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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의언덕

<쉬리>

by 신동욱

답사 내도록 오지 않던 비가 내렸다. 하필 제주도 영화촬영지 답사를 마치기까지 딱 한 군데 밖에 남지 않아 조바심이 일었다. '한라산아래첫마을' 제주민속촌점에서 선배와 함께 비비작작면을 먹으며 시간을 끌어보았지만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씨는 거스르지 못할 일이고, 예정된 촬영지는 생략할 수 없었다. 투정을 그치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중문까지 40분이라던 길은 두 배나 걸렸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앞섰던 탓인지.


제주편 답사기 마무리할 곳을 쉬리의언덕으로 정하기까지는 고민이 많았다. 처음 계획에서 쉬리의언덕은 답사지 리스트에 아예 빠져 있었던 곳이다. 쉬리의언덕이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제주도를 올 한 해에만 네 번이나 오가면서 이곳은 그저 지나쳐오기만 했었다. 중문 색달해수욕장까지 왔었어도 <애마부인 2>을 찍었던 백사장 쪽으로만 내려갔을 뿐이었다. <쉬리>(강제규, 1999)가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영화는 촬영 대부분을 서울에서 진행했다. 반면 제주도 촬영지는 이곳 딱 한 군데다. 그래서 나는 <쉬리> 촬영지 소개라면 제주편이 아닌 서울편에서가 더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었다.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꾼 이유가 있다. 우선 쉬리의언덕은 영화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후경 정도가 아니다. 극중 유중원(한석규)이 결혼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사랑한 이명현(김윤진)이라는 인물은 사실은 북한에서 남파한 공작원이었다. 그녀가 제주도 소재 요양원에서 선천성 면역기능 저하증으로 장기 요양중인 이명현의 신분을 도용하고 성형까지 한 채 중원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명현을 의심없이 사랑한 대가로 중원은 절친한 친구인 이장길(송강호)로부터도 의심을 샀다. 쉬리의언덕은 '신분을 세탁 당한' 명현을 만나기 위해 중원이 찾아왔던 곳이다. 이곳에서 중원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중원이 명현을 다시 찾아갔지만, 명현과 대치하던 장길이 이미 박무영(최민식)의 총에 맞은 다음이었다. 인물들이 본격적인 대결 구도에 나서는 것이 이때부터다.


영화 마지막 엔딩 장면을 촬영한 곳도 이곳이다. 우정과 사랑을 잃은 중원이 'When I Dream'을 들으며 바다를 마주하는 장면이다. 중원이 명현을 처음 만났던 곳보다는 훨씬 바닷가와 가까운 쪽 벤치이다. 요컨대 쉬리의언덕은 극중 서사에서도, 중원의 감정에서도 중요한 반전을 제공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쓸쓸한 여운을 남겨주는 가슴 시린 곳이다. 청담동에 있던 수족관을 포함하여 서울에 있던 <쉬리> 촬영지들이 대부분 사라진 데 반해, 이곳은 이름마저 영화 제목을 빌려 아직 남아있기까지 하다. 두 번은 몰라도 한 번은 가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차에서 내리니 비는커녕 한여름 동남아 날씨였다. 제주 날씨 변덕 심하다는 말을 절감할 수 있었다. 비보다는 더위가 차라리 다행이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지도 검색 기능에서 위치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한 번에 쉬리의언덕을 찾아가기란 의외로 쉽지 않았다. 핸드폰을 보며 호기롭게 파르나스호텔과 가까운 해변 쪽으로 걸어 내려간 나는 예상과 다른 바다 전망에 당황했다. 바다는 있는데 벤치가 보이지 않았다. 정확한 장소를 찾아준 건 '일일 가이드' 선배였다. 선배는 길을 헤매는 나를 부르더니 신라호텔 직원주차장으로 보이는 작은 주차장 앞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걸어서 차량 차단기를 지나자마자 곧장 쉬리의언덕이었다. 괜히 앞장 서 걸었던 걸음이 무안했고, 영화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길눈까지 밝은 제주 현지인 선배가 든든했다. 처음 가시는 분께 조언을 드리자면, 파르나스호텔 정문 조금 못 간 곳에 주차장 입구가 하나 있다. 그 맞은편에 작은 주차장이 하나 더 있는데 이곳 차량 차단기를 지나서 가는 길이 가장 가깝다.


잘못 들었던 길. 옳은 길은 바로 위에 있었다


난 영화를 보고 나서 꼭 한 가지가 궁금했다. 쉬리의언덕에서 촬영한 장면을 생각해보면, 바다가 보이는 벤치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대부분 서울에서 촬영하고는 딱 이 장면 하나를 위해 반드시 제주도까지 와야 했을 이유를 처음에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선배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일리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 신라호텔은 다른 호텔처럼 높거나 화려하지는 않기 때문에, 후경에 걸려 있으면 실제로 요양원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바다가 보이는 벤치까지 갖고 있으니까 이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화면 속 배경에 걸릴 신라호텔까지를 고려한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쉬리 벤치 쪽에서 바라본 신라호텔은 외벽 색도 하얀 게 정말 고급 요양 시설 같은 느낌을 주었다.

벤치 쪽에서 바라본 제주 신라호텔

나는 곧 다른 가능성 하나를 마저 찾아냈다. 무엇보다 <쉬리>는 삼성 자본으로 제작한 영화다.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은 <쉬리> 총 제작비 31억 원 중 27억 원을 투자했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가 10억 원 안팎이던 시절이다. IMF 여파로 이미 해체가 결정된 삼성영상사업단 입장에서는 그와중에 <쉬리>에 큰 돈을 들였으니 손익분기를 꼭 넘겨야 했을 것이다. 1990년에 문을 연 제주 신라호텔이 마침 영화에 필요한 풍경을 제공해주는 곳이라면, 삼성영상제작단으로서는 제작진에게 영화 촬영지로 추천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호텔신라는 삼성그룹의 계열사다. <쉬리>가 흥행한다면 덩달아 제주 신라호텔도 덕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삼성영상제작단은 영화 상영 이후까지를 생각해 이곳을 제작진에게 촬영지로 제공하고 '쉬리의언덕'이라고 이름 붙여 홍보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관광공사가 일본교통공사와 함께 <쉬리> 촬영지 관광상품을 기획하기도 했다. 제작사와 제작진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다만 쉬리의언덕 보다는 '명현의언덕'이 조금 더 서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건축학개론>을 위해 위미리에 지어 올린 집을 '건축학개론의 집'이라 하지 않고 '서연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영화 제목이었던 <쉬리>를 대놓고 장소 이름으로 사용한 건 그 영화가 아무리 <쉬리>라도 조금은 쑥스러운 느낌이다. 쉬리의언덕을 운영하고 관리할 권한이 있다면, 나는 영화 속 CD 플레이어를 벤치 아래에 보이지 않게 붙여두고 헤드셋을 설치해두고 싶다. <쉬리>를 기억하는 누구라도 벤치에 앉아서 'When I Dream'을 들으면, 세기말 한국영화가 가지고 있던 감성과 제주 바다를 함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비바람 강한 제주도 남쪽 바다에 키싱구라미 어항 설치까지는 좀 지나친 일이더라도 말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던 푸른 바다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바다 위에 이번엔 제주편 답사기 엔딩 크레딧이 흐르고 있었다. 무심하게 CD 플레이어 하나 벤치에 둘 수만 있다면, 제주 신라호텔의 홍보력에 힘입어 영화 <쉬리>도 오랫동안 영화 팬들의 마음에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모쪼록 한국영화 천만 관객 시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한국형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 <쉬리>가 제주 바다에서라도 긴 생명력을 유지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제주도를 떠나기 전 명현이 살았던 집에 들렀다. 엄밀히 영화 촬영지는 아닌데, 종원이 정보 시스템을 이용해 명현의 인적사항을 찾아내는 장면에서 주소를 알게 된 나는 어쩐지 이곳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엉뚱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제주도 제주시 이도동 275번지 36-7.' 행정구역상 이곳은 도남동에 있는 제스코마트 본점과 파리바게뜨 제주제스코본점 사이 쯤이다. 영화를 다 찍고 난 강제규 감독은 여기가 어딘지 한 번 와봤을까 싶은 곳이었다. 명현이 이곳에서 제주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는 디테일은 정말 인정이다. 둘은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이공이오공팔삼일.


✦ 쉬리의언덕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3039-3 제주신라호텔 내

- 주차: 파르나스호텔 제주 3주차장

- 지름길: 주차장 진출입로 맞은편 신라호텔 쪽 주차장 차단기 통과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쉬리> 엔딩 크레딧이 바로 보이는 푸른 바다

- 접근성 ★★★★

호텔 인근이라 교통 편하지만 초행자는 입구 찾기에 다소 헤맬 수 있음

- 풍경 & 자연 ★★★★☆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중문 색달해수욕장과 제주 바다

- 난이도 ☆

고생 안 하고 한 번에 잘 찾기만 하면

- 감성 & 사색 ★★★★★

플레이리스트는 무조건 ‘When I Dream’ 한 곡 반복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Carol Kidd 'When I Dream'(영화 <쉬리> 삽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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