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어떤 영화를 특정 지역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하더라도 모두 지역 영화(local movie)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유한 역사와 문화, 정서가 내용과 형식에 깊이 반영되었을 때여야 지역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테면 <해운대>(윤제균, 2009)나 <국제시장>(윤제균, 2014)은 '흥행 영화'라 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부산 영화'라고 부르자 하면 나는 주저한다. 영화 속 해운대가 장소로서 가진 기능은 해안이 있는 도시라면 어디라도 가능한 재난 발생지에 그친다. 극중 인물 또한 반드시 부산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부산에서 영화를 촬영한 이유는 간단하다. 해운대 바다가 주는 부산의 상징성을 영화가 손쉽게 차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 역시 제목에서는 지역성을 암시하고 있지만, 국제시장이란 공간에 대한 설명이나 지역 공동체와의 정서적 연결은 뚜렷하지 않다. 영화의 주제와 시선은 지역성과는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부산에서 촬영되었고 감독 역시 부산 출신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해운대>와 <국제시장>에서의 부산은 그저 찍힌 곳이지, 말하는 곳이 아니다.
영화의 지역성 측면에서만 보면 <지슬>(오멸, 2012)은 <해운대>나 <국제시장>과 완전히 정반대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4.3 사건이 발생했던 1948년 제주도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특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중 공간이 제주도가 아니라면 작품은 아예 성립할 수 없다. 4.3 사건은 도저히 부산이나 서울로 공간을 옮겨 다룰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오멸 감독은 <지슬> 제작 과정에서 지역민과도 깊이 연대했다. 전세 보증금을 빼도 부족한 제작비에 도저히 이름 난 배우를 쓸 형편이 아니었던 감독은 영화에 제주 지역 극단 소속 배우들과 지인들을 대거 출연시켰다. 덕분에 <지슬>은 우리나라 영화이면서도 한글 자막을 써야 했을 만큼 제주 방언이 주는 맛을 아주 잘 살렸다.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오멸 감독은 다른 지역에서보다 먼저 제주도에서 <지슬>을 공개했다. 전 세계 첫 개봉을 제주도에서 하는 즐거움과 자부심을 도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작업해 온 예술가의 고향 사랑이 느껴진다. 이 정도 되면 오멸 감독을 제주 영화인으로, <지슬>을 제주 영화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이 영화에서 제주도는 단순히 찍힌 곳이 아니다. 스스로 말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지슬>을 제주 영화로 만들어주는 핵심은 로케이션이다. 극중 인물들이 피난했던 동굴 촬영지인 큰넓궤는 쉽게 말해 '큰 동굴'인데, 실제로 4.3 사건 당시 희생자들이 숨어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곳이다. 동백공원에 있는 도툴굴에서도 피신 흔적과 유품들이 발견됐다. 영화 초반 사태의 심각성을 잘 체감하지 못하던 주민들이 입구에 하나둘 모여 쪼그리고 앉았던 동굴이다.
감독이 다른 굴을 빌리지 않고 굳이 큰넓궤와 도툴굴을 촬영지로 섭외한 이유는 아마 이 영화가 그 자체로 일종의 위령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1장 신위(神位), 2장 신묘(神廟), 3장 음복(飮福), 4장 소지(燒紙) 등 제의 순으로 영화를 전개하면서 제주 풍경이 가진 아름다운 색을 모두 흑과 백으로만 대체했다. 영화를 제의로 만들어놓고 정작 씻김굿을 엉뚱한 곳에서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큰넓궤로 가는 길에 나도 국화 한 송이와 지슬(감자) 한 봉지를 샀다. 죄 없는 사람이 죽어나간 학살 현장을 답사한다고 찾아가는 마음이 무겁고 무섭고 또 고됐다. 하지만 제주도 영화 촬영지 답사를 마음 먹은 이상, <지슬>은 어떤 핑계로도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 전개를 따라가자면 제주전통초가마을, 도툴굴, 큰넓궤, 용눈이오름 순이다. 이동 동선으로 보면 큰넓궤에서부터 시작해 제주전통초가마을, 도툴굴, 용눈이오름 순서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것이 좋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나는 큰넓궤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했다. 주차장도 없거니와 따로 관리자를 둘 만한 곳도 아니다보니, 안전 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도에서는 굴 입구를 철문으로 막아두고 자물쇠로 한 번 더 잠가 두었다. 그러나 설령 철문이 잠겨있지 않았더라도 들어가볼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토벌군이 그 입구를 막고 서서는 굴 안쪽으로 총알을 갈겼다는 증언이 도저히 실감나지 않았다. 철문 앞에는 나보다 먼저 왔다 간 이들이 올려두고 간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나도 조용히 국화 한 송이를 올려두고 봉지를 풀어 지슬을 쏟았다.
큰넓궤를 설명하는 여러 자료에 따르면 동굴 입구는 10m 정도를 성인 한 명이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다. 여길 지나면 사람 여럿이 지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 120명 가까운 동광리 주민들이 숨었었다고 한다. 이 동굴에 <지슬> 출연진과 제작진들도 모여들었다. 동굴 안은 좁고 어두워 영화를 찍을 만한 곳이 전혀 못 된다. 그러자 감독은 수백 미터 밖 발전차에 전선을 잇고 전기를 끌어와 동굴에 조명을 설치했다. 장비 세팅에만 대여섯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한겨울이었으니 춥기는 좀 추웠을까. 후에 오멸 감독은 "다신 겨울에 영화 찍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밝혔다.
큰넓궤 옆에 형제굴처럼 붙어 있는 도엣궤까지 둘러보고 나와 제주돌문화공원 안에 있는 제주전통초가마을로 이동한다. 이곳을 답사하던 무렵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어린 애순과 관식이 자랐던 유년시절의 제주 마을을 여기서 촬영했다. 실제 사람이 살던 초가마을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제주민속촌, 성읍민속마을과 함께 둘러보면서 제주 전통 생활 문화를 가늠해보기에 좋다. 내가 갔을 땐 마침 수요일이어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다른 날엔 어른 1명에 5000원을 받는다.
이곳은 <지슬>에서 토벌군 주둔지였다. 영화에서는 큰넓궤만큼이나 중요한 감정선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끔찍한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영화 첫 장면도 여기서 촬영했고, '폭도들 목 따오지 않는' 후임병이 알몸으로 떨던 곳도 이곳이고, 토벌대에게 끌려온 순덕(강)이 몹쓸짓을 당한 곳도 이곳이다. 들어가는 집집마다 텅 비어 있고 관람객도 적은 평일이다 보니 썰렁해서, 주민들이 동굴로 숨어들면서 텅 비어 버렸던 영화 속 마을 공간과 분위기가 똑 닮았었다. 꼭 주민들이 또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만 같아 영화는 영화였을 뿐이지만서도 걸음이 영 가볍지 않았다.
전통초가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툴굴이 있다. 도툴굴은 찾느라 꽤 애를 먹었다. 도툴굴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반못굴이라고도, 반시못굴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카카오맵이나 네이버 지도에 '반못굴' '반시못굴'이라고 검색했는데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았다. 알고보니 굴 가까운 곳 마을에 있는 작은 연못 이름이 반못이라 지역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모양이고, 카카오맵에서는 '도툴굴'이라 되어 있었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검색창에 '동백동산'을 치는 편이 좋다. 동백동산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길 난 쪽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곧 도툴굴이다. 영화 속에서 마을을 떠나온 남성들이 입구에 하나 둘 모여 앉았던 동굴이다. 희생자가 발생하진 않았어도, 도툴굴 역시 4.3 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이 숨어들었던 굴 중 한 곳이다.
도툴굴까지 다녀오고 나면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하나 남았다. 도틀굴에서 중산간 지역을 따라 산맥처럼 펼쳐진 오름을 쭉 지나다보면 약 20분 거리에 용눈이오름이 있다. <지슬>이 한창 화제몰이를 할 때엔 영화 포스터에 나온 오름이 이곳이라고 이름이 꽤 알려졌다. 빙 둘러 정상까지 오르는 완만한 능선 덕분에 제주에 있는 여러 오름 중에서도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다. 이 오름을 중간쯤 오르면 상덕이 차마 순덕을 쏘지 못하던 바로 그 굼부리가 나온다. 반가운 마음에 포스터와 비슷한 구도로 이리저리 사진을 몇 장 찍고서는 정상에 올라 시야를 바꿔본다. 용눈이오름은 '오름 중의 오름' 또는 '여왕 오름'이라고 평가받는 다랑쉬오름과 가깝다. 심지어 이 다랑쉬오름에서도 도민들은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다.
4.3 항쟁 피해자이자 생존자이신 할머니가 방송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한 적이 있다. 내용은 기막히다.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동굴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거기서 그만 출산을 했는데, 갓난애가 울기 말고 달리 뭘 하겠는가. 평상시 같으면 축복 받으며 태어났을 아이지만 가뜩이나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주민들 입장에서 반가울 리가 없었다. 다같이 살자고 들어온 동굴에서 다같이 죽게 생겼으니 말이다. 결국 산모는 자신의 젖가슴으로 아기 코를 막았다고 한다. 아기는 나자마자 바깥 공기 한 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그대로 죽고 말았다. 제손으로 아기를 죽인 산모는 또 어찌 울음을 참을 수 있었을까 상상해본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참 처절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한 줌 권력을 쥐고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해쳐도 되는 시대는 민주주의는커녕 야만 그 자체다. 그때 국가가 채택했다는 자유민주주의는 허상이고 모순이었다.
적어도 우리 사는 시대부터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다가 국회 진입을 망설이던 계엄군이 생각났다.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차마 어찌하지 못하던 그 계엄군 한 명 한 명이, "저 여자도 폭도입니까"하며 선임의 명령에 반문하던 <지슬> 속 상덕과 닮아있었다. 2024년 12월 국회를 막아선 시민 제압에 소극적이던 계엄군은 과거에 빚진 시대가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는 징후였을까. 장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용눈이오름에서는 대치하고 있는 상덕과 순덕 뒤로 토벌군들이 아직도 총을 들고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공이오공칠이구
✦ 큰넓궤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2-3
- 주차: 별도 주차장 없음 (인근 곶자왈 지역에 도보 접근 필요)
- 소요시간: 동굴 입구 확인 중심으로 약 10분 내외 (내부 진입 제한)
✦ 도툴굴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83 동백동산습지센터 내
- 문의: (064)784‑9445 동백동산습지센터
- 주차: 동백동산습지센터 공영주차장 이용 후 도보 이동 (숲길 약 300m)
- 소요시간: 입구 확인용으로 약 5분 이내 (내부 진입 제한)
✦ 용눈이오름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산 28번지
- 주차: 넓은 주차장 있음
- 소요시간: 왕복 약 40분
✦ 제주전통초가마을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 제주돌문화공원 내
- 주차: 돌문화공원 공영주차장 사용
- 입장료: 성인 5,000원 / 청소년 및 군경 3,500원 / 제주도민, 65세 이상 등 면제
- 소요시간: 초가집 관람 및 문화 체험 포함 약 60–90분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현진건 「순이 삼촌」(창비, 2015)
- 현진건 「제주도우다 1-3」(창비, 2023)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 <지슬> 촬영지에 관한 별점과 한 줄 평은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