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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민속마을, 제주민속촌, 아부오름, 만장굴

<이재수의 난> <계춘할망> <연풍연가>

by 신동욱

실화 영화라도 극중 공간이 실제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세트를 짓거나 CG로 대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천상륙작전〉(이재한, 2016)은 창원에서, 〈고지전〉(장훈, 2011)은 함양에서 촬영했다. 그래도 관객은 창원을 인천이라 믿고, 함양을 전방이라 여긴다. 이젠 CG를 실제 장면과 구분하기조차 어렵거니와, 관객은 극중 공간을 설정한 그대로 믿어주기로 영화와 일종의 약속이 되어 있기도 하다.


왜 제주도였을까


때로 그 약속이 무력해지는 영화들도 있다. 제주도로 치면 <이재수의 난>(박광수, 1999)이나 <지슬>(오멸, 2013) 같은 작품들이다. 단순히 고증이 문제라면 전국 어디에라도 세트를 지어 촬영할 수 있었다. 그곳이 반드시 제주도일 필요는 없다. 박광수 감독 스스로 이야기한 것처럼, "제주도에서 영화 찍다 망한 회사들도 많다." 바람도 많이 불고, 날씨도 시시각각으로 변해 배우와 수많은 스태프들이 단 한 컷을 위해 닷새 이상씩을 제주도에서 대기만 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인건비부터 숙박비, 식비 등등 그 시간들이 제작사 입장에서는 죄다 돈이다.

그런데 박광수 감독은 <이재수의 난>을 찍을 때 제주도 올 로케이션을 감행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제 역사와 극중 인물들의 감정이었다. 수도 한양과 동떨어져있는 제주 토착민들의 단절감과 소외감은 서울 근교에 세트를 지어 촬영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실제 역사 현장에서만이 그 감정을 가장 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래픽이나 세트로 내밀한 감정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제주 특유의 초가 마을 돌담과 낮은 지붕들, 그 아래에 밥 짓고 사는 백성들과 후경으로 펼쳐지는 오름은 이 지역이 제주도임을 보여주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성읍의 흙담과 초가지붕은 억압받던 이들의 숨구멍이었다. 한라산에 낀 구름과 안개는 민란으로 격동하는 제주도의 불확실한 미래였다. 감독은 이재수의 난이 발생했던 제주만의 지역 특성을 가슴으로 이해하려 했고, 그 감정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다.


박광수 감독은 <이재수의 난> 촬영 이전에도 제주도에 간 적이 있었다. 감독 신혼여행지가 제주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 조감독이었다. 그러나 <이재수의 난>을 준비하며 제주도가 보여준 속살은 그가 그전까지 만났던 제주도와 달랐을 것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그곳의 삶을 스크린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선 추천 : 만장굴 → 아부오름 → 제주민속촌 → 성읍민속마을


그래서 그런지 <이재수의 난>만큼 제주도를 넓게 쓴 영화는 없다. 영화 촬영지 답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힘든 순간이다. 제주 동북부쪽인 만장굴과 섭지코지에서부터 성읍민속마을과 제주민속촌을 거쳐 아부오름, 좌보미오름 등 오름도 한두 개가 아니다. 그렇게 오름 몇 개를 오르내리고 제주 남서쪽인 대정향교와 송악산에 이르러서야 <이재수의 난> 촬영지 답사를 마칠 수 있다. 동선이 가까운 곳들을 묶어 다녔어도 꼬박 사흘이 걸렸다. 영화 준비 단계에서 제작진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다면 이 동선을 그대로 가거나 거꾸로 가보는 게 좋다. 영화 속 시간 순으로 보자면 대정향교에서부터 만장굴을 지나 아부오름과 성읍민속마을로 가야 한다. 다만 여유가 없다면 주요 촬영지들 서너 군데 정도만 추려 가보기를 추천한다. 내가 추천하는 동선은 만장굴에서 아부오름을 지나 제주민속촌과 성읍민속마을로 가는 코스다. 모두 제주 동쪽에 있어 아주 무리한 동선도 아니고 영화에서도 중요한 감정선을 담당하는 장소들이다.

<연풍연가>에서 태희와 영서가 재회한 나무가 아부오름 입구에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아부오름 능선에서 내려다 본 분화구. <이재수의 난>은 이곳에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만장굴에서는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을 촬영했다. 이재수(이정재)는 천주교인을 직접 처형한 직후, 손에 피를 묻힌 이상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약속하고 싶었던 숙화(심은하)를 만났고 이곳에서 입을 맞추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둘의 사랑은 만장굴 입구에서 멈췄다. 전체 7km가 넘는 용암 동굴 중 일반에게 관광이 허락된 구간은 1km 남짓이다. 내 걸음으로 끝에서 끝까지 약 40분 정도를 걸었다. 영화를 촬영한 곳은 굴 바로 앞 입구였다.


아부오름은 극중 민당들의 근거지가 있던 곳이다. 오름을 끝까지 오르면 영화 속 장면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허가를 받았었는지 지금은 나무가 빽빽한 분화구에다가 촬영 당시엔 세트를 짓고 '직경 1.4km 규모 국내 최대 오픈세트'라고 홍보했었다. 겨우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가는 비포장 도로가 분화구로 내려가는 유일한 길이 있었는데,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차 바퀴가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나는 이재수가 걸었을 능선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서는 전망대로 지어놓은 나무 데크에 올라 묵념하듯 분화구를 내려다보았었다.


영화 <계춘할망>(창, 2016)과 <연풍연가>(박대영, 1999)에도 아부오름에서 촬영한 장면이 있다. 우선 <계춘할망>에서 아부오름은 혜지(김고은)가 미술 선생님(양익준)에게 그림을 배운다며 처음 올랐던 오름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삼나무 군락지는 <이재수의 난> 포스터에도 있던 아부오름만의 시그니처였다. 다만 <계춘할망>을 2015년 4월부터 6월까지 촬영했고, 내가 비슷한 계절에 왔는데도 더 이상 삼나무 군락지가 도드라지는 영화 속 풍경은 아니었다. <연풍연가>를 본 사람이라면 아부오름 입구에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어디서 본 듯 싶을 것 같다. 극중 영서(고소영)가 생애 첫키스를 했던 곳이었고, 태희(장동건)와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며 또 재회까지 했던 나무가 아부오름 바로 앞에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 나무만큼은 바람을 견디며 색도 잃지 않았다. 아부오름에서 촬영한 영화는 이렇게 세 편이다. 그래도 영화 촬영지임을 소개하는 안내는 오름 어디에도 없다.


<이재수의 난> 마을 장면은 제주민속촌과 성읍민속마을 두 군데에서 각각 나눠 촬영했다. 우선 제주민속촌은 제주도를 지역별로 나눠 마을 특성을 재현한 공간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일종의 세트여서 <이재수의 난> 이후에는 드라마 '대장금'도 이곳에서 찍었었다. 같은 제주도 초가집 같아 보여도 해안 마을과 중산간 지역 마을의 집은 담에 쓰인 돌부터 다르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 수 있었다.


제주민속촌(왼쪽)과 성읍민속마을 입구


제주민속촌과 달리 성읍민속마을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영화에서는 성문을 사이에 두고 민당과 교인 쪽이 싸우던 곳이다. 영화가 1901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니만큼 안테나를 철거해야 했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 제작진이 주민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나이 많은 할머니여서 제주도 방언이 심해 소통에 애를 먹었었다고 한다. 시멘트 위에 뿌린 흙에서는 먼지가 날렸고, 설상가상 변덕이 심한 날씨로 예상보다 촬영이 길어지면서 제작진은 주민들에게 자주 혼이 나야 했다. 마을을 세트처럼 쓰자면 흔히 발생하는 갈등이다. 극중 성문 앞이 넓은 것으로 보아 동문이나 서문보다는 정의현성이라고 불리는 남문이 영화 속 배경이었다고 추정한다. 독자께서도 '여기가 거기구나'에 그치지 말고, 실제 촬영 장면을 떠올리며 카메라 위치와 배우 동선 등을 그려보시면 좋겠다. 현장을 보면 한층 더 깊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마침 내가 성읍민속마을에 갔을 땐 또다른 영화 하나가 막 촬영을 마친 다음이었다. 4.3 사건을 다루는 영화 <내 이름은>(정지영)이다. <이재수의 난> 때와 달리 이번엔 제작진과 큰 갈등이 없었던 것 같다. 촬영장 이야기 하시는 표정이 밝다. 동문 앞 한봉일 고택과 대장간집 뒷집 마당에서 영화를 촬영했다는 설명을 주민께 들을 수 있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챙겨 주신 약도 한 장에 촬영장소 두 군데를 꼼꼼히 체크해두었다.


<이재수의 난>은 또다른 제주 영화 촬영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고인이신 김경률 감독은 <이재수의 난>에 단역 배우로 출연한 일을 계기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리고 그가 연출한 <끝나지 않은 세월>(2005)은 한국영화사에서 처음으로 4.3 사건을 다룬 영화로 남았다. 후에 국내외 영화제에서 큰 찬사를 받은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2013)은 이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면서, 김경률 감독에게 오멸 감독이 바치는 헌사 같은 작품이다. 절묘하게도 <이재수의 난>이 <지슬>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마치 제주 민중사를 스크린으로 이어 붙이려는 영화적 계보처럼. 이공이오공칠이일.


✦ 만장굴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2685

- 영업시간: 매일 09:00 ~ 18:00 (입장 마감 17:00, 첫째 수요일 휴무)

- 입장료: 성인 4,000원 / 청소년·군인 2,000원 / 어린이 무료

- 관람 소요시간: 약 40~60분

* 2025년 12월까지 안전점검 등 이유로 일시 관람 중단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만장굴에서 찍은 영화는 <이재수의 난> 말고 없음

- 교통 & 접근성 ★★★☆

버스로는 오래 걸려 단체 관광이나 렌터카를 추천

- 풍경 & 자연 ★★★☆

장관 그 자체의 용암 동굴이지만 내부가 어두워 사진은 잘 안 나옴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 아부오름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 164-1

- 주차: 입구에 무료 주차장 있음

- 소요시간: 정상까지 약 5분, 둘레길 포함 전체 탐방 약 30~40분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이재수의 난>부터 <연풍연가>, <계춘할망>으로 이어지는 영화적 흔적

- 교통 & 접근성 ★★★★☆

제주 답사 해보면 왔다갔다 하는 길에 계속 마주하게 됨

- 풍경 & 자연 ★★★☆

자연 보존 잘 돼 있지만 마땅한 포토존은 없음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이보다 쉬운 오름은 없다

- 감성 & 사색 ★★

찾는 이가 아주 많지는 않아 산책하며 생각 비우기에 제격



✦ 제주민속촌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민속해안로 631-34

- 문의: (064)787-4501

- 운영시간

3월 1일 ~ 9월 30일: 08:30 ~ 18:00 (매표 종료 1시간 전)

10월 1일 ~ 2월 28일: 09:30 ~ 17:00

- 입장료

성인 11,000원 / 경로 9,000원 / 청소년·군경 8,000원 / 어린이 7,000원

- 소요시간: 전체 관람 약 1시간 30분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 촬영 흔적은 아예 없음

- 교통 & 접근성 ★★★★

제주 주요 관광지들과 은근히 가까운 위치

- 풍경 & 자연 ★★★★

제주만의 전통 가옥 특성을 알기 쉬운 곳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거의 평지이며 보행약자 접근성도 높지만 다소 넓음

- 감성 & 사색 ★★

여러 음악을 번갈아 틀지만 기억에 남는 건 ‘이어도사나’ 뿐



✦ 성읍민속마을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30

- 문의: (064)710-6797

- 입장료: 무료

- 소요시간: 약 1시간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이재수의 난>을 거쳐 지금은 <내 이름은> 촬영 중

- 교통 & 접근성 ★★★★

제주 주요 관광지들과 은근히 가까운 위치

- 풍경 & 자연 ★★★★

실제 사람들이 사는 초가마을, <이재수의 난> 영화 속 성곽도 그대로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돌아다니기에 아무 지장 없음

- 감성 & 사색 ★★

옛날 시골 감성과 관광지 감성 사이의 애매한 느낌



*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주영훈 '우리 사랑 이대로'(Duet with 이혜진, <연풍연가> 삽입곡)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현진건 '변방에 우짖는 새'(창비, 2013) : <이재수의 난> 원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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