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 <이장호의 외인구단>
고전 한국영화 팬들을 설레게 할 <이어도> 집터와 <외인구단> 훈련장
차귀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약 1시간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라고는 해도 섬 자체가 크지 않아 1시간이라도 차귀도를 둘러보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다. 다만 나처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입도하시는 분들이라면, 배편을 예약할 때 업체 측에 미리 출도 계획 시간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관례대로 출도 시간이 정해진다. 워낙에 시간에 쫓기는 걸 싫어하는 나는 전날 업체와 통화하며 미리 한 시간 정도 더 양해를 구해두었었다. 4월 말이어도 한경면에 있는 선착장에선 바람이 차게 불어 걱정했더니 막상 차귀도는 따뜻했다. 그래도 얇은 셔츠나 무릎 담요 정도를 챙겨가는 편이 좋겠다.
개별 예약을 받는 낚싯배를 제외하면 차귀도로 가는 배를 운항하는 업체는 두 곳이다. 좀 더 배편이 많은 쪽에서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모두 13차례 운항한다. 이 배를 타고 선착장을 출발해 10분이면 차귀도에 닿는다. 제주도 서쪽에 있어 일몰 명소로 꼽히지만 나는 오전 가장 빠른 배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 시간에야 사람이 덜 붐비기도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 천남석(최윤석)이 저녁 배를 탄 적이 없다.
영화 <이어도>(김기영, 1977)는 차귀도 전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차귀도로 향하는 배에 탄 한 남자가 섬집 하나를 보고 있다. 섬 한복판에 돌로 벽을 올려 지은 집이다. 남자는 그 집과 사연이 있다. 섬에는 해녀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이 살았었지만 다 떠나고 이젠 그 집 딱 하나만 남았다. 실제도 비슷하다. 차귀도는 1978년 무인도로, 200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11년부터 일반에 개방되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사람이 살 때는 대략 열 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 집 한 채마저도 터만 남았다.
영화에서 차귀도는 파랑도라고 불렸다. 감독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이청준이 쓴 동명 원작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이어도는 섬사람이 저승길을 떠나 도착하는 말하자면 전설 속 극락 같은 곳이지만, 실제로도 존재하는 국토 최남단 해저 암초 이름이다. 이 암초와 형제섬이라고 불리는 다른 수중 암초 이름이 파랑도이다. 이 두 암초는 서로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부르기에 따라 어느 날엔 파랑도가 이어도가 되고, 이어도가 파랑도가 되고 하는 것이다.
차귀도에 내려 길 난대로 조금만 따라 오르면 <이어도> 속 그 집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이 집터가 유일하다. 위치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영화에서 천남석이 살던 집이 틀림없다. 이 집터 앞에 서서 바다 쪽을 돌아본다. 궂은 날씨에도 출항한 아버지를 기다리던 남석과 그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걱정이 무색하도록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던 아버지는 "이어도를 봤다"는 말을 남기곤 귀신처럼 사라졌고, 그 충격에 어머니마저 아버지를 따라가자 남석은 섬을 떠나기로 한다. 생전 "남석이까지 어부 만들지는 않겠다"던 어머니 말마따나 남석이 섬사람의 운명을 거스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남석은 섬을 곱게 떠나지 않았다. 남석은 민자에게 그러면 안 됐다. 그가 죽어 다시 이 섬으로 돌아온 건 운명이고 일종의 천벌이다. 그리고 죽은 남석이 민자를 통해 자손을 잇게 되는 장면은 한국영화 팬들이 <이어도>를 오래 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명장면이 되었다.
이 섬을 떠나고 싶었던 사람은 남석만이 아니었다. 오혜성(최재성)을 포함하여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 이하 <외인구단>)에 합류한 선수들도 이곳 차귀도에서 지옥훈련을 받았다. 생전 이겨낸 적 없는 훈련 난이도에 격분한 일부 선수들이 코치를 묶어버렸던 폐가도 바로 천남석이 살던 집이었다. <외인구단>에서는 외벽이 온전하다. 영화가 1986년작이니, 차귀도가 1978년 무인도로 지정되고도 이 집터는 꽤 오랫동안 형태를 유지했던 것 같다. 외인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훈련이 가혹해서, 또는 얼른 자기 실력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
대히트를 쳤던 원작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튀어나와 고된 훈련을 버티고 차귀도에서 출도한 선수들은 KBO에서는 물론 그해 영화계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지금은 중년배우가 된 최재성은 <외인구단>으로 그해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남성들 사이에선 이른바 '까치머리'가 유행했다. 영화가 개봉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도 정수라가 부른 '난 너에게'로 영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집터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곧 섬 정상이다. 정상에 도착해 섬을 내려다보며 두 감독이 차귀도를 촬영지로 정한 이유를 짐작해본다. 우선 <이어도>는 영화 속 설정이 실제 차귀도와 닮기도 했고, 무엇보다 극중 배경이 제주도이다. 감독이 차귀도를 찾았을 배경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무인도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차귀도 같은 무인도는 바람이나 날씨가 문제라면 몰라도 주민에게 양해를 구할 일은 없다. 여기에 집 한 채가 섬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쓸쓸함과 처연함이 제주 바다 절경과 어우러진 분위기가 영화와 잘 맞았을 것이다. 촬영지로 차귀도를 고른 김기영 감독은 스태프와 배우들과 함께 제주도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이어도> 촬영을 마쳤다.
<이어도>에 비하면 <외인구단>을 꼭 차귀도에서 촬영했어야 했던 이유는 선명하지 않은 것 같다. 차귀도는 제주도로 치면 서쪽에 있어 일몰이 예쁜 곳으로 이름이 났다. 반면 <외인구단>의 또다른 촬영지인 성산일출봉은 동쪽 끝에 있다. 두 곳은 같은 제주도에 있더라도 서로 정반대쪽에 있어 지금 기준으로도 차로 거의 2시간 거리이니 그땐 더 걸렸을 것이다. 제작비 때문에라도 이동 동선부터 짧게 정했을 텐데.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차귀도가 썩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수들이 매달린 절벽의 기암괴석이 멋지긴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이기만 했을까.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해운대에 있던 술집에서 이장호 감독을 만난 일이 생각났다. 그때 같이 사진만 찍을 게 아니라 <외인구단> 촬영 비하인드라도 여쭸어야 했다.
차귀도 정상에서 남석을 생각해본다. 그는 섬을 정말 떠나고 싶었을까, 아니면 실은 섬에 남고 싶었을까. 물론 떠나고 싶었을 것이지만 아마 사실은 남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파랑도는 차마 어찌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건 남석뿐만 아니다. 누구라도 살면서 한 번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고향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나면 오고 싶고, 오면 떠나고 싶은 곳이 고향이다. 삶은 그렇게 떠났다가 정착하고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시네마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90)의 토토(마르코 레오나르디) 또는 <자산어보>(이준익, 2021)의 창대(변요한),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2018)의 혜원(김태리)이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구보다 나부터도 부산을 떠나볼까 하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만 품고 여태 고향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여러 생각들과 질문들을 부지런히 정리하며 다시 배에 올랐다. "차귀도는 방금 여러분께서 둘러보신 본섬 죽도와 와도, 지실이섬 이렇게 세 개를 합쳐서 차귀도라고…." 돌아오는 길 유람선 가이드의 설명이다. 점점 멀어지는 차귀도를 보는 감상은 고향을 등지는 천남석이거나 지옥훈련을 마친 오혜성처럼 결연하지 못했다. 그들과는 달리 나는 이상하게 차귀도를 꼭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아내는 연신 창문에 코를 대고 돌고래를 찾고 있었다. 이공이오공오이삼.
✦ 차귀도 배편 정보
- 출발지: 차귀도 유람선 선착장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노을해안로 1160 1층)
- 문의: (064)738-5355
- 소요시간: 길면 15분, 트레킹은 약 1시간
- 운항 시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약 30분 간격, 2025년 기준)
- 주의사항: 사전 예약 필수, 신분증 지참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고전 한국영화 팬들을 설레게 할 <이어도> 집터와 <외인구단> 훈련장
- 교통 & 접근성 ★★★★
고산포구에서 배로 10분, 오전 9시 30분 첫 배 추천
- 풍경 & 자연 ★★★★☆
바람과 일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바다
- 트레킹 난이도 ★★
섬 자체가 크지 않지만 평지는 아니어서 약간의 경사는 각오해야 함
- 감성 & 사색 ★★★★★
떠남과 귀환, 고향의 이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제주 민요 '이어도사나'
- 정수라 '난 너에게' (1987)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이청준 「이어도」(도서출판 열림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