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화엄경> <연리지>
입도 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우도에는 천진항과 하우목동항이 있다. 성산포항에서 우도로 가는 배는 이 두 개 작은 항구 중 하나에 닿는다. 아침 첫 배를 타면 천진항에 내리는데 나는 하우목동항에서 내렸어야 했다. 우도 답사를 위해 예약한 작은 전기차 렌탈샵이 하우목동항 근처에 있었다. 천진항에서 하우목동항까지 걸어가야 하는 시간과 거리를 계산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빨리 우도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오후 시간을 아낄 수 있겠다며 내린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두 번째 실수였다. 5분 단위로 답사 계획을 짜는 계획적 인간의 우발적인 결정이었다. 그렇게 천진항에 내렸고, 차 없이 우도 답사를 하려니 시작부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천진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차중인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인어공주>(박흥식, 2004)에서 하리 주민들이 잔치를 벌이며 개통을 반겼던 마을버스였다. 나도 그만큼이나 버스가 반가웠다. 덕분에 시간도 아낄 수 있고, 계획에 없이 우도에서 마을버스도 타보겠다고 생각하니 차츰 기분이 좋아졌다. 마을버스는 <인어공주>에서 누군가 내게 꺼내어 보내준 깜짝 선물 같았다. 영화 속에서 어린 연순(전도연)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들뜬 마음에 '오라이'를 외쳤다.
마을버스 출발까지 남은 10분 동안 천진항 근처를 돌아다녔다. 어쩌다보니 답사를 천진항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곳도 예사로 지나칠 곳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지명을 언급하지 않지만, 극중 도현(故 이선균)이 여자친구인 나영(전도연)의 모친인 연순(고두심)과 함께 배를 타고 들어와 내린 곳이 천진항이다. 이곳에서 도현은 자판기 커피로나마 연순에게 마음을 얻으려고 했었다. 예비 장모에게 돌아온 건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타박이었지만 말이다.
도현을 따라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볼까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영화 속에서 천진항 대합실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해녀상이 자리잡고 있다. 도로를 회전교차로로 정비하면서 대합실도 옮겨 새로 지은 모양이었다. 해녀상에도 사연이 깊다. 1920년대 일제는 우뭇가사리나 미역 같은 해초를 사실상 빼앗다시피 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맞섰다. 1931년부터 이듬해까지 집회에 나선 해녀들이 1만 7000명이 넘었다. 이를 '제주해녀항일운동'이라고 부른다.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이다. 천진항에 있는 해녀상은 이 '제주해녀항일운동'을 기리고 있다.
마을버스는 해안길로 곧장 질러 하우목동항으로 가지 않고 섬 중심부 쪽을 향했다. 나는 마을버스와 함께 천천히 <인어공주>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버스가 훑어주는 우도 골목 골목마다 영화 속 어린 연순이 해물파전을 돌리던 이웃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도를 예전부터 오랫동안 두고 지켜 봐온 분들은 더러 상실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도는 제주도 부속섬 중에서는 가장 일찍 관광 산업이 발전한 곳이어서, 우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고유한 정서가 빠르게 옅어졌다. 체감으로는 외국 관광객이 몰리는 검멀레 해변 쪽이 특히 그렇다. 주차난에 쓰레기로 우도가 급속도로 망가지자 제주도는 2017년 외부차량의 우도 통행을 한시적으로 제한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다행히 이만큼이나마 향토색이 남아 있다고 할까. 해변가는 몰라도 섬 복판에는 아직 예스러운 멋이 남아 있었다.
마을버스를 전기차로 갈아탄 뒤 다시 천진항 쪽으로, 이번엔 바닷가를 따라 가면 우도 영화 촬영지 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나는 먼저 우도봉으로 향했다. 우도봉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은 한국영화가 거쳐간 곳이다. 우선 <인어공주>에서 어린 진국(박해일)과 연순(전도연)이 받아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며 사랑을 키웠으면서도 또 이별을 예감하기도 했던 곳이 우도봉 아래 몽돌밭이다. 아역 배우 시절 오태경도 영화 <화엄경>(장선우, 1993)에서 말 그대로 엄마 찾아 삼만리하다 우도 등대에 닿았고, 한류가 한창이던 때 최지우를 앞세워 만든 영화 <연리지>(김성중, 2006) 나무가 있던 곳도 우도봉이다.
<연리지>가 개봉하던 해에 지자체와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는 영화에서 소품으로 사용한 연리지 나무를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제작사가 제주관광청에 나무를 기증하는 형식이었다. 제주도 입장에서는 영화가 흥행한다면 관광객들이 우도봉에 몰릴테니 시설 유지비가 좀 든다 하더라도 훨씬 남는 장사라고 봤을 것이다. 제작사도 촬영이 끝나 필요하지 않게 된 나무를 지자체에 기증하는 쪽이 철거 비용을 줄이고 영화도 홍보할 수 있어 여러모로 좋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쪽 모두 크게 이익을 보지 못했다. 일단 영화를 본 사람이 많아야 연리지 나무든 우도봉이든 소문이 났을 텐데 <연리지>는 누적 관객 11만 명을 기록하며 흥행 면에서 대참패했다. '최지우 파워'가 먹힐 거라 보고 일본 포니캐년에서 350만 달러에 영화를 사들이지 않았다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연리지 나무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2007년 가을 태풍 피해로 훼손됐다. 제주도는 연리지 나무가 있던 자리에 소나무 두 그루를 다시 연리지 모양으로 심었지만 이마저도 바닷 바람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제주도는 나무와 안내판을 모두 철거했고, 영화 <연리지> 촬영지로 우도봉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서서히 줄어갔다.
당시 제주도는 극중 최지우의 집을 '최지우 하우스'라 하여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었다. 또 우도 내에 '연리지 테마파크'를 조성할 계획도 있었다. 태풍에 넘어진 연리지 나무도 원래 이곳으로 옮기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빛을 보지 못하고 모두 구상 단계에 그치고 말았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영화 팬들이 오랫동안 찾는 촬영지에는 몇 가지 조건 또는 공통점이 있다. 당연히 일단 언젠가 역주행이라도 할 수 있게 영화부터 재밌어야 하고, 촬영지에 세트나 소품도 잘 보존돼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연리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연리지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한국영상자료원이 2002년부터 진행한 사업 '영화의 고향을 찾아서'을 통해 당시 북제주군, 현 제주시와 함께 세운 '영화의 고향'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에서는 <연리지>가 아닌 <화엄경> 촬영지로 우도봉을 소개하고 있다. 연리지 나무가 있던 곳은 그로부터 10년도 전에 이미 선재(오태경)가 앉아 피리를 불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념비마저도 지자체에서든 한국영상자료원에서든 거의 관리를 하지 않고 있다. 기념비에는 <화엄경> 스틸컷이 세 컷 있는데 어떤 장면인지 알아볼 수 없다. 뭐가 보여야 '아, 여기가 거기구나' 할 텐데. 볼트를 조인 곳에선 녹물이 흘렀고, 아예 나사가 빠져버린 구멍도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얼룩 때문에 가뜩이나 작게 쓰여진 설명 읽기도 쉽지 않다. 이대로라면 이 기념비 철거마저 시간 문제로만 보인다. 아니, 솔직히 차라리 철거가 나아 보이는 수준이다.
<화엄경>은 장선우 감독이 그전까지 만든 작품들에 비해 다소 난해한 데다 지금 시점에선 '고전영화'로 취급될 만큼 오래된 작품이어서, 어지간히 친절한 설명이 아니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엉망으로 관리하고 있는 기념비를 보고서 작품에 관심을 가질 관광객이 있을까. 되레 작품에 안 좋은 이미지만 생길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화엄경>이 공포영화인 줄 알겠다. 지자체가 이런 식으로 기념비를 관리하는 건 작품을 만든 제작진이나 감독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도봉에 앉아 먼 바다를 내려다보며 잠시나마 <화엄경> 속 선재가 되어보려던 마음이 도로 들어간다.
기념비에 해당 작품의 특색을 살리지 않은 것도 아쉽다. 애초에 영화 세트나 소품이었다면 영화 촬영지로서의 매력이 더 있었겠지만, 꼭 기념비여야 했다면 그 모양은 극중 선재가 늘 지니고 다니던 피리나 담요 모양이어야 했다고 본다. 여기에 '선재가 다녀간 곳'이라는 짧은 설명이나 명대사 한 줄, 영화 제목만 남겨두는 게 좋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은 없다 - 영화 <화엄경>' 이런 식으로. 이 기념비는 <화엄경>을 보지도 않은 어느 공무원이 오로지 자신이 일하기에 좋은 방식으로만 만들어낸 결과물임을 지나치게 티내고 있다. 성산일출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좋은 경치에 왜 기념비를 방치하다시피 할까. 제주시든 한국영상자료원이든 누구라도 책임있게 개보수하면 좋겠다. '영화의 고향'이라는 수식어가 지금부터라도 부끄럽지 않으려면. 이공이오공칠공사
✦ 우도 배편 정보
- 출발 장소: 성산항 (운항 간격 짧음, 주차 유료) / 종달항 (주차 무료, 한적함)
- 소요시간: 약 15분
- 배편 요금 (왕복 기준):
성인: 10,500원/ 중고생: 10,100원/ 초등생: 3,800원/ 소아(3~7세): 3,000원 / 3세 미만: 무료
- 차량 선적: 일반 차량 입도 불가, 숙박 예정자 등 일부 조건에서만 가능
*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인어공주> 삽입곡)
- 남진 ‘마음이 고와야지’(<인어공주> 삽입곡)
- 신승훈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연리지> OST)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고은 「화엄경」(민음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