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이장호의 외인구단>
어느 답사에서는 기대만한 수확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어우동>(이장호, 1985)을 성산일출봉에서 촬영했다는 기록은 있다. 동아닷컴에서 쓴 '98 IMF 맞춤 바캉스 특집 - 4계절 낭만여행 PART 2'는 성산일출봉을 '영화 <어우동>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장소'라고 소개한다. 오마이뉴스에도 기사가 있다. 2004년 시민기자가 작성한 '삐걱삐걱 페달 굴리며 제주도를 돌다'에서도 성산일출봉에서 <어우동> 마지막 장면을 촬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우동> 마지막 장면은 동굴에서 촬영했다. 그곳에서 어우동(이보희)과 갈매(안성기)가 뜨거운 사랑을 나눈 뒤 스스로 마지막을 결행했다. 서로를 어찌할 수 없었던 두 인물의 감정은 동굴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기사 정보대로라면 성산일출봉에 그 동굴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오름에서나 내려다본 적이 있을 뿐 성산일출봉에 오른 적이 없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을 더듬어 본다는 구실로 성산일출봉을 가려니 마음이 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아닷컴 기사는 1998년이라는 추정 연도 외에는 언제 누가 기사를 작성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마이뉴스 기사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동아닷컴의 정보를 그대로 가져다 썼을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둘 다 100% 신뢰하기는 어려운 정보였다. 다른 보충자료들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의미 있는 기록은 없었다. 내 눈과 발로 직접 진위 여부를 확인할 차례였다. 곧장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제주 동쪽 해변으로 영화 촬영지 답사를 오려면 숙소는 '제주스테이인성산'을 추천한다.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우도와 가까우면서도 바닷가와는 약간 거리를 두고 앉은 곳이다. 비용도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숙소 내부 컨디션도 괜찮고, 무엇보다 창 밖 '논 뷰'도 쾌적하니 한적해 답사 숙소로 최적이다. 가족 단위 여행가 아니라면 이곳은 숙소에 콕 박혀서 글쓰기에는 알맞은 환경이다.
답사는 정말 힘들다. 사정 모르는 분들이 가끔 '여행 다니니 좋겠다' 하시지만 그렇지 않다. 동선을 잘 잡더라도 하루에 적어도 2만 보는 넘게 걸어야 한다. 체질마다 다르겠지만 일주일 정도 어딜 답사하고 오면 바지 허리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넉넉해진다. 아내는 목 아래와 목 위 살색이 다르다며 놀린다. 많이 돌아다니니 활동량이 많아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챙겨 먹으면 비용도 많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녀도 대부분 시설들이 오후 6시부터는 이용을 제한하기 때문에 예정된 일정에서 한두 곳은 다음 날로 밀리기가 일쑤다. 돈과 시간과 체력을 알뜰하게 아껴야 한다. 그래서 숙소가 중요하다.
성산일출봉은 오후 8시까지 개방하지만 나는 전날 저녁 미리 숙소에 짐을 풀었다. 다음 날 눈을 뜨면 곧장 모자만 둘러쓰고 성산일출봉에 오를 계획이었다. 일출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소풍 가는 게 아니니까, 일출을 보려 한다면 그건 영화 촬영지 답사를 일로 하려는 작가의 자세가 아니라며 나름 비장했다. 나는 다만 사람 없을 때 방해를 덜 받고 여유있게 성산일출봉을 답사하고 싶었다. 날만 좋다면 아침 이른 시간부터도 사람이 많을 것이었다. 성산일출봉 외에 섭지코지, 우도 등 하루동안 답사 갈 곳도 많았다. 기상 알람과는 딱 10분만 늦잠을 합의하고 처진 몸을 일으켜 오전 5시쯤 주차장에 차를 댔다. 이미 유료 코스로 올라가는 분들이 많았다.
부지런히 동굴부터 찾았다. 정상부 절벽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풍화혈 또는 돌개구멍이라고 부른다. 혹시 이중 하나일까 하고 보니 그쪽으로는 등산로가 나 있지 않았다. 설령 등산로가 닿는 곳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들어가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배우들과 촬영팀과 촬영에 필요한 장비까지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선자리에서 핸드폰을 켜 영화를 다시 틀어 뒷부분만 몇 번을 돌려보았다. 마지막 장면이라면 분명 동굴이 맞았다. 하지만 영화 촬영지라면 도무지 돌개구멍일 수는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답사를 시작하도록 한 문제의 '닷컴 정보'가 서서히 의심스러웠다.
성산일출봉에는 동굴 난 곳이 하나 더 있다. 이곳을 가려면 성산일출봉 탐방로 반대편으로 가야 한다. 해변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일제가 전쟁한답시고 함부로 뚫어놓은 동굴들이 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허가를 받아 내부를 촬영하기도 했고 찾아보면 더러 이곳에서 사진을 찍은 관광객들도 있다. 산 정상부 절벽 동굴에 비하면 접근하기도 수월하고 동굴에 들어가볼 수도 있지만 이곳도 <어우동> 촬영지일 수는 없다. 영화 속 동굴에는 종주석과 석주가 위아래로 뻗어있다. 인공동굴이 아니고 자연동굴이다. 갈매가 스스로 최후를 결심할 장소로 제작진이 일본군 동굴진지를 섭외하기도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먼저 '닷컴'에서 말한 '마지막'이 꼭 제일 마지막을 가리키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성산일출봉에서 찍었음직한 장면은 극중 산악 활극 정도이다. 어우동을 잡으려는 포졸들과, 갈매를 포함하여 그녀를 지키려는 무리가 맞서고 도망치고를 반복하는 장면이다. 아주 마지막 장면은 아니더라도 영화 전체로 보면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능성은 없다. 극중 산세는 산맥으로 이어져있다. 성산일출봉은 수중 폭발한 마그마로 형성된 화산체이다. 산맥이 있을 리가 없다. 산세를 보나 영화 제작의 편의성을 보나, 추격전을 촬영한 곳은 충북 단양에 있는 중선암 근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극중 어우동과 성종이 어울렸던 장소다.
마지막 경우의 수는 검열에 의한 편집이다. 이것도 가능성이 높지 않다.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대담 김홍준, 작가)를 포함하여 이장호 감독이 촬영 비화를 고백한 인터뷰들을 모조리 살펴봤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을 편집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재심의를 해 잘라냈던 장면은 어우동 몸 위로 흐르는 술을 성종이 마시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영화 개봉 중 편집되는 바람에 본 사람도 있고 못 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설령 마지막 장면을 편집했다 하더라도, 닷컴 기자만 무편집본을 봤을 가능성도 없다. 종합하면, 동아닷컴과 오마이뉴스에서 성산일출봉을 <어우동> 마지막 장면 촬영 장소라고 소개한 정보는 재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해 보려는 사람들로 정상에는 이미 좋은 자리가 없었다. 나는 난간 쪽을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모두가 언제 해가 뜨나만 올려다 볼 때 혼자서만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성산일출봉 분화구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 상구(조상구)가 까치 앞에서 공을 던지고, 선수들이 베이스 러닝을 훈련하던 곳이다. 외인구단은 지옥훈련을 위해 동쪽으로는 성산일출봉, 서쪽으로는 차귀도를 오갔다. 전지훈련지가 성산일출봉이라니 실제라면 특혜도 이런 특혜가 없다. 조상구 배우는 여기서 야구공을 던져 본 처음이자 마지막 배우가 되었다. 허가만 받으면 출입도 가능하고 영화도 찍을 수 있었던 시절 이야기이다. 이제 이곳은 전체가 천연기념물일뿐더러 2007년부터는 세계자연유산이다. 촬영 당시보다 나무도 많이 자라 훈련도 더 이상 어렵지 싶다. 본명이 최재현인 조상구 배우는 이 영화에서 조상구로 출연한 후부터 예명도 줄곧 조상구를 쓰고 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로 사랑받았던 배우다.
사람들에게 등떠밀려 내려가고 싶지 않아 일출을 보려는 인파에 자리를 양보하고 하산길로 들어섰다. 딱 그때 해가 솟았는데 와, 이래서 성산봉이 아니라 성산'일출'봉이구나 했다. <어우동> 동굴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넉넉히 위로하고도 남을 절경이었다. 다시 인파를 조금 비집고 들어가 해 사진을 찍었다. 소풍 온 여행객이 되지 않겠다 다짐했었지만 그 해는 그럴 수 있는 해가 아니었다. 다시 하산길로 접어들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봤는지 모른다. 해가 꽤 솟아올랐고, 사람들이 하나 둘 내려올 태세를 보이고서야 나도 겨우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우도행 첫 배편을 탈 시간이다. 성산일출봉에 가려거든 아침 일찍 일어나기가 힘들더라도 꼭 한 번 일출을 보시라고 권한다. 이공이오공육일공.
✦ 성산일출봉 정보
- 위치: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 입장료 (유료 코스 기준):
성인: 5,000원, 청소년/군인/어린이: 2,500원 / 청소년 2,000원
(제주도민은 신분증 지참 시 무료)
- 소요 시간: 왕복 약 1시간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약 30분 소요)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이장호의 외인구단> 훈련 장면 촬영지라고 올 이유는 없음
- 역사 & 유산 ★★★★★
자연유산으로서 성산일출봉은 다른 말이 필요없다
- 풍경 & 일출 ★★★★★
날씨만 허락해준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이름값 하는 일출
- 트레킹 난이도 ★★★☆
무료 코스는 easy, 유료 코스는 운동화 아니고서는 못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