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소년>
영화 <늑대소년>(조성희, 2013)은 아주 예쁜 동화 한 편이다. 소녀 순이(박보영)는 건강이 좋지 않다. 학교도 그만 둔 채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로 이사했다. 순이는 몰랐겠지만 이곳엔 이름도 없이 버려지다시피 한 소년 철수(송중기)가 있다. 야생으로 살아온 인생에서 순이는 철수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이었다. 순이는 씻지도 먹지도 배우지도 않은 철수에게 예절과 글부터 가르쳤다. 철수는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과, 무엇보다 씻겨 놓으니 빛나는 꽃미모로 소녀에게 화답했다. 서로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순이는 태생을 의심받는 철수가 말 못한다는 이유로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언제라도 그를 감쌌다. 힘이 센 철수는 순이를 위협하는 모든 물리력에 맞섰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소설가 황순원의 대표작 '소나기'와 고전영화 <미녀와 야수>(게리 트러스데일, 커크 와이즈, 1991)가 동시에 생각나는 설정이다.
물영아리오름은 <늑대소년> 촬영지이면서 영화의 내용과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곳이다.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맑음, 생생한 날것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영화와 쏙 닮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안내소까지 걸어가면 곧장 목초지가 펼쳐진다. 오름 경사를 뒤에 두고 펼쳐진 목초지는 이슬을 머금어 영롱하고 몽환적이다. 블로그를 찾아보다 보면 영화를 본 분들 중에서 이 목초지를 촬영지로 믿는 분들도 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곳이다. 딱 한 그루 나무만 남겨둔 목초지는 어림잡아 보아도 축구장 하나 정도 규모쯤 되어 보인다. 극중 순수한 영혼들이 마음껏 뛰노는 장면을 촬영하고도 남을 곳이다. 영화 속 공간과 닮기도 닮았다. 하지만 영화 속 목초지는 물영아리오름이 아니다. 오름 중턱쯤은 올라야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속 장면을 알아챌 수 있다.
물영아리오름을 오르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오름 정상으로 향하는 난이도를 낮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름 중간을 가로지르는 계단인데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후배가 제주도로 답사를 온다며 회사에 하루 연차까지 낸 대학 선배가 감사하게도 일일 가이드를 자처하고는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는 자기를 신경쓰지 말고 충분히 시간을 쓰라고 했지만, 그래도 가급적 빨리 차로 복귀하는 편이 나로서도 좋았다. 마침 소나기 예보도 있는 날이었다. 내려올 땐 능선을 타기로 하고, 호기롭게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나보다 조금 앞서 걷던 한 분은 한참 위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계단을 도로 내려가버렸다. 능선 쪽으로 마음을 바꿔먹은 것 같았다.
난이도로만 보면 그 분 쪽이 훨씬 현명하다. 계단길은 경사도 급한데 폭도 넓지 않아서 일단 한 번 오르기 시작하면 마땅히 잠시 쉴 만한 곳도 거의 없다. 오랜 조기축구와 계단 운동으로 허벅지를 꽤 단련해왔는데도 쉬지 않고 한 번에 다 오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계단이 얼마나 더 남았으면 나도 그만 포기해버렸을까. 계단은 모두 783개였다. 20개를 대략 건물 한 층이라고 보면 거의 40층 높이였다. 이쯤 올라오면 대개 다른 오름에서는 멋진 풍경을 보상으로 주는데 물영아리오름은 그렇지도 않다. 계단 주위엔 키 큰 삼나무들이 빼곡해서 좀처럼 뭐가 내려다보이질 않는다. 아침 운동이라 생각하면 건강에야 좋겠지만 고통에 비하면 산 오르는 재미는 떨어진다 생각할 수도 있다. 커플로 이곳을 왔거나, 멋진 풍경을 기대했거나, 특히 보행약자를 동반한 일행들이 계단 코스를 골랐다가는 종종 완등을 포기하고 하산한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가급적 포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물영아리오름은 꼭대기에 아주 특별한 선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정상에는 뜻밖에 멋진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2005년엔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2006년엔 제주도에서는 최초로 람사르(ramsar) 습지로 지정되었다. 화구라고 모두 습지가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에는 400개 가까운 오름이 있지만 이중 화구에 습지가 있는 오름은 단 9개 뿐이다.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화구의 사면 경사다. 물영아리오름 정상부 화구는 워낙 깊고 급해 동물 사체와 낙엽, 나뭇가지 등이 굴러 떨어지기 쉬운데 이렇게 오랫동안 유기물들이 퇴적된 결과로 깊이 10m가 넘는 습지가 만들어졌다.
꼭대기 데크 건너편은 TV에서 열대우림이라고 소개하던 동남아 어느 곳처럼 질서 없이 마구 우거져 있었다. 수초가 무성한 습지 곳곳엔 물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겨울철 언 땅 위에 비가 쏟아지면 이곳에도 백록담 천지처럼 물이 고인다고 한다. 나는 고대 지구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현생 인류의 기분으로 한참동안이나 정상을 떠나지 못했다. 운이 좋으면 이곳에서 해설사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다. 환경부 산하기관인 영산강유역환경청 소속 해설사 선생님께서 혼자 정상까지 씩씩하게 올라 온 용기가 가상하다며 습지와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이것저것 설명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본 적 없던 풍경을 보고 글감까지 두둑히 얻어 하산할 수 있었다. 물영아리오름 정상은 영화 촬영지 답사길에서 만난 제주도 중에서 가장 이국적인 곳이다. 그러니 기왕에 마음 먹고 시작한 길이라면 꼭대기까지 힘껏 올라보는 게 좋겠다.
능선을 따라 산을 내려가면 오를 때는 힘들어서 보이지 않았던 삼나무숲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영화에서 순이와 철수가 눈물로 이별하던 곳이 눈에 들어온다. <늑대소년> 촬영지는 바로 이곳이다.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순이와 철수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철수에게 남다른 출생 배경이 있기 때문인데, 그들을 뒤쫓는 군인과 마을 사람들은 목소리만 들릴 뿐 삼나무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삼나무가 이들을 잠시 가려주는 동안 순이는 철수에게 모진 말을 해대며 헤어지자고 했다. 순이 입장에서는 그것이 철수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반면 그렇게 따르던 순이에게 느닷없이 뺨을 맞은 철수는, 잘못 하나 한 것 없이 이곳에서 생이별까지 감내해야 했다. 영화를 떠올리며 잠시 숨을 고르며 서 있자니 삼나무숲 깊숙한 곳 어디서 억울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설령 정말 늑대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제주도에는 물영아리오름 말고도 <늑대소년> 촬영지들이 더 있다. 그 중 한 곳은 <지슬> 촬영지이기도 한 용눈이오름이다. 영화에서는 가만히 공부 잘 하고 있던 철수를 꼬셔내어 순이가 바람쐬러 함께 올라갔던 곳이다. 다른 한 곳은 성읍승마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이와 철수가 야구를 하고 달리기를 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는 영화 팬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성읍승마장은 2024년 12월부터 사실상 폐업에 가까운 휴업을 이어가고 있다. 실제와 영화 속 장면을 비교해볼 수 없게 되었다. 포털 사이트에 휴업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나도 헛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주도였음직한 장면을 영화에서 몇 장면 골라내어 추려 본다면, 순이와 철수가 달리기 내기를 하던 곳이 제일 유력하다고 짐작해볼 수는 있다.
<늑대소년>의 극중 배경은 강원도다. 그런데 실제로는 강원도가 아닌 전주에 있는 양묘장을 빌려 순이 집을 세트로 짓고 주 촬영지로 사용했다. 예상할 만한 이유가 있다. <늑대소년>은 2012년 겨울부터 촬영했다. 그 기간이라면 강원도에서는 눈과 비를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조감독 한경훈이 쓴 제작후기를 보면 제작진은 통제할 수 없는 날씨 변수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눈을 돌려 전주와 고창, 제주도 일부를 촬영지로 찾아내었다.
산을 내려오니 어느덧 하늘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소나기 예보가 틀리지 않은 모양인지 곧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다음 목적지는 사진이 중요해 날씨와 타협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서둘러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주차장에는 올라갈 땐 없던 차들이 꽤 많았다. 그중 버스 한 대에는 '촬영' 두 글자가 크게 박혀 있었고, 소품용 차량을 수송하는 트레일러도 와 있었다. 그때 난 어쩌면 물영아리오름 답사도 이번 한 번으로 마치지는 않을 운명이겠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공이오공팔이구
✦ 물영아리오름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 1-1
- 주차: 전용 주차장 있음 (무료)
- 소요시간: 783 계단길로는 왕복 약 50분, 능선길로는 넉넉히 1시간 30분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맑고 순수하고 깨끗한 동화 그 자체
- 접근성 ★★☆
주변엔 골프장 말고 물 파는 곳도 없음
- 풍경 & 자연 ★★★★★
오름 정상에 숨겨놓은 고대 원시림
- 난이도 ★★★★
철수도 포기해버렸을 계단길
- 감성 & 사색 ★★★★★
제주 오름 중 단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물영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