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 & 함덕대박횟집, <계춘할망> 촬영지 별방진
입안이 그냥 호강허난 제주 잘허는 집 <1>
난 이름부터 아주 별난 계모임 하나를 하고 있다. 모임 이름이 '살인의 보이'다. 가차없이 잔인하던 어느 무기수 전성기 별칭 같은 모임 이름에 어원은 따로 있다. 기억이 맞다면 이 계모임에 가입하는 날이었다. 욱하지 말고 순하게 살라며 내 이름 동욱을 다르게 부르는 선배가 나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이거다.
동순아, 너는 <살인의 추억>이랑 <올드보이> 둘 중에 어느 영화가 더 좋니?
영화학과 졸업생이거나 영화를 너무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살면서 이 질문 한 번은 받아봤을 법하다. 독자들께서는 어느 영화를 고르실지 궁금하다. 둘은 2000년대 초반 질과 양 둘 모두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국영화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시기와 국적이 겹쳐 영화 팬들이 자주 비교하며 묘하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두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선뜻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웠던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절묘한 대답을 내놨었다. 잘 만들었다는 느낌은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쪽이고,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는 <올드보이>(박찬욱, 2003)라고. 나로서는 정직한 답변이었다. 나는 봉준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빈틈없이 만드는 게 감독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표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마디로 '갓벽' 그 자체다. <올드보이>는 다르다. <살인의 추억>보다 직관적이면서 여백이 있다. 난 후자 쪽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봉준호의 영화 중에서도 <살인의 추억>보다는 <마더>(2009)를 좀 더 좋아한다. 박찬욱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박쥐>(2009)가 최애 작품이다.
영리하게 질문을 피해갔다 했더니 차 안에 있던 다른 선배들이 "그럼 <살인의 추억>이 더 좋다는 뜻 아냐?", "아니지, <올드보이>가 더 좋다는 뜻이지" 하며 갈라치기를 한다. 알고 보니 이 모임엔 이미 패가 갈려 있었다. <살인의 추억> 쪽이 세 명, <올드보이> 쪽이 두 명이었다. 그래서 난 모임의 평화를 위해 <올드보이> 쪽에 섰고, 이렇게 균형을 맞추자 모임 이름도 두 작품 제목을 반반씩 떼어오게 된 것이다. 다만 '올드의 추억'은 너무 노땅 모임 느낌이라서 비록 수식어가 '살인'이기는 해도 차라리 '보이'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잠잠하다 요새는 <기생충>(봉준호, 2020)이냐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를 두고 또 편이 갈렸다. 조만간 모임 이름이 '기생의 결심'으로 바뀔 지도 모르겠다.
이 모임 맏형과 막내인 나는 술김에 아주 엉뚱한 격론을 벌인 일이 있다. 계모임을 함께 하는 선배 한 명이 대전에서 결혼하던 날 오랜만에 반가운 멤버들이 다 모였다. 전날 저녁 먹고 들어와 숙소에서 못 다 푼 회포를 마저 풀던 중이었다. 배우 엄태구가 좋냐 안 좋냐 하는 게 주제였다. 어쩌다 엄태구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형님은 엄태구 목소리가 별로라며, 대사 전달이 안 돼 잘 들리지 않아 옛날 같으면 배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배우여서 엄태구가 돋보이고, 충무로에도 필요한 색깔이라고 했다. 순전히 취향 문제였는데도 꽤 오래 토론했었다.
그때 난 <낙원의 밤>(박훈정, 2021)에 빠져 있었다. 특정 영화를 좋아할 이유가 단순히 작품성이나 예술성에만 있지는 않다. 어느 영화는 음악이 좋아서, 어느 영화는 촬영지가 좋아서, 어느 영화는 다 별로인데 특정 장면 연출 딱 하나가 탁월해서 좋아하기도 한다. <낙원의 밤>의 경우엔 태구(엄태구)와 마 이사(차승원)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난 종종 혼자 있을 때마다 엄태구의 목소리를 따라하곤 했다. 그 목소리에는 영화를 벽돌색으로 만드는 단단한 무게감과 긴장감이 있다. 느와르와 잘 어울린다.
<낙원의 밤>을 촬영했다는 식당 두 곳이 제주도에 있어 답사 경로에 포함했다. 신나는 날이다. 마침 제주도 함덕에서 직무 관련 교육을 받는다는 아내와 저녁도 같이 먹을 수 있다. 성산에서 출발해 영화 <계춘할망>(창, 2016) 촬영지인 별방진을 거쳤다가 곧장 동복포구에 닿는다.
아직 육지 사람들은 모르는 데라, 조용하기도 하고.
이곳에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이 있다. <낙원의 밤>에서 태구와 재연(전여빈)이 함께 물회를 먹던 곳이다. 가게 간판에 아예 <낙원의 밤> 촬영 장소라고 써붙여 놓았다. 물회를 좋아했던 재연은 이곳이 조용해서 좋다 했지만, 재연이 죽고 난 뒤에 이곳은 나같은 육지 사람들도 더러 아는 곳이 됐다. 평일 점심 시간을 살짝 넘겨 도착했는데도 웨이팅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데 여기, 꼭 영화에 나오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이름이 알려질 곳이었다. 실내에서 약간 더 바닷가 쪽으로 공간을 내어 비닐로 천장을 덮어둔 자리 쪽으로 사람들이 붙어 앉는 이유가 있다. 바다 뷰와 노포 감성이 끝장이다. 바닷가 포장마차 느낌이다. 영화에서 태구가 아슬아슬하게 음주 단속을 피해간 이유를 알 것 같다. 경찰의 짐작처럼 술을 입에 대기만 해서가 아니다. 주당들 공기 좋은 곳 가서 한 잔 하면 꼭 "이런 곳에서 마시면 안 취한다" 하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영화에서는 가게에서 볼 수 있는 바다 뷰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었다.
<낙원의 밤>을 보고 왔으니 모듬물회는 당연히 주문하는 메뉴지만 나는 여기에다 해물라면도 함께 시켰다. 단체 손님 받을 자리에 혼자 와서 한 그릇 먹고 가는 게 미안해서이기도 하지만, 밥 배 말고 해산물 배가 따로 있는 분 중에 면 음식까지 사랑하는 분이라면 한 번 이렇게 드셔 보시라 하고도 싶다. 찬 물회 한 번 먹고, 뜨거운 라면 한 번 먹으면 '단짠단짠'이 아니라 '따찬따찬'이다. 물회 국물을 제주 바다마냥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면 한라산 용암 같은 해물라면 국물 한 모금에 위장이 포근해지고 뇌까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다. 해물라면 퀄리티도 뛰어나다. 바닷가 관광지 분식점에 문어다리 하나 넣고 한 그릇 만 원씩 하는 흔한 해물라면과는 들어가 있는 해산물 재료에서부터 차이가 크다. 재연이 물회 말고 이 맛도 한 번 보고 갔으면 좋았겠다 싶은 맛이다.
식사를 마치고 괜히 태구가 앉았던 자리에 한 번 슬쩍 앉아 본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바다가 잘 보이는 확장 공간이 아닌 안쪽에 앉았었는데, 안쪽 중에서는 가장 바깥자리다. 영화 속 컷들을 떠올리며 나름 이유를 짐작해본다. 확장한 쪽은 테이블이 한 줄로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지 않다. 여기다가 실내와는 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인물들을 찍으려면 화면이 답답할 수밖에 없거니와 앵글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감독은 태구와 재연을 비교적 넓은 가게 실내, 그중에서는 가장 바깥쪽에 앉혀 카메라와 배우 사이의 공간을 확보했을 것이다.
XXX들, 그 안에 있는다고 안 맞냐? 저게 무슨 비비탄인 줄 알아.
해 질 무렵 아내가 교육 마칠 시간에 맞춰 함덕으로 넘어갔다. 나보다 연상인 아내가 아기처럼 달려와 안긴다. 전에 누가 내게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물어보면 나는 모교에, 정확하게는 내가 졸업한 학과에 입학한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나는 성적에 맞춰 들어온, 예술대 소속 이름도 생소한 학과에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누가 내게 같은 질문을 물어보면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 정도가 아니라 아내는 아예 사람을 바꿔놨다. 나는 좀 더 바르고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전보다 치열하게 애쓰고 있다.
아내와 저녁을 함께 한 곳은 함덕해수욕장 인근 대박횟집이다. 외양만 봐도 반갑다. <낙원의 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재연이 여기서 피의 복수를 했었다. 나는 마 이사가 앉았던 자리에 앉고 싶었는데 실내 인테리어가 영화 찍을 때와 바뀌어 있었다. 미닫이문으로 구분해두었던 바다쪽 창가 룸이 없었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촬영 후에 홀과 룸 경계를 허물었다고 한다. 천장에 해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촬영 당시의 대박횟집은 실내에 또다른 경계가 있다는 점에서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과도 구조가 비슷하다. 스스로를 건축 전공자라 자기최면을 걸며 이런 구조가 <낙원의 밤>에 꼭 필요했던 이유를 짐작해본다.
같은 식당이라도 룸과 홀에는 분명한 선과 경계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권력이다. 홀은 다수를 수용하고, 룸에는 소수만 들어갈 수 있다. 또 룸은 내밀한 이야기를 허용하는 공간이다. 홀에 있는 사람들은 룸에서 오가는 정보를 알 수 없다. 여기서 정보의 비대칭이 발생한다. 권력자에게는 통치에 가장 유용한 무기이다. 무엇보다 룸에서는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안전을 담보하기에 용이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액션 영화를 보면 가장 센 끝판왕은 제일 안쪽 룸에 있다. 끝판왕을 만나려는 주인공은 홀에 있는 '잔챙이'부터 처리해야 한다. <사망유희>(로버트 클라우스, 1980)에서도, <킬 빌>(쿠엔틴 타란티노, 2003)에서도 그랬다. <낙원의 밤>에서도 마 이사를 비롯한 소위 두목 그룹은 가게 입구에서 가장 먼 쪽 룸에 있었다. 재연은 잔챙이들을 다 처리하고나서야 마 이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홀만 있는 식당 공간보다는 아무래도 룸도 함께 있는 가게가 조금이라도 더 입체적이어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에 좋다.
둘이서 먹기에 부담없이 좋은 이 집 시그니처 메뉴는 순살 갈치조림 세트다. 갈치 요리를 먹을 때 발라내기 번거로운 뼈가 없다. 뼈를 발라낸 갈치를 돌돌 말아 양념에 조리니 한입에 쏙 넣기도 편하다. 전복부터 새우에 오뎅까지 재료는 또 얼마나 많이 넣어주시는지 조금만 숟가락을 눌러도 국물이 쏟아질랑말랑 할 정도다. 아내에게 애교를 부려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에서부터 참았던 소맥을 한 잔 털어넣는다. 얼른 잘 팔리는 작가가 되어서 답사를 아내와 같이 다니고 싶다.
식당을 나서기 전 사장님을 부른다. "사장님, 계산해주세요". 무심히 뱉은 말인데 생각해보니 대박횟집에선 꽤 무서운 말이다. 사장님께서 "그러고 보니까, 네가 아저씨하고 계산할 게 남았네" 하실 것 같다. 비비탄 안 맞고 싶으면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계산 잘하고 살아야 한다. 나쁜 짓 하면 다 자기한테 돌아오게 돼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식당만 다녀가기가 허전하다면 아주 가깝지는 않아도 <계춘할망>(창, 2016) 촬영지를 추천드린다.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를 왼쪽에 끼고 쭉 가다가 세화포구에서 꺾어 들어가면 얼마 안 가 하도포구가 나오는데, 이곳에 별방진이 있다. 영화에서 혜지(김고은)이 서울에 두고 온 친구 민희(박민지)와 통화하던 곳이고, 한이(최민호)를 처음 만났던 곳이다. 돌담을 쌓아 올려 마을을 둘러싼 성곽인데, 극중 혜지처럼 말 못할 답답한 일이 있거나 깊이 생각할 고민이 있으면 바다를 보고 멍때리며 앉아 있기에 딱이다. 꽃을 좋아하는 제주 관광객들에게는 3월 유채꽃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다만 다소 높이가 있는데 난간이 없어서 신발은 구두나 슬리퍼보다는 잘 미끄러지지 않도록 운동화가 좋겠다. 아이나 노인처럼 거동이 불편한 분이라면 성곽을 오르내릴 때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별방진만큼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던 곳은 성곽 바로 안에 있다. 바닷돌을 쌓아 둥글게 만들어둔 곳인데, 영화에서는 혜지가 이곳에서 해녀가 말리고 있던 가사리를 밟아 혼이 났었다. 나는 처음에 이곳의 용도와 이름을 모르고, 그저 마을 안으로 들어온 바닷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든 곳이려니 짐작했다. 산굼부리에 있는 해녀 갤러리에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름이 불턱이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 입으며 휴식을 취하는 장소라고 한다. 이공이오공칠일일.
✦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
- 맛 ★★★★★
모듬물회 + 해물라면 조합 → “따찬따찬” 최고의 궁합
- 가격 ★★★★☆
물회·라면 모두 푸짐한 해산물에 비하면 합리적
- 분위기 ★★★★★
노포 감성 + 바다뷰 포장마차 느낌 → 영화적 긴장감과 잘 어울림
- 접근성 ★★★★☆
동복포구 위치, 성산·함덕 인근 답사 동선에 무리 없음
- 영화성 ★★★★★
<낙원의 밤> 태구와 재연이 물회를 먹던 장소, 간판에도 촬영지 표기
✦ 함덕 대박횟집
- 맛 ★★★★☆
순살 갈치조림 세트 → 뼈 발라낸 갈치, 전복·새우 등 재료 푸짐
- 가격 ★★★★☆
관광지 치고는 넉넉한 구성, 가성비 만족
- 분위기 ★★★
영화 촬영 당시 룸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공간감과 스토리가 남아 있음
- 접근성 ★★★★☆
함덕해수욕장 인근, 찾기 쉽고 주차도 수월
- 영화성 ★★★★★
<낙원의 밤> 결말 촬영지, 마 이사와 재연의 마지막 대결이 벌어진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