 소설의 주인공은 서술자이자 여행자인 ‘기준’입니다. 그러나 <안개>라는 영화의 제목은 무진의 명물이라는 안개의 모티브를 강조합니다. 그 결과 영화 속에선 오히려 안개 낀 무진이라는 장소가 기준과 다른 인물들을 압도해버립니다. 안개라는 제목은 벌써 명확한 실체에 대한 회의감을 내포하며, 단일하고 명확하기를 추구했던 60년대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의 영화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고 무진의 명산물인 ‘안개’ 그 자체인 셈입니다.
60년대 서울이라는 공간으로부터
영화의 주인공이 안개라는 암시는 영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인물을 멀리 혹은 가장자리에 위치시키고 허공을 잡는 시퀀스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예를 들어 한밤중 인숙과 기준이 함께 걷는 장면이나 어머니의 묘를 찾는 기준을 멀리서 잡는 장면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안개 낀 공간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점은 무진과 대조되는 공간이자 서술자 기준이 이탈해온 공간인 근대 서울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기준이 위치해 있는 근대 서울의 공간은 영화의 첫번째 장면의 빠른 몽타주로 제시된다. … 기준의 시점으로 서울의 도심이 보인다. 그 서울은 사람이 보이지 않은 채 자동차만이 교차로를 빠르게 지나가는 주인 없는 공간이다. 거대 도시로 변모한 67년의 서울은 그것이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거대화되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기능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묻지 않는 자본집약과 고도성장의 기치 아래 탄생한 생산력 중심의 물화된 공간으로 제시된다. (김선아, 2001)”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서울은 ‘자본집약과 고도성장의 기치 아래’ 재구성된 공간입니다. 또한 서울은 지극히 60년대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내포한 공간인데, 영화가 시작되는 첫 장면에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가운데 자리한 태극기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이 공간은 다른 60년대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의미를 찾아 헤매는 그 서울입니다.
“… 60년대 영화들은 도시 자체의 이미지를 당시 삶의 알레고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4.19 혁명 이후 개봉한 두 편의 영화 <마부>(61, 강대진) 와 <오발탄>(61, 유현목)은 서울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근대적 공간의 특징들을 매우 탁월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주체들이 경험했을 불안정성과 위기감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박현선, 2000)”
<마부>와 <오발탄>에서 서울이라는 공간은 주인공들이 주체성의 위기감을 맞이하고 좌절하거나 극복하는 무대였습니다. 주인공들의 장애물은 서울과 서울이 품은 근대성이죠. 그런데 <안개>의 모더니즘적 성격은 외부에서 오는 근대화의 공격을 주인공 내면의 내러티브로 끌어들입니다. 주인공은 가난에 찌들지 않았고 치통을 앓지도 않지만 개미를 보는 환각에 시달립니다. 그의 증후는 내부에서 옵니다. 영화는 이 증후를 빌미 삼아 주인공을 서울이 부여하는 위기감에서 일시적으로 격리하고 무진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데려갑니다. 이것 역시 외부(서울)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주인공의 내면을 상징하는 성찰적 공간(무진)으로 불러들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모더니즘적 성격을 지닌 <안개>에서 근대화라는 사건은 더 이상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 사건을 인식하는 인간 주체 내부에 투영된 것이죠. 이렇게 영화는 서울과 무진, 도시와 시골, 외부와 내면을 주인공의 이동을 기준으로 분리하고 대조합니다.
Genius Loci, 혹은 장소의 혼
주인공의 내면과 과거의 상징인 안개는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라 무진의 장소성을 구현하는 Genius Loci(장소의 혼)입니다. Genius Loci란 한 공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성원과 상호작용하면서 축적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진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축적한 실재적 공간의 범주에서 벗어나버립니다. 서술자인 기준의 과거와 현재가 결코 선형적으로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플래시백 효과를 이용해서 과거와 현재를 뒤섞습니다. 무진에 내린 기준이 여자의 비명을 듣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나 벽장을 보면서 병역을 기피하던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 등이 예시입니다. 이처럼 뒤섞인 시간 때문에 무진의 장소성 역시 분열되고 안개처럼 뿌옇게 변합니다. 무진은 ‘풍성하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이 아닙니다. 무진은 오히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분열된 주인공의 정신과 소외감을 형상화한 신화적인 안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기준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 바라보는 거울상이라면, 당대 이 영화를 보던 관객과 영화 사이에도 하나의 거울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60년대의 관객이 스크린 속 기준의 불안을 응시하며 느꼈을 감정은 바로 자신의 불안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준이 편지를 찢고 서울로 돌아오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 인정해주기로 하자’고 체념하는 나레이션 역시 도시 관객의 체념과 닮았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안개>는 성찰적 영화의 성격을 취하며 모더니즘적 고민이 담겨 있는 ‘감수성의 혁명’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소설가 미겔 데 우나무노의 소설 <안개>를 짧게 인용하며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안개 낀 무진을 걷는 기준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부식시켜야지. 혼동시켜야 하고. 특히 혼동시키는 게 중요해. 모든 것을 혼동시켜야 해. 꿈과 현실을 혼동시키고 허구와 현실을 혼동시키며 진실과 거짓을 혼동시켜야 해. 단 하나의 안개 속에 모든 것을 혼동시켜야 해.”
참고문헌
de Unamuno, Miguel. “Niebla”. 1914.
김선아.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2001.
김승옥. “무진기행”. 1964
박현선. (2000). 밀실에서 거리로? : 1960년대 한국영화의 공간과 여성. 소도. 2000.
안개. (1967).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1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