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철학과인데 나를 어떻게 먹여살리니?
연애와 사랑의 좌절
<바보들의 행진>은 기본적으로 청춘 멜로 장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애정을 키우며 영화가 전개되는거죠. 그런데 한국 영화에서 주인공의 멜로는 그 자체로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이 비극적 결말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근원적 결함을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하는데, 한국의 멜로 영화는 사랑에 하마르티아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미몽>이나 <자유부인>에서는 관계의 부덕함, 즉 불륜을 말미암아 사랑이 실패하고 맙니다. 한편 <초우>에서 사랑이 실패하는 근본적 원인은 부정직함,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이 하마르티아는 개인의 잘못인가 하면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몽>과 <자유부인>의 부덕함은 가부장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받은 여성들의 반동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초우>의 주인공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이유도, 세탁소 할머니 말마따나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세상’이 주인공들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하마르티아는 온전히 내재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결함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결함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주인공들에게 나타나는 무계획함, 성급함, 무지함 등도 모두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내재적 요소라는 점에서 주인공들의 하마르티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마르티아는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면 역시 사회를 떠올리게 됩니다. 70년대의 대한민국은 유신체제라는 정치적 맥락 하에 청년들을 억압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이라는 운명공동체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했고, 이것에 대해 지식인층은 데모라는 또 다른 집단행위로 대항했죠. 집단적 행동에 대해 역설하는 과정에서 가장 개인적인 경험인 사랑과 연애감정에 대한 논의는 축소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청년들은 연애마저도 단체로 ‘단체미팅’을 통해서 하죠. 그런데 두 남녀 주인공만이 식당 밖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단체성에 반기를 듭니다. 그리고 단체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개인적인 연애경험 사이에서 요구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의 간극이 주인공의 우울을 자극합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떨어지게 되는 이유 역시 병태가 군대라는 국가적 공동체에 속하게 되기 때문인 점을 고려하면, 주인공의 좌절은 단체에 대한 요구에서 자아의 경험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증상이라고 분석해볼 수 있죠.
시인 추방론과 이방인
병태와 영철은 철학과입니다. 영화에서 그들이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에 대한 강의를 듣는 장면이 나와요. 시인은 플라톤 철학의 중심개념인 이데아를 모방하려는 존재인데,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은 이데아를 모방함으로써 시민을 현혹시키는 존재일 뿐이므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시인추방론은 병태와 영철의 행동양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병태와 영철은 이데아에 대한 추구와 좌절을 거듭하는 시인적인 고뇌를 거듭하는 인물들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데아는 ‘신화 속의 고래’라는 막연한 행복과 성공입니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성격은 당구장에서 신문팔이 소년의 양심을 시험하는 병태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인물들도 언급했듯이, 병태는 ‘고도를 기다라며’ 속 인물들처럼 신문팔이 소년을 기다립니다. 고도는 구원자, 희망을 뜻하는 인물로 이데아적인 존재라는 측면에서 플라톤에 대한 강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고도의 대치물인 신문팔이 소년이 돌아왔을 때 병태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네가 우리들 모두보다 형’이라고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신문팔이 소년의 일화는 병태가 생각하는 이상국가에 대한 작은 모방일 뿐이며 이것은 사회적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신문팔이 소년은 돌아왔지만 1970년대는 고도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실존적 부조리는 영화 내내 이상주의자인 두 남성인물을 괴롭히며, 한 명은 군대라는 국가 체제에 종속되고, 한 명은 자살을 통한 해방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죠. 이렇듯 이상주의자가 설 곳이 없고 그들의 추방을 이야기하는 국가는 두 인물의 좌절의 원인이 됩니다.
한편 영자는 불문학과입니다. 그녀의 정서는 그녀가 과제로 읽은 -아니면 읽어야 했던-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제목을 닮았습니다. 그녀는 겉도는 ‘이방인’입니다. 영자는 일면 제멋대로이고 발랄한 여대생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함으로써 작품의 멜로드라마적 성격을 떠받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영자는 교수를 속이고 병태를 속이고,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연극에 참여하는 등 속임수에 익숙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우울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 역시 영화의 표현을 통해 제시됩니다. 연극이 끝난 후 분장실에서 홀로 울고 있는 장면이 그렇죠. 이 장면은 영자가 사람들 앞에서는 배우처럼 연기와 거짓말로 스스로 포장하는 반면 내면에 우울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중적 인물상에 대한 가설을 제시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 앞에서의 발랄한 모습도 공허한 데가 있습니다.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장면이 많음에도 무리 지어 다니지 못하고 텅 빈 장소를 배경으로 홀로 등장할 때가 많다는 점을 예시로 들 수 있죠.
전통사회의 가치관과 전후 근대의 가치관 사이에서 가부장제도의 존속이 모순에 부딪히면서, 여성들은 이 모순적인 가치관에 이중으로 억압당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 와중에 개성을 가진 인격체로서의 개인 여성은 축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자는 개인적인 개성과 체제 속 역할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여성의 고뇌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별역할과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성은 70년대 유신체제라는 정치적 맥락 아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 중간 어디쯤에서 겉도는 ‘이방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영자는 한없이 순진무구해 보이다가도 이런 저런 요령을 부려서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너는 철학과인데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리냐”며 병태에게 혹독한 소리를 하다가도 기차에 탄 그에게 발돋움하여 키스를 건넵니다. 그러나 ‘뫼르소의 심리상태를 논하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듯이, 영자는 자기의 심리상태를 스스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좌절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시대로부터 발현하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주는 우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과 유리된 인물은 끊임 없는 질문을 마주합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원하지?” 도무지 잡히지 않는 자신의 욕망, 그 ‘신화 속의 고래’를 찾아 헤매는 시인과 이방인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무엇을 찾으려 이렇게 슬퍼하고 있나요?
참고문헌
바보들의 행진.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2898
이순진. (2006). 조선/한국 영화에서 신파 또는 멜로드라마의 계보학. 커뮤니케이션북스, 3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