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거리를 산책하는 여자들
이 파격적인 영화는 결국 파격적인 검열의 대상이 됩니다. 원래 110분이 넘는 작품이 불과 72분짜리 짧은 영화로 편집되었고 30여 장면이 잘려나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분절된 장면들이 오히려 온전하게 시간 선상에 담을 수 없는 인물의 기억과 70년대 서울의 혼란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기도 합니다.
밤이라는 시간, 서울이라는 공간
불건전함과 성적인 매력 혹은 위협으로 가득한 서울의 밤은 70년대 대한민국이 억압하려던 모든 것들의 집합체처럼 보입니다. 억압을 잊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회가 제시하는 프레임 안에 도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연인과의 관계에 만족하며 언젠가 ‘홈 스위트 홈’의 신화를 이룰 것이라는 꿈결 안에 사는 것이죠. 이때 서울이 제시하는 가정에 대한 환상은 낭만적 사랑이 현실에 정착하는 서구적 환상의 무대라기보다, 근대화가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한 60 ~ 70년대 소시민의 꿈이 실현되는 굉장히 한국적인 진보의 무대입니다. 말하자면 가정을 이루는 것은 ‘중산층’ 계급에 꼭 맞는 사람이 되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현주는 신중산층 계급에 편입되어 사는 삶에 권태를 느끼고 욕구불만에 빠집니다. 초반에 현주는 거실의 텔레비전에서 도취를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시각적 쾌락은 현주를 어느 정도 달래는 듯 보입니다. 레슬링을 보며 열을 올리고 권투선수처럼 애인을 때리는 것이 자신의 불만을 현실에서 어느 정도 표출하는 방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레슬링도 홍길동 드라마도 현주가 갈구하는 쾌락을 주지 못합니다. 현주는 그녀의 말마따나 케이-오 (K.O) 상태가 되고, 그래서 프레임 밖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도시의 밤이야말로 일상으로부터 몽상의 세계가 열리는 가장 풍요로운 ‘프레임 밖’의 공간입니다.
이 바깥 공간은 “서울 중심지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월급쟁이들”의 비슷비슷한 삶을 전시하듯이 현주 앞에 펼쳐 보입니다. 국가이데올로기가 키워낸 수많은 은행원들, 회사원들, 말하자면 중산층들이죠. 낮의 삶은 경제 발전과 대중의 행복을 주장하며 국가이데올로기의 진보가 중산층 시민의 삶 역시 풍요롭게 만들어준다고 기만합니다. 그러나 현주가 목도한 서울의 밤은 개인의 은밀한 욕망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공간입니다. 여주인공에게 진보란 낮의 은행이 보여주는 물질적 진보가 아닙니다. 개인적 진보는 무언가를 욕구할 자유를 되돌려 받는 해방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은 정말 해방이죠.
여성이라는 주체, 산책이라는 행위
그런데 밤은 정말 해방인가요?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휴가를 낸 여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갑니다. 대사가 적고 카메라가 시종일관 여주인공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의 고독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현주가 당하는 억압, 특히 시선의 억압을 함께 절감하게 됩니다. 도시에서 여성은 무수한 관계 사이에 다중적으로 억압당합니다. 도시는 만남을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행인이 급작스레 다가와 만남을 대비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말을 걸어오는 관계의 폭력이 실현되는 장소이죠.
그런데 이러한 폭력에 현주가 반응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첫째는 왜곡과 숨김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현주는 안경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거나, 뒤에서 쫓아오는 남성을 향해 얼굴을 괴상하게 찡그리고 돌아보며 쫓아내기도 합니다. 현주는 남성들의 시선에 겁을 먹거나 순종함으로써 만족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고 반대로 행동합니다. 현주의 왜곡과 숨김은 시선의 권력관계를 부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원할 때는 기꺼이 남성의 시선 안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고향에서 선을 본 남자의 오토바이 앞에 서서 윙크를 하기도 하며, 헌병의 시선을 느꼈을 때나 어린 소년의 추파에도 슬쩍 웃습니다. 현주는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시선에 노출될 권리와 노출되지 않을 권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주가 안경을 쓰고 벗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런 장면들도 안경을 쓰고 보는 자와 안경을 벗고 보여지는 자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을 권리를 달성함으로써, 현주는 사냥의 대상이 아니라, 거리 자체가 진열장이 된 도시의 풍경을 산책하는 산책자flaneur의 지위를 얻습니다. 근대성을 탐색하는 관찰자이자 주체적인 모더니스트의 위치를 획득한 것이죠.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일탈하는가
그렇다면 현주는 이 산책을 통해 무엇을 관찰하고 얻는 걸까요? 현주의 야행이 단순히 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는 성적 일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탈은 궁극적으로 현주가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낮의 사회에서의 ‘연극’ 으로부터의 일탈입니다. 무심하게 연극을 계속하는 애인에 대한 증오와 자신만은 그 연극에서 도망가고 싶은 욕망이 현주의 야행의 동기라고 할 수 있죠.
야행의 일환으로 현주는 과거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현주는 어린 시절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 학생 때 입던 옷을 입고, 어릴 적 사랑하던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그와 결혼식을 올리는 환상도 제시됩니다. 특히 이 결혼식은 작품 초반에 제시된 동료 여직원의 결혼식과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동료의 결혼이 서구식-근대식 결혼이라면 현주의 상상은 한국식-전통적인 결혼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통해 현재의 권태를 털어버리려 하는 현주의 심리상태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야행의 동기는 또한 여성의 개인적 환상이나 트라우마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헌병과 현충원, 그리고 수많은 시선들은 국가이데올로기가 주도하는 감시사회를 상징합니다. 그녀에게 들이대는 남자들 역시 일상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를 품은 소시민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현주와 공통점을 지니기도 합니다. 현주가 거리의 남성들을 증오하지 못하고 허탈한 미소를 흘리는 이유랄까요. 이런 점에서 그녀의 야행은 국가 주도 집단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수단이며, 똑바로 보고 똑바로 보여지기 위한 개인의 몸부림입니다.
결국 현주는 걷고 걸어서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까요?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소공녀」가 생각납니다. 이 영화는 담배와 위스키 값을 대기 위해 셋방에서 나와 방황하는 ‘미소’라는 여성의 이야기인데요. 거주공간, 관계의 양상, 서울의 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미소의 행적을 따라가는데, 그녀의 방황이 꼭 1970년대의 현주의 방황을 생각나게 합니다. 원작 소설 「야행」에서 현주는 자신의 욕구를 “무모하고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정의하는데 미소의 방황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이렇게 보자니 현주는 아직 원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여자들은 여전히 서울의 밤과 스크린 안을 방황하고 있으니까요.
참고문헌
박진영.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야행(夜行)’ 모티프와 ‘밤 산책자’ 연구 : 김승옥의 「야행」· 황정은의 「야행」· 편혜영의 「야행」을 대상으로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2장
야행.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3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