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회피도 재능이랄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하고 싶은 일만 요리조리 정말 잘 피해다녔다. 남 보기에 그럴듯한 직장만을 절묘하게 옮겨 다니며 체면 차리기에는 늘 성공해왔다. 그런데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짜 인생이었다고까지 박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 다독여봐도, 진짜인 나로 살아봤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태어나 꼭 해보고 싶던 꿈 하나가 <인사이드 아웃>(피트 닥터, 2015)의 빙봉이 또는 <시민 케인>(오슨 웰즈, 1941)의 로즈버드처럼 나로부터 동동 떠내려가고 있었다. 번듯한 명함만을 좇다가 관뚜껑 덮일 때서야 후회할 것이 분명한 인생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다시 내 삶의 주도권을 나에게로 가지고 와야 했다. 그게 정말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수 년만에 마침내 다니던 회사를 정리했고, 첫 글을 쓰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기왕이면 내 전공인 영화를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비평은 내 재능이 닿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면 난 어떤 글을 쓸까, 여기서부터 원고 컨셉을 고민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원고에 선명한 영감을 준 두 영화가 있다. <자산어보>(이준익, 2021)가 개봉하던 해에 나는 지자체장이 되겠다던 어느 정치인의 선거 캠프에 있었고, 후원회 사무실과 가까웠던 재래시장을 자주 오갔다. 시장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만큼만 꾸준하고 착실하게 벌어 먹고 있었다. 세상을 이롭게 바꾸는 건 정치가 아니고,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정을 나누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캠프에서 주고받는 말 속에 그곳의 삶은 들어있지 않았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능력이 나와 후보와 캠프에는 없었다. 나는 다만 청무우밭인 줄 알고 내려간 바다에 날개가 젖어버린 처량한 나비였고, 야심있게 뭍으로 나아갔다가 처참하고 참혹한 현실을 어찌할 수 없어 그만 갓끈을 풀고 낙향한 창대(변요한)였다. <자산어보>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던 그 길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흑산도로 떠나 차라리 정약전(설경구)이나 창대가 되어 버리고 싶었다.
다른 한 편은 <파이란>(송해성, 2001)이다. 두 남녀가 말 한마디 인사도 나누지 않고도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아주 독특한 이 멜로 영화를 보면서 나는 두 남녀가 간 길을 한 번씩 나누어 따라 가보고 싶었다. 파이란(장백지)이 한국에서의 여정을 시작하는 여객선 터미널에서부터 종착지인 바닷마을까지 한 번, 강재(최민식)가 출소 후 삶을 시작하는 오락실에서부터 경수(공형진)와 함께 조직생활을 하던 허름한 아파트까지 또 한 번. 이렇게 하면 파이란과 강재는 서로 제대로 마주한 적 없지만, 왠지 나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낯선 타국에서 스러져간 조선족 이주 여성의 처연한 삶과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거친 남자의 생을 그것이 비록 픽션이라 하더라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영화가 지나간 곳에서>는 우리나라 영화 촬영지들을 지역별로 모아 쓴 기행문이자 지극히 사적인 답사기이다. 창대와 함께 나룻배 타고 흑산도로 가고 싶었던 내가, 파이란이 강원도 바닷마을로 흘러 들어온 경로를 졸졸 따라 가보고 싶던 내가 영화라는 귀신에 홀린 듯이 찾아갔던 수많은 촬영지들을 이제 독자들에게 소개해보려고 한다. 독자들께도 따라 가보고 싶은 영화나 영화 속 주인공 또는 꼭 가보고 싶은 영화 촬영지가 하나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이 가이드가 되었으면 하면서 책을 썼다. 꼭 한 번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 촬영지들을 여행해보시기를 추천하고 싶다. 로케이션 답사는 한 영화를 깊이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카메라의 위치나 앵글, 배우의 동선과 제작 환경, 공간적 배경 설정 같은 내적 요인은 물론 건축, 음식, 음악, 독서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다시 한 번 더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여러 책으로부터 귀한 정보를 얻고 저자들로부터 작가로서의 태도를 배워가며 집필했다. 「제주영화사」(김종원, 한상언영화연구소)와 「부산 영화촬영지 답사기」(문관규 외,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그리고 「군산 시간을 걷다」(전세환, 구영길)와 「순천의 기록자들」(양진석, 시너지콘텐츠) 또 「서울의 영화」(서울역사편찬원)는 영화 촬영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짧던 내가 어떤 영화를 먼저 구해보고 어디부터 가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교학사에서 나온 「주말에 떠나는 드라마 & 영화 테마여행」과 「TV드라마 & 영화 촬영지 여행」(김정수)도 책이 오래 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영화 팬들에게 회자되는 여러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구승회)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촬영지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사람도 영화 속 공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고마운 책이다. 「영화가 좋다 여행이 좋다」(세라 벡스터, 올댓북스)도 내 원고가 추구하는 방향과 닿아있다. 언젠가 나도 한국영화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 곳곳의 촬영지들을 답사하고 그 기록을 남기고 싶다.
주성철이 쓴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김영사)는 영화 촬영지 답사기가 어때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이정표 같았다. 역시 작가 스스로부터 신이 나고 흥이 나야 좋은 책이 나오기는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아내와 함께 크리스마스 여행을 홍콩으로 다녀왔었다. 마지막으로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있다. 서로 목적지가 다르지만, 내 글이 영화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되기를 바라며 원고를 썼다. 답사지를 살펴보는 안목과 애정, 필력까지 배울 점이 참 많은 책이다. 이 외에도 원고 집필에 직간접적 도움을 준 모든 연구자와 저자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게 수많은 작품들을 선물처럼 안겨준 이 시대 영화인들에게 큰 빚을 졌다. 그들이 없었으면 결코 나오지 못했을 책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책 1편을 제주에서부터 시작하는가. 나도 처음 원고를 기획할 때 1편은 어쩌면 <자산어보>의 흑산도가 있는 전남이거나, <파이란>의 바닷마을이 있는 강원도이리라 막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원고 집필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연고지인 부산도 좋은 대안으로 고려할 수 있었다. 다만 퇴사하고 아내와 함께 떠난 첫 여행지가 제주였다. 온통 머릿 속이 원고 집필로 가득차 있던 나는 아내와의 제주 여행에서 자연스럽게 원고 집필을 시작해버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유홍준 선생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편 답사지를 강진과 해남으로 정하시고는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내 경우에는 사실상 무작위나 다름없다. 역시 인생은 절대 내 계획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재밌다.
이공이오공오일오. 부산 거제동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