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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콘텐츠진흥원, 올레리조트, 귀덕화사, 금능해수욕장

<잘 알지도 못하면서>

by 신동욱

아내는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순수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여행지는 어딜 데려가더라도 항상 아기처럼 좋아하고, 예쁜 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몽땅 사진을 찍기 전에는 자리를 뜨는 법이 없으며 궁금한 게 생기면 그게 누구더라도 알 만한 사람을 찾아 서슴없이 물어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는 생각이나 말이 꼭 십대 소녀나 다름 없이 맑아서, 딸 둔 적도 없으면서 가끔 딸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답사에도 아내는 회사에 연차까지 내고 졸졸 따라왔다. 상투적이지만 아내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은 즐겁고 행복하다는 말 외에 다르게 표현할 수 없다. 금능해수욕장에는 초여름에도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저녁 장사하는 가게 닫힌 문 앞에 적당히 차를 대놓고 아내 손을 잡았다.


백사장과 인도 사이 경계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아내 손 잡고 평생 답사 다니며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이 오른다. 그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책부터 잘 써야 할 것이었다. 내 머릿속을 알 리 없는 아내는 금능해수욕장 바다 풍경에 신나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가 궁금한 게 생긴 모양이다.


내따랑, 저기 앞에 있는 섬 이름이 뭐예요?
금능해수욕장에서 보이는 비양도

수영 잘하는 사람이면 헤엄쳐 갈 수도 있을 것처럼 해수욕장과 가까운 비양도가 아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이내 비양도도 한 번 가보자고 한다. 아내는 특히 여행할 때 아주 즉흥적이다. 반면 철저히 계획을 세워 다니기 때문에 가뜩이나 답사길이 바빴던 나는 비양도에서 촬영한 영화는 없을 텐데, 하면서 속삭이듯 말끝을 흐렸다. 실은 비양도도 고현정이 출연했던 드라마 '봄날' 촬영지이고, 송일곤 감독이 영화 <깃>(2005)을 촬영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만 <깃>은 아직 구해 보지 못했고, 이 원고가 드라마 촬영지를 소개하자는 기획이 아니니만큼 계획에 없이 비양도를 들어가기보다는 얼른 금능해수욕장에서의 답사부터 마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한 번은 비양도에 가게 될 운명임은 직감했다. 아내가 원하면 그게 무엇이든 해주는 것이 결혼 3년차 유부남의 요령이면서 즐거움이다.

아내는 사진 찍고 나는 글 쓰고. 답사만 하며 평생 살 수는 없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홍상수, 2009)는 그저 그런 영화감독 경남(김태우)이 제천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 받았다가, 강연을 위해 제주도를 방문하는 동선을 따라간다. 금능해수욕장은 영화 엔딩씬을 촬영한 곳이다. 극중 영화감독인 경남과 고순(고현정)이 마지막 대화를 나누던 자리를 비슷하게 찾아 앉았다.


"주인공이지만,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위트 있게 표현한 문장이다. 그는 영화 대본을 촬영 당일 아침에 쓰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배우들은 촬영 당일까지는 대사 한 줄은커녕 내용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때 대본에는 배우의 당일 컨디션과 날씨까지 반영되는 경우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도 나왔던 배우 유준상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털어놓은 비화가 있다. <하하하>(2010) 촬영 중 유준상이 넘어졌는데, 홍상수 감독이 이 컷을 그대로 살리고는 다음 날 한의원에서 영화를 찍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기획하는 영화들과 아예 다른 제작 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대책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즉흥적 영감만이 홍상수 감독의 유일한 대책인 것 같다. 배우에게서 날것처럼 생생한 연기를 끌어내고, 현장의 공기를 작품에 반영하기 위한 독특한 연출법이다.


경남이 제주도로 흘러 들어온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학도로 살아온 내 이력을 어느 정도 밝히는 편이 좋겠다. 꽤 이름 난 영화제에서는 전국 영화학도들에게 씨네필 배지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이 배지만 있으면 학생들은 영화제 기간 내도록 하루에 3~4편까지 영화 티켓을 발권할 수 있다. 씨네필들에게만 할당되어 있는 좌석이 있어서 일반 예매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티켓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전체 좌석에 비하면 그 비율이 극히 적어서, 인기 있는 작품일수록 경쟁이 치열하다.


나도 이 '피'케팅 대열에 합류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온라인 예매에서 팔리지 않은 표만 현장 구매할 수 있지만 나땐 현장에서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단 영역 표시의 일종으로 돗자리가 필수다. 이 돗자리 위에 짐을 풀고 나서 뒷자리 일행에게 눈도장도 찍어 두어야 한다. 안 그러면 다음 날 날 밝아 줄 정리를 할 때 괜한 시비에 말려들 수도 있다. 한 사람이 돗자리를 펴면 취향 비슷한 몇몇이 전날 밤 10시부터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진을 치고 앉아서는 학과 선후배들과 소주 맥주에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밤을 지새우며 끝내 자리를 지켜낸다.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반드시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 영화제에서가 아니면 평생 못 볼 작품인데 어떡하겠는가.


밥, 술, 밥, 술. 그놈의 영화제 뒤풀이. 지긋지긋하게 사랑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스틸컷

문제는 다음 날이다. 이렇게 밤을 꼴딱 새고 표 넉 장을 손에 쥐고 나면 첫 타임 영화 상영이 곧이다. 희열은 잠시 뿐이다. 영화가 어지간히 재밌지 않고서야, 전날 밤샘 후유증을 이겨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꾸벅꾸벅 졸다 보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그렇게 오전 영화 한 편을 날리고 나면 점심시간이다. 이때 잠을 쫓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또 졸린 경우가 더 많다. 밤 샌 자의 컨디션은 보통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 그러면 또 슬슬 저녁 약속이나 잡아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서 정작 하루동안 제대로 보는 영화는 평균 한 편, 많아야 두 편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경남이 제천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후배 상용(공형진)을 만나 진탕 술을 먹고는 영화관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자는 모습은, 영화 전공자 관점에서는 과장 또는 극화가 아니라 극사실주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매번 그러는 건 물론 아니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경남은 제천에서의 심사 일정을 이렇게 망치고서 제주도로 흘러들었다. 번엔 제주영상위원회(현 제주콘텐츠진흥원)에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극중 경남의 동선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제주영상위원회에 출장 온 누구라도 정말 이대로 다닐 것 같은 루트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시작하여 제주영상위원회, 올레리조트, 강요배 화백 작업실인 귀덕화사와 금능해수욕장에 이르는 동선은 제주도로 치면 공항에서 출발해 서북부 해안을 그대로 따라 가는 코스다. 꼬일 일이 없는 동선이다. 마침 촬영지 중 한 곳인 올레리조트를 그대로 숙소로 예약하면, 정말로 극중 경남이 된 것만 같은 답사를 할 수 있다. 나는 홍상수 감독이 로케이션을 어떻게 구상했을지 조금 짐작할 있었다. 대본이 촬영 당일 아침에 나오면 로케이션 담당자로서는 그때부터서야 부랴부랴 촬영지를 섭외할 수 있었을 테니, 애초부터 전날 촬영지로부터 동선을 아주 멀게 잡을 수가 없기도 할 것이다.


강요배 화백 작업실은 <천년학> 촬영지인 귀덕1리항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이름도 '귀덕화사(歸德畵舍)'다. 극중에서 경남이 선배(문창길) 몰래 고순과 사랑을 나누려다 이웃 조각가(하정우)에게 낫으로 위협 당했던 그 집이 강 화백 작업실이다. 영화 마지막 극적 서사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곳이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주 촬영지 중에서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영화에서 작업실 내외를 비교적 세세히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어느 케이블 방송에서도 이곳을 소개한 적이 있어 장소를 특정하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아쉽게도 지역 예술인의 혼이 담긴 사유지를 함부로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주 촬영지 중 특별한 허가없이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은 올레리조트와 금능해수욕장 정도다. 올레리조트에 옛 친구들을 불러모아 소주 한 잔 하고 다음 날 금능해수욕장을 산책하며 해장하면 그 길이 바로 '구경남 로드' 아닐까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엔딩씬 촬영지 가까운 곳에서 투명 카약을 대여해주고 있었다.
금능해수욕장 전경

음악이나 음식이 그런 것처럼, 영화나 여행도 삶의 어느 시기에 스스로만이 가졌던 애틋한 기억과 정서를 쉽게 환기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물며 영화를 보고 떠난 촬영지 답사길에서야 시도때도 없이 옛날 생각이 올라온다. 한때 나에게도 고순과 상용이 곁에 있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주제로 쉬지 않고 떠들었고, 대화에 공백이 생기면 수시로 잔을 부딪혔다. 이제는 술 한 잔에 대학 시절 영화제를 추억하며 밤을 지새울 친구들이 몇 명 남지 않은 것 같다. 결혼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인맥이 한 번 정리된다고 하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입학할 때부터 영화에 조예가 깊던 동기 또는 선후배들은 현장을 몇 번 경험해보더니 대부분은 오히려 다른 길을 찾아나섰다. 정작 고등학생 땐 영화를 학문으로 공부하는 줄도 몰랐던 내가, 여태 영화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 길을 도모하고 있으니 사람 일이야말로 정말 잘 알지 못할 일이다.


고순이 상용이가 보고 싶다고 아내에게 느닷없이 말했다. 잠시 말뜻을 헤아리던 아내는, 앞으로 자기가 고순이 상용이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고순이 상용이가 되어 주겠다니, 영화 내용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내가 일단 내지른 장담이 귀여웠다. 이공이오공팔일삼




✦ 금능해수욕장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 2026

- 주차: 공영 주차장 무료 이용 가능

성수기 만차 우려, 한림공원 맞은편 협재해수욕장 주차장 활용 권장

- 레저: 스노클링, 바다 카약 등

- 편의시설: 야영장, 샤워실(온수) 등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경남과 고순이 헤어지던 곳엔 지긋지긋한 소주 대신 투명카약

- 교통 & 접근성 ★★★

초보운전자 성수기 주차 난이도 높음

- 풍경 & 자연 ★★★

홍상수 감독이 풍경 예뻐서 섭외한 로케이션은 아닐 것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산책이야 얼마든지, 해양 레저를 즐기겠다면 난이도 급상승

- 감성 & 사색 ★★★

사색하려면 금능해수욕장보다는 건너편 비양도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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