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부산으로 오는 저녁 마지막 비행기가 이륙했다. 짧지만 인생 한동안이나마 꾸준히 오갔던 첫 답사지를 떠나오는 마음이 헛헛해 비행기 창밖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제주 바다는 마지막까지 내게 놀라운 풍경을 선물해주었다. 놀랍게도 오징어배들이 환하게 불을 켠 채 나를 배웅해주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경계가 사라진 시간이었다. 오징어배는 곧 별이었고, 별은 곧 오징어배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환상에 사로잡인 마음은 울고 싶어했다. 나는 제주도와 그 섬을 살아가는 수많은 삶에게 조심히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절친한 친구와 함께 한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답사를 시작하던 4월과 다르게 해가 제법 짧아져 있었다. 바다는 곧 침묵같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헤드셋에서는 <시월애> 메인 테마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답사는 정말 힘들었다.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월급에 연연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불과 넉 달만에 절감했다. 모아놓은 돈이 말라가면서 내 마음은 자주 지옥을 오갔다. 다시는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퇴사했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나라일터를 뒤적거렸다. 스스로를 저주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수시로 울었고 불안했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어디다 티낼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속절없이 아내에게 안겼다. 아내는 아이같은 남편을 말 없이 꼭 안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아내 품에서 충분히 위로받고 이내 정신을 차려 마음을 다잡았다. 영화를 보고 답사를 다니며 다시 글을 썼다. 제주도는 언제든 내게 사색할 공간을 필요한 만큼 허락해주었고, 그곳에서 촬영한 영화들은 아주 오래 사귄 고향 친구처럼 나를 다독여주었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퇴사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단지 지쳐버린 마음을 숨기고 대책없이 영화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내와 제주도, 한국영화가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 4인 5각으로 함께 이 책을 써주었다고 생각한다. 더없이 미안하고 감사하다.
촬영지 답사는 영화 촬영과도 많이 닮은 것 같다. 우선 체력적으로 무척 힘들다. 한창 제주도를 답사하던 때 내 체중은 아내가 안쓰러워 할 정도로 급격히 빠졌었다. 오른쪽 어깨쭉지엔 스트레스 때문인지 원인 모를 농양이 나기도 했다. 그 농양에서 피고름이 자꾸 나와 숙소 휴지 한 통 절반을 다 써야 했을 정도였다. 사전조사가 중요하다는 점도 영화 제작과 비슷하다.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을 잘 해야 프로덕션(Production)이 잘 되는 것처럼, 촬영지 답사 역시 미리 충분한 정보를 조사하지 않으면 헛걸음하기가 예사다. 시간과 돈처럼 물리적인 비용도 많이 든다. 이 과정을 영화적 동지 없이 혼자서 버텨내기란 생각보다 쓸쓸하고 외로운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살인의보이' 형님들께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 가정을 꾸리신 상현 선배와 형수님이다. 이 글이 영화 엔딩크레딧이라면, '살보' 형님들과 상현 선배 부부께서는 스페셜 땡스 투에 꼭 이름을 올리셔야 하는 분들이다.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한국영화가 예전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없고, 티켓값은 터무니없이 비싸며 요새 개봉하는 한국영화는 하나같이 재미없다고들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못해도 일주일에 꼭 한 편은 영화를 보던 나도 어느샌가 영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영화를 전공으로 공부한 씨네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십대 때부터 내 감성을 키워 준 많은 한국영화들이 아직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살다가 언젠가 영화를 아주 보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순수하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수많은 한국영화들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는 하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마음으로 썼다. 놀랍게도 책을 쓰면서 다시 영화가 좋아졌고,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나는 한국영화 산업에 종사한 적도 발전에 기여한 것도 없다. 그래도 늘 한국영화가 잘 됐으면 하면서 마음 속으로 응원하고 기도하는 영원한 씨네필이다.
이 책에서는 제주도를 거쳐간 19편의 한국영화를 소개했다. 영화 속에는 4.3 사건으로 고통받는 인물들이 많았다. <지슬>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물론, <천년학>과 <빛나는 순간> 그리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내 이름은> 등 많은 영화에서 4.3을 주인공에게 투영했다. <천년학>에서 4.3은 송화(오정해)가 고향이던 제주도를 떠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였다. <빛나는 순간>에서는 진옥(고두심)이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트라우마가 4.3으로부터 튄 피로 얼룩져 있었다. <지슬>과 <수프와 이데올로기> 두 편을 제외하면 다른 두 작품에서는 4.3을 아주 얕고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다루었다고 본다. 다만 그 깊이가 충분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4.3으로 상처받은 제주도와 도민들을 어루만지려는 여리고 어여쁜 마음이 오래 전부터 한국영화에 있어 왔음을 영화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책에서 전격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한 가정을 관통한 흔적을 살펴 보여주던 양영희 감독의 이른바 '가족 3부작'을 완결하는 작품이다. 답사와 별개로 감상을 권하고 싶다.
답사 마지막 날 아침 나는 4.3 평화기념관부터 들렀다. 이곳이 영화 촬영지냐 하면 물론 여기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촬영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다만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답사와는 별개로 4.3 평화기념관만큼은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부생들과 함께 갔던 곳이라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4.3은 실제와 너무 달랐다. 생각보다 훨씬 끔찍했고 모순적이었다. 미군이 4.3에 그렇게 깊이 개입한 줄도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줄 몰랐다. 4.3 평화기념관에는 영화 <내 이름은> 제작비 모금을 독려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난 그 후원 계좌에 돈 몇 푼 보내는 것으로 얄팍한 지성 수준을 값싸게 용서받으려고 했다.
목차에서 빠졌어도 추천하는 영화는 한 편 더 있다. 한국영화는 제주도를 배경 삼을 때 유독 해녀를 자주 등장시켰다. <이어도>와 <인어공주>, <계춘할망>, <빛나는 순간> 등 많은 영화들이 극중에서 해녀의 삶을 죽음과 자주 교차시켰다.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이들 중 어느 작품 하나 해녀들의 삶에 깊이 천착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수 킴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을 이 책에서 꼭 언급하고 싶었다. 문제는 이 영화 촬영지를 여행 코스로 추천할 수 있느냐였다. 오랜 고민 끝에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독자들께서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다. 이외에 제주에서 촬영한 작품임에도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작품성이나 대중성 같은 나름의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제주도에서 촬영한 작품들을 가능한 모두 다루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오로지 내 공부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부족함에 있다. 너른 양해를 구한다.
제주도에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지나갔고, 많은 작품들이 여전히 제작되고 있다. 다만 이 작품들을 관광 산업으로까지 연결하려는 지자체나 정부 기관의 대비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아예 출입이 어려운 촬영지들도 있었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것 같은 곳들도 있었다. 영화 촬영지임을 알리려는 노력에도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대체로 아주 형식적인 기념비 하나 두었거나 재미없는 설명을 늘어놓고 있으며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 사람이라면 수학여행으로도 안 가고 싶던 국립중앙박물관이 느닷없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으로 미어 터진다고 하는 놀라운 시대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K-Culture 또는 K-Contents 라고 불리는 시대는 언제라도 막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늦는 법이다. 미리 대비하지 못했으면 부지런히 따라잡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영화진흥위원회도 그동안 해오던 보수적인 업무 관행을 과감히 깨부수고, 젊고 참신한 감각으로 K-Cinema 촬영지들을 현대 문화 유산으로 개발하여 관광 자원으로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한다.
다음 답사지는 나의 고향 부산이다. 이제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이방인의 눈으로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 이공이오공구공칠.
끝.
<영화가 지나간 곳에서 - 제주>
영화(19편)
이어도, 건축학개론, 이장호의 외인구단, 연리지, 화엄경
인어공주, 시월애, 낙원의 밤, 애마부인 2, 연풍연가
이재수의 난, 지슬, 빛나는 순간, 계춘할망, 각설탕
천년학,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늑대소년, 쉬리
촬영지(29곳)
차귀도, 카페 서연의집, 성산일출봉, 천진항, 우도봉
산호사해변, 별방진성, 함덕대박횟집,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 산굼부리
중문해수욕장, 송당승마장, 만장굴, 아부오름, 제주민속촌
성읍민속마을, 제주전통초가마을, 용눈이오름, 도툴굴, 큰넓궤
신천목장, 천아오름, 새별오름, 귀덕1리항, 귀덕화사
금능해수욕장, 성읍승마장, 물영아리오름, 쉬리의언덕
식당(11곳)
섭지코지 해녀밥상, 섭지 해녀의집, 함덕대박횟집,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 푸딩푸딩
동문시장 골목식당, 메밀밭에가시리, 한라산아래첫마을, 정의고을 메밀꿩칼국수, 연정식당
제주동백을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