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페 서연의집

<건축학개론>

by 신동욱

이용주 감독이 처음부터 서연(수지 또는 한가인)의 고향을 제주도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썼으면 <건축학개론>(이용주, 2012)은 지금과는 대사 몇 줄이라도 달랐을 것 같다. 알고보니 서연이 나고 자란 곳을 감독이 제주도로 정한 시점은 꽤 나중이다. 작업 중이던 시나리오에서 서연은 단지 지방 출신이라고만 설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감독에게 제주도를 추천한 사람은 심재명 당시 명필름 대표였다. 감독과 제작진은 시나리오 골격을 먼저 완성한 후에 '그래서 주인공 고향이 어디냐'를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지금 '카페 서연의집' 자리에 공간을 마련하였다.


<이어도>(김기영, 1977)의 남석에게 제주도는 거슬러야 할 운명이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양영희, 2022)에서 제주도는 인물들이 '이데올로기를 넘어 수프로 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 또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그에 반해 <건축학개론>에서 제주도는 단지 영화 속 집이 있는 곳이기만 하다.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향토색이 짙은 섬이지만 영화에서는 국내에 있는 수많은 지방 중 하나처럼만 존재한다. 인물이 떠나온 고향으로서는 특별한 기능이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영화만 본다면 서연이 떠나온 집은 서울만 아니라면 어디든 가능했을 것같다. 서연의 집을 설계한 구승회 건축가 말마따나 춘천이나 서울 근교였을 수도 있었다. 감독과 제작진이 제주도에서 마침내 위미리라는 마을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말이다.

다른 지역에 있을 수도 있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카페 서연의집은 매력적인 공간이다. 영화에서 강조하지 않은 제주만의 향토색이 이 카페에만큼은 완연하다. 서연의집의 시그니처는 역시 폴딩 도어다. 수평으로 창문을 쭉 열어젖히면 푸른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귀도가 보인다. 근경에는 검은 현무암이 해안을 이루고 있어 여기가 제주도임을 바로 절감할 수 있다. 이 폴딩도어 앞은 카페를 찾는 손님들에게 근사한 포토존이 되었다. 카페는 제주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돌을 올려 담을 이루고 있다. 제주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돌담과 비슷하지만, 돌과 축대가 바다와 어울리며 수평을 강조하는 점이 약간 다르다.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향토색이 카페에는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곳에 <건축학개론>을 기억하는 영화 팬들과, 제주올레길 5코스를 산책하는 이들 또 마을 주민들까지 모여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시간을 보낸다.


대개 영화 제작 과정에서 세트로 지은 집은 곧 해체된다. <기생충>(봉준호, 2019)에서 극적 반전이 발생하는 대저택이나, 김기영 감독 작품 <하녀>(1960)에 나온 집은 아무리 가보고 싶어도 이미 없는 곳이다. 난 이 점이 늘 아쉽다. <기생충>이나 <하녀>나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들인데 모두 집을 허물고 말았다. 남겨두었거나 최소한 다른 곳에 복원하여 옮기기만 했더라도, 100년이 넘은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한 곳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영화 팬들이 찾겠는가. 꼭 영화 유산으로서뿐만 아니라 지역 관광 활성화 차원에서라도 영화 촬영지를 복원 또는 보존하는 방법은 정부 또는 지자체 차원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카페 서연의집이 좋다. 물론 이곳도 영화에 나온 세트 그대로를 구현하고 있는 공간은 아니다. 영화 제작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극중 서연의집은 임시 구조물로 완성됐다. 이후 <건축학개론>이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자, 명필름에서 이 건물을 다시 제대로 만들어 전시 갤러리 겸 카페로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구승회 건축가는 영화에서 바다와 마주 앉았던 집을 조금 뒤로 물리고, 지붕에 얹었던 기와는 최종 설계에 반영하지 않았다. 태풍 또는 거센 바닷바람을 마주할 집에 기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승민(엄태웅)처럼 2층 잔디 위에 누워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눈썰미 좋은 영화 팬들은 극중 서연의 집과 다른 점을 알아채기도 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카페 서연의집이 있어서 <건축학개론>의 생명력도 강해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다른 사람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즐기면 좋겠다. 그 방식은 건축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다. 촬영지를 보존하여 카페로 운영하도록 한 심재명 대표의 안목과 감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명필름에도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카페 서연의집 세트를 그대로 복원해 카페로 살려낸 점은 좋지만, 지금은 사실상 영화 속 내용과는 거의 무관한 공간이다. 기왕 운영하는 김에 좀 더 색깔을 입히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집을 지어 살고 싶어하면서도 건축을 어려워하니까, 이곳에서 비전공자도 배울 수 있는 입문자용 설계를 가르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주도 전통 건축의 역사와 특성을 가르치는 교양 수업도 좋다. 명필름 수준의 기획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아무렴 이 좋은 공간을 카페로만 활용하는 것보다야, 비정기적으로라도 전문가를 초빙하여 영화나 건축과 관련한 특강 또는 원데이 클래스라도 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카페 서연의집을 찾고 <건축학개론>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한다.


난 이곳에 두 번 왔다. 그중 한 번은 아내와 서귀포시청에서 혼인신고를 한 직후였다. 카페에서는 '기억의 습작'이 흐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폴딩도어 앞에 자리를 잡고, 우리 사랑만큼은 습작으로 남기지 않겠다며 훗날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은 전원주택을 각자 그려보았었다. 건축학개론 수업에서는 가르치지 않았을 탁월한 그림 실력이었다.

카페 명함을 얻어다가 아내와 함께 그렸던 집 그림. 아내 그림에는 텃밭이 있다. 내가 그린 집에는 운동장이 있다.

다만 이곳에 연인과 함께 온다면 첫사랑 이야기를 피할 수는 없을텐데, 일 키우지 말고 알아서 처신 잘하자. 까딱 잘못하면 카페 서연의집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될 수도 있다. 나중에 김동률 노래 들으며 바닷바람 혼자 맞아봐 납득만 안 갈 뿐이다. 다행히 난 아내가 첫사랑이다. 진짜, 사려니라떼 8000원, 납뜩이와플 6500원. 이공이오공육공오.


✦ 카페 서연의 집 정보

- 위치: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해안로 86

- 문의: (064)764‑7894

- 영업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라스트 오더는 오후 6시 30분, 매주 목요일 휴무)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건축학개론> 팬이라면 단번에 몰입, 원작 세트와 약간의 차이

- 교통 & 접근성 ★★★☆

차 없이 오기는 불편함

- 풍경 & 자연 ★★★★★

폴딩 도어 너머 바다, 지귀도, 현무암 해안, 돌담과 축대까지 완벽한 제주스러움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아예 없음

- 감성 & 사색 ★★★★★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습작’, 영화 OST 감성 200%


*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전람회 '기억의 습작'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구승회, 북하우스)

keyword
이전 02화차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