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만희 감독의 출세작이자 우리나라 전쟁영화의 기준을 높인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의 전투 장면에는 지금 봐도 상당한 인원이 투입되었고, 폭발 효과를 실감 나게 표현하여 전쟁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고요. 다만 현대에 와서는 반공 영화적인 특징으로 인해 박정희 치하에 ‘우수영화’로서 수상하였다는 점을 들어, 영화에 나타난 반공 이데올로기를 비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나타난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고려하면 이 영화를 단순히 반공 영화라고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반공영화 속 휴머니즘
‘반공 영화’란 흔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척하거나 북한을 주적으로 투쟁의식을 고조하는 영화를 뜻합니다. 그러나 정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북한군은 강조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큰 전투는 중공군과 벌이는 전투니까요. 북과의 전투는 초반에 제시되는데 이때도 주목할 만한 장면이 있습니다. 전투 중 계집애-영희-를 쏘지 말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말입니다. 이때 상대편은 중공군과 다르게 말을 걸 수 있는 상대이자, 아이를 쏘지 말라는 외침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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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남측 내부에서도 휴머니즘적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작품 초반에 영희의 목소리를 삽입한 점은 마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를 서술자로 사용하여 어두울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를 완화한 시도와 비슷합니다. 구봉서 배우 역시 감초 역할을 하는 군인으로 등장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립니다. 특히 작품 초반에 음악적 요소를 가미하여 그의 주도로 다 같이 춤을 추는 익살스러운 장면은 희극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를 포착한 주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대원을 익명의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각각의 개성을 부여한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영희가 부대원 한 명 한 명마다 별명을 붙이는 장면에서 부대원들은 집합적인 군인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물로서 관객에게 각인됩니다. 이로 인해 각자의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서사를 얻습니다. 이런 요소들이야말로 이만희의 휴머니즘을 볼 수 있는 대목으로, 반공 프로파간다보다 동족상잔의 애환을 표현하는 데 더욱 중점을 둔 감독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남성의 연대와 국가 이데올로기의 수행
다만 아쉬운 점은 시대와 장르의 특성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수호하는 남성들 만이 휴머니즘을 실현하는 주체로 제한된다는 점입니다. 전장이라는 공간에서, 남성 인물들은 연대의식을 쌓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서사를 획득합니다. 반면에 여성 인물들은 주변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희생된 대상인 숙희, 구원의 대상인 영희, 그리고 성욕표출의 대상인 바 걸들은 모두 남성인물들의 서사를 보조하는 대상으로서 작동합니다.
“…끊임없이 국민을 아들 세대로 동질화하면서 내부의 타자성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남성성이 국민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권력 담론으로서의 영화 텍스트를 이끌어가는 욕망의 주체는 남성-아들 세대-국민이 되며 60년대 한국영화는 국가가 그들을 집단적 국민 남성주체로 수립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선아, 2001)
위 논의가 지적하듯이 이 영화 텍스트의 주체는 남성-아들 세대-국민입니다. 반면 여성 인물들은 ‘내부의 타자’이기 때문에 시선의 주체에서 분리하고 타자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여성은 이미 죽어서 말이 없거나, 아직 어려서 서사로부터 배제당하고, 혹은 성욕표출을 위한 도구적 집단으로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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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남성의 휴머니즘’은 남성 인물들의 폭력성과 호전성마저 남성의 본질로 여기고 감싸면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남성성을 재현하기에 이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 중 하나는 럭키 바를 부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바 걸들에게 침입자, 혹은 ‘개 놈의 자식’ 은 북한군도 아니고 미군도 아닌 주인공 부대입니다. 이는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맥락 하에서 ‘남성 중심적이고 호전적인’ 남성성의 이데올로기가 여성인 국민을 포함하지 못하며,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남성성의 이데올로기는 전쟁 영화라는 장르를 통로로 삼아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장하며, 이 과정에서 여성성은 철저히 가려집니다.
살아 돌아간 연락병 -그런데영화 속에서 그의 별명은 언니입니다-이 결국 전쟁 후에 어찌 되었을까 상상해보면, 이전에 다룬 <오발탄>에서 그리는 서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연락병은 오발탄의 주인공들처럼 전후의 서울을 방황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60년대의 관객들은 어쩌면 시대의방황을 잠시 잊어버리고, 과거의 매캐한 영광을 더듬고자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보러 모여들었을지도 모르고요.
참고문헌
김선아,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