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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덕1리항, 새별오름

<천년학>

by 신동욱

**제주 남서쪽에서도 차는 다시 비좁은 해안 도로를 한 시간 남짓 내리달린 끝에, 초여름 해가 한창 쬐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목적지인 귀덕1리항으로 들어섰다. 나는 포구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협재와 애월 사이, 관광객 발길이 드문 포구에 어선들이 묵묵히 닻을 내리고 있다. 바쁜 걸음으로 답사를 몰아치다 이곳에서 한숨 돌려본다. 점심 배가 부른지 전날부터 일정에 동행하고 있는 아내가 조수석에서 졸고 있다.


사실 <천년학>(임권택, 2007) 촬영지 답사는 제주도에서보다 전남 장흥에서 시작하는 편이 더 낫다. 장흥은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비교적 후기 대표작에 속하는 작품들이 거쳐 간 소위 '임권택 로드'의 시작과 같은 곳이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세트도 장흥 회진면 선학동 마을에 있고, <천년학>을 포함하여 <축제>(1996), <서편제>(1993)등의 원작 소설을 쓴 이청준 작가가 태어난 곳도 장흥이다. 그래서 <천년학> 촬영지 답사는 제주도가 아닌 장흥에서 시작해서, 군산을 경유해 목포를 거쳐 배를 타고 제주도로 내려오면 딱 맞다.


나는 답사기 작업을 시작하면서 원고를 지역별로 묶을 것인지, 작품별로 묶을 것인지를 두고 한참 갈등했다. 작품별로 원고를 모으면 개별 영화 서사를 충실히 따라 다니며 주인공에게 깊이 이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 예산과 시간이 아주 충분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로서 아직 고정 수입이 없는 내가 그렇게까지 하기란 지나친 일이었다. 특정 지역에 갔을 때 해당 지역 촬영지들을 모두 돌고 오는 편이 예산과 시간 면에서 효율적이었다. <건축학개론> 원고를 쓸 때 갔던 제주를 <이어도> 때도, <지슬> 때도 매번 계속 가야 하는 건 물리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없이는 어려웠다. 그래서 <천년학> 답사에서 전남 장흥은 마치 마지막 한 입에 밀어넣기 위해 아끼는 반찬처럼 두고, 우선 제주도에 있는 <천년학> 촬영지부터 둘러보게 된 것이다.

선학동 나그네.jpeg <천년학> 원작 소설 '선학동 나그네'


포구에 서서 바다 쪽을 내다보면 영화 속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영화에서 동호는 가난이 지긋지긋해 고수 되기를 때려치우고 누이 송화(오정해)와 양아버지(임진택)에게서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 세월이 지나 다시 누이를 찾겠다며 배를 타고 들어와 이곳에 내렸었다. 동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포구와 가까운 포장마차에서 물컵째 소주를 받아 마시고는 곧장 누이의 행적부터 살폈다. 제주도는 극중 송화의 고향이다. 몽땅한 방파제와 거북등대가 동호 뒤에서 파도를 막아주고 있었다.


송화와 동호는 어쩌다가 제주도로 흘러 들었을까. 두 인물이 제주도로 간다는 내용은 영화의 원작 소설인 '선학동 나그네'에는 없던 설정이다. 소설에는 송화의 고향으로 짐작할 만한 곳도 없고, 따라서 그 고향이 제주도라는 설정도 없으며, 당연히 그녀가 4.3 사건으로부터 몸을 피해 제주도를 떠났다는 내용도 없다. 소설은 동호가 틈만 나면 송화를 찾아나서는 영화 구성과도 다르다. 이는 모두 임권택 감독이 영화적 상상력을 보태어 소설을 각색한 내용이다. 이를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선학동 나그네'로 영화로 만들 때 감독은 반드시 제주도를 촬영지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감독은 송화가 4.3 사건의 피해자였으며, 먼 길을 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을 추가하여 송화와 동호가 함께 제주도로 흘러들도록 했다.


감독이 <천년학>을 위해 제주 로케이션을 둘러볼 때의 이야기이다. 임권택 감독에게 제주 촬영을 제안했던 사람은 당시 제주영상위원회 위원장이던 임원식 감독이었다. 작품을 100편이나 찍으면서도 임권택 감독은 <천년학> 전까지 제주도에서 촬영한 영화가 없었다. 임원식 감독 제안에 임권택 감독은 귀덕1리항을 포함하여 영화 촬영지 될 만한 곳을 몇 군데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섬 전체가 하나의 천연적인 오픈세트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며 감탄했다. 특히 귀덕1리항을 보고서는 "전라도에서도 찾지 못했던 옛 포구의 원형을 찾았다"고, 용눈이오름을 가보고서는 "이런 곳이 있었구나"하며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귀덕1리항 전경


영화를 완성하고 난 후 제주도에서 <천년학> 시사회를 할 때엔 "아픔과 고난의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제주도민들의 생활이 나를 붙들어 맸다"며 촬영지 섭외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그만큼 좋았으니 감독은 원작에 없던 제주도 서사를 어떻게 영화 속에 녹여낼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4.3 사건이 송화의 가족사를 관통하도록 하여 그녀를 떠돌이로 만든 비극으로 만들고, 고향으로 돌아온 송화가 판소리 대신 제주 지역 민요 '이어도사나'를 부르게 한 장면들에서 감독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 발생하는 이같은 차이에는 임권택 감독이 제주에서 받은 인상이 깊게 배어 있다.


전라남도와 제주도가 가까워 두 지역민들이 오래 전부터 활발히 교류해온 점도 임 감독의 제주 촬영 결정을 쉽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송화가 장흥에서 그것도 고향이었던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리적으로 볼 때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금도 제주도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전라도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2014년엔 제주 인구 60만 명 중 전라도 출신이 12만 명, 2세까지 합치면 15만 명에 달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영화는 동호와 송화의 동선을 통해 귀덕1리항과 성읍민속마을, 새별오름이 가진 풍경을 보여준다. 다만 <천년학>을 보고서 제주도 촬영지를 답사하려는 분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게 된다. 용눈이오름이 <천년학> 촬영지로 알려져 있기는 하다. 눈 먼 송화를 이끌며 오름을 오르던 장면에서도 동호는 "용이 내려 앉아 놀던 곳이라고 해서 용눈이오름"이라고까지 누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그곳이 용눈이오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용눈이오름은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도록 길이 나 있다. 반면 영화에서 인물들은 오름 한복판을 가로질러 정상에 오른다.


캡처 1.jpg
용눈이오름 2.jpg
영화 속 오름(왼쪽)과 실제 용눈이오름. 인물들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정상을 오르지만, 용눈이오름 탐방로는 능선을 따라 가도록 되어 있다.

지금과 그때 오름 탐방로가 다를 가능성도 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제주도에 갈 때마다 용눈이오름을 올랐다. 꼭대기에 올라서는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한라산을 마주하는 시점 쇼트도 함께 살폈다. 영화 촬영일 당시 날씨가 좀 더 좋았다면 선명한 판독이 가능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인물들이 바라본 한라산이 아무래도 용눈이오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오름의 모양이나 탐방로의 위치, 꼭대기에서 보이는 한라산 뷰로 보았을 때 용눈이오름보다는 새별오름에 가깝다는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주 지역신문인 제민일보에 <천년학> 배경으로 새별오름이 있다는 기사도 있다.


극중 공간이야 감독이 설정하기 나름이다. 아무렴 심각한 오류는 아니다. 다큐도 아니고 픽션이니까. 다만 새별오름을 알아본 내 입장에서도 장면이 다소 어색한데, 영화를 본 제주도민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감독님 기왕 제주도까지 오셨는데 그냥 대사 그대로 용눈이오름에 가서 촬영했어도 됐을 일이지 않았을까. 누이 눈 먼 사람이라고 동호가 못된 거짓을 꾸며대는 장면도 아니고. "샛별처럼 하늘에 우뚝 솟아있다고 해서 새별오름이래"라고 대사를 썼어도 영화의 흐름에 아무 지장이 없었을 텐데, 굳이 새별오름에서 촬영하고서는 그곳을 용눈이오름이라고 할 필요가 무엇이었을지는 짐작가는 바가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 동호와 송화가 한라산을 마주했던 오름을 가 보고 싶으시다며 용눈이오름을 갈 이유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새별오름을 찾아가시라 하고 싶다. 눈 먼 송화가 봤던 한라산은 새별오름에서 더 잘 볼 수 있다. 용눈이오름은 한라산 쪽보다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내려다보이는 바다 경치가 더욱 가까운 곳이다. <지슬>과 <늑대소년> 촬영지로만 용눈이오름을 기억하는 쪽이 사실과 더 가깝지 않을까 한다. 이공이오공팔공팔



✦ 귀덕1리항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 특징: 제주 서쪽 바다의 일몰 명소, 조용히 바다 보며 쉬기 좋은 작은 어항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영화 속 장면 바로 떠오르게 하는 거북이 등대

- 교통 & 접근성 ★★★

곽지랑 협재 사이 아주 애매한 위치, 다른 영화 촬영지와도 가깝지 않아

- 풍경 & 자연 ★★★★

여전히 곳곳에서 제주도 향토색이 잘 드러남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쉽고 어렵고 따질 게 없음

- 감성 & 사색 ★★★

제주도 시골 어촌 감성 굿, 물멍하기에는 제한적인 시야


✦ 새별오름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산59-8

- 주차: 주차장 아주 넓음

- 소요시간: 왕복 40분 ~ 1시간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한국영화를 느끼기 위해 새별오름에 오를 이유는 없다

- 교통 & 접근성 ★★★

넓은 주차장, 공항과도 차로는 30분 거리

- 풍경 & 자연 ★★★★

비양도와 한라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경치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전날 숙취가 아직 남았다면 동쪽 경사로가 좋다

- 감성 & 사색 ★★★

겨울 억새로 유명해 사진가들이 좋아하는 오름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선학동 나그네'(이청준, 청년정신)


** 이청준 작가는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이렇게 시작했다. "남도 땅 장흥에서도 버스는 다시 비좁은 해안 도로를 한 시간 남짓 내리달린 끝에, 늦가을 해가 설핏해진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종점지인 회진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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