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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2

<시월애>

by 신동욱

영화 촬영지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떤 때 나는 한국영화라는 귀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일종의 환영(幻影)이기도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장소들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 모든 장소들을 한 곳에 복원하여 모아두고 싶다. 영화 <시월애>(이현승, 2000) 속 일 마레(Il Mare)나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가옥,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 속 대저택이나 <장화, 홍련>(김지운, 2003) 속 자매가 살던 집 같은 곳들을 모두 원형 그대로 복원해 테마파크처럼 조성하면 어떨까.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 지브리 박물관 만큼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매력적인 공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영화도 이제 꽤 된다할 만큼 뛰어난 작품들도 있고 그에 맞는 세계적인 팬덤이 있다.


<시월애> 촬영지라고 하면 제주보다는 인천이 우선이다. 일 마레에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작품에 대한 평가나 취향과는 별개다. 인천 강화군 석모도 해변에 세트로 지어 올린 일 마레는 집 아래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고, 곡선으로 휘어 집 현관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서해 바다와 멋들어지게 어울리던 곳이다. 갯벌 전체가 마당인 셈이어서 성현(이정재)이 마음껏 공을 차며 뛰놀 수도 있었다.


이 집을 중심으로 교차하는 시공간이 영화의 핵심 컨셉이기 때문에 일 마레는 <시월애>를 대표하는 공간이고, 사실상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배경이라고도 할 만하다. 일 마레가 자리잡은 갯벌은 영화를 위해서는 정말 최고의 로케이션 섭외였다. 텅 비었다가 꽉 차고, 다시 텅 빈 자리에 무언가가 남고, 닿을 것 같았는데 이내 빠져나가는 바닷물이 사람 인연과 닮았다. 아쉽게도 일 마레는 갯벌 위에 올린 가건물이어서 애초부터 오래 살아남을 운명은 아니었다. 결국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인 2001년 태풍으로 훼손돼 철거되고 말았다.

영화 <시월애> 스틸컷. 일 마레와 갯벌은 비현실적인 내용을 더욱 강화해주는 탁월한 공간 설정이다. 출처: KMDB

일 마레 같지는 않지만 우도에는 아직 은주(전지현)를 따라가봄직한 곳들이 있다. 영화 타임라인대로 가보기 위해 우선 우도제일교회부터 가보기로 했다. 그제서야 후회되는 일이 있다. 은주가 성현을 만나기로 한 날, 우도제일교회 옆길을 달렸던 건 전기차가 아니라 자전거였다. 그런데 난 전기차를 빌렸던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가급적 우도에서는 자전거를 빌려 다니시라고 추천한다. 우도에서 대여할 수 있는 전기차는 사실상 오토바이에 가깝다. 초보자에겐 일단 후진부터 쉽지 않기도 하다. 그보다 우도에서 전기차를 타고 다니던 인물은 한국영화에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자전거가 더 낫다. <시월애>속 은주는 물론, <인어공주>에서 진국이 연순을 태웠던 곳도 자전거 뒤 의자였다.


우도는 ‘섬 안의 섬’이다. 이곳을 다닐 수 있는 교통수단은 오랫동안 제한적이었다. 우도의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주민들은 수영보다 일찍 자전거를 배웠다. 그러다 관광객이 몰리며 렌터카 행렬이 섬을 뒤덮었다. 크지 않은 섬에 렌터카가 달리기 시작하니 대기질도 떨어졌지만 당장 주민 안전이 크게 위협받았다. 도 당국은 우도 전역 차량 운행 제한속도를 시속 30km로 정하고 2017년 8월 이후 우도 내 자동차 운행을 제한했다. 전세버스와 이륜차 등 차량 반입을 전면 금지했다. 그런 점에서 은주와 진국이 자전거를 타고 우도 골목을 누비던 모습은 잘 된 고증이다. 2025년 8월부터 16인승 전세버스를 포함한 일부 차종에 대한 운행이 허가됐지만, 우도에서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오랫동안 자전거와 전기차 그리고 마을버스 크게 세 가지였다.


자전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해본다. '이건 전기차가 아니라 자전거다'하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우도제일교회를 오른쪽에 끼고 내리막을 따라 달렸다. 은주는 이 길을 내달리는 동안만큼은 성현을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며 설렜다. 은주는 이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 산호사 해변에 도착했었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우도제일교회에서는 오르막을 거슬러 올라가야 산호사 해변과 가깝다. 내리막의 끝에서 차 머리를 돌려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다시 생각해보니 자전거보다 전기차가 더 낫기도 했겠다.


산호사 해변에 앉아 마주 본 제주도

섬을 가로질러 은주가 성현을 기다렸던 산호사 해변에 앉았다. 서로를 보고 싶어하는 남녀가 처음 만나자 할 곳으로 딱이다. 그날은 2000년 3월 11일이었다. 하지만 1998년 3월 4일에 살고 있는 성현은 무슨 수를 써도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 둘은 운명적으로 2년 1주일의 시간을 두고 다른 시공간에 살기 때문에, 일 마레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을 수는 있어도 만날 수는 없다. 기껏 성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1998년의 은주를 만나러 전철역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현이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1998년의 은주는 성현을 알 리 없다. 은주가 기다리는 사람도 성현이 아닌 다른 남자다.


이때부터 관객은 이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조금 짐작할 수 있다. 2000년을 살고 있는 은주 옆에는 성현이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2년 후의 그 사람 옆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이걸 나에게 적용하자면 대략 이런 상황일까. 내가 2년 후의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데 그때 아내 옆에 내가 없다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서럽고 우울하다. 그 운명만큼은 어떻게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꿔야 한다.


좋든 나쁘든 알아도 별 수 없을 걸 괜히 알아버렸다 싶은 미래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일 마레의 우편함을 한 번쯤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2년 후의 아내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2025년 무턱대고 회사를 그만두다시피 한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내가 약속한대로 2027년의 우리는 2025년의 우리보다 잘 살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다.


만약 그렇다는 답장이 온다면, 그게 모두 2년 전 나를 응원해준 덕분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수시로 흔들리던 나를 끌어안고 위로해줘서 고마웠다고.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꼭 산호사 해변보다 더 멋진 곳에 집을 짓고 살자고. 영화에서와는 다르게 나는 꼭 이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달려가 옆에 있겠다고, 지금 형편에선 차마 입이 민망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편지에 담아 보내고 싶다.


산호사 해변에서 행운을 기원하며, 2025년 5월 27일. 신동욱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인어공주>, <화엄경>, <연리지>, <시월애> 등을 촬영한 한국영화 박물관섬

- 교통 & 접근성 ★★★★☆

성산에서 우도까지 배로 딱 15분

- 풍경 & 자연 ★★★★★

우도봉, 몽돌밭, 산호사 해변 등 영화와 일상이 겹치는 절경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짧게 잡으면 모를까 섬 전체 트레킹에는 반나절 이상 소요

- 감성 & 사색 ★★★★

마을버스, 전기차, 자전거 등 교통수단마다 다른 재미와 감성


*여행하며 듣기 좋은 노래

- 김현철, 'Must Say Good Bye'(영화 <시월애> OST)

- 김현철, '시월애(Main theme)'(영화 <시월애>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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