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해녀밥상, 섭지 해녀의집
제주 촬영지 답사 첫날 일정을 모두 마쳤다. 아침 7시 성산일출봉에서 시작한 일정을 오후 5시 넘어 섭지코지에서 끝냈다. 내 체력과 함께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됐다. 더 걷기도 힘들거니와 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해 사진 찍기도 어려우니 이젠 속절없이 쉬어 가야 한다. 마침 지난 달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찾아두었던 맛집이 생각났다. 작정하고 숙소에 차를 두고 걸어간다. 마땅히 주차장이라 할 만한 곳이 없는 가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단 위장에다 한라산을 부어 넣을 생각이다. 결혼 2년차 유부남의 귀여운 일탈이고 약간은 보상심리도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들어가 기억나는대로 글 몇 자라도 답사 원고를 쓰려면 약간의 도파민도 필요하다.
'섭지코지 해녀밥상'은 관광지 인근 평범한 식당들과는 다르다. 하루쯤 묵었다 가고 싶은 제주 돌담집에서 진짜 해녀께서 당일 잡은 해산물로 한상을 차려주신다. 1인상 3만 원인데, 1인상은 안 되고 2인상부터 주문할 수 있단다. 그래도 상관없다. 해산물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배도 고프니 2인상 정도 거뜬하게 먹을 수 있다. 아내와 함께 해산물을 먹을 때 난 한 번씩 3인분을 시키고 싶을 때도 있었 다. 허기질 땐 배고픈 마음에 스스로 혼자 2인분을 먹을 수 있다 여기기 때문인데, 그럴 때마다 아내가 말려 그러지 못했었다. 기왕에 혼자 떠나온 답사니만큼 기세 좋게 2인분을 주문해본다. 원래 포장이 안 되는데, 먹다 남으면 남은 음식 정도는 위생팩에다가 넣어주시겠다고 한다.
이곳 한상차림에는 안 나오는 해산물이 없다 할 정도다. 해삼과 멍게로 접시 하나, 삶은 문어만으로 접시 하나, 전복과 소라를 썰어 또 한 접시가 나온다. 여기에 해조류 한 가지와 한 사람 당 한 마리씩 옥돔구이가 나오고 성게알을 넣어 끓인 미역국에 밥 한 공기가 통째로 이 집 시그니처다. 태생이 통영이지만 해산물 특유의 비릿한 바다향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어지간히 싱싱한 해물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접시를 싹싹 비워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한라산 한 잔에 해산물을 종류별로 세 젓가락씩 야무지게 집어 먹는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식감이다.
이름난 명소 어디나 그렇든 제주도에도 소문과 맛이 비례하지 않는 이름난 식당들이 더러 있다. 주차장은 버스도 댈 수 있을 만큼 넓은데 정작 찾아가보면 맛이 기대 이하이거나, 부산에도 있을 것 같은 그저 그런 식당들이다. 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곳을 잘 안 가려고 한다. 워낙 내가 노포 감성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떼로 몰려가 먹는 식당에서는 뭔가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음식을 내는 것 같아 배불리 밥 먹는 기분도 안 들고 괜히 값만 비싸게 치룬다는 인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겐 '섭지코지 해녀밥상'이 딱이다. 이 글이 어지간히 알려져 가게가 손님들로 북적인다면 그때서야 지금 쓴 원고를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 답사기를 쓰는 입장에서 가봤더니 좋았던 곳을 감추고 소개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직무유기 아니겠나 싶다.
이곳 사장님은 내가 태어나 처음 만난 해녀이기도 하다. 가게 곳곳에 사장님 물질하시며 찍은 사진과 받은 표창이 걸려 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진다. 사장님은 매일 아침 물질을 나가 점심 때 가게에 오셔서는 내도록 성게알을 까신다고 한다. 그렇게 몇십 년을 해녀로만 일하시며 일가를 이루셨으니 이 가게에서는 음식 맛도 맛이지만 배울 것도 많다. 기왕에 작가가 되어보기로 마음 먹은 길 위에서 포기하지 않고 '섭지코지 해녀밥상' 사장님처럼 우직하게 한길만 파보겠다고 다짐해본다.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찾은 곳은 '섭지코지 해녀밥상'과 상호가 비슷한 '섭지 해녀의집'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엊저녁에 먹은 해산물을 또 먹겠다는 심보는 아니다. '섭지 해녀의집'은 <인어공주>와 <빛나는 순간>(소준문, 2021)에서 고향 제주도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배우 고두심 추천 맛집이다. 배우 성동일과 김희원, 김하늘이 예능 프로 촬영차 한 차례 다녀간 곳인데 이때 먹었던 음식이 겡이죽이다. 제주도 음식은 꽤 먹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음식이 있을 줄이야. 그 맛을 보지 않고 성산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일단 '섭지 해녀의집'은 풍경부터 그야말로 작품이다. 음식 한 숟가락에 성산일출봉 한 번 보는 식으로 식사할 수 있는 곳이다. 창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다뷰에 기분이 상쾌하고 황홀하다. 성산일출봉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 자리에는, 아침 이른 시간 문 열자마자 온다고 서두른 나보다도 먼저 온 가족 손님이 이미 앉아 있었다. 그만큼 명당은 아니라도 적당한 테이블이 있어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육지에 두고 온 가족 생각이 절로 났다. 그 시간 한창 출근 준비중이었을 아내는 글 쓰겠다며 혼자 답사간다는 나를 내심 따라오고 싶어 했다. 부모님께도 제주도는 신혼 여행 때가 마지막이다. 두 아들 기르시는 동안 뭐 대단한 일이라고 제주도 여행 한 번 하시지 못했다. 희곡을 써 이미 등단한 형님도 어디 여행 자주 다니는 성격이 아니어서, 나만 혼자 이번엔 여행이다 사실은 답사다 다음엔 출장이다 하며 제주도를 뻔질나게 다니고 있다. 답사를 마치고 책을 예쁘게 써서 돈도 많이 벌고 나면, 나도 꼭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올 거다. 가족들에게 이 풍경을 꼭 선물하고 싶다.
창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주문한 겡이죽이 나왔다. 향부터 예사롭지 않다. '겡이'는 한 마디로 게다.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다가 통째로 믹서기에 갈아 만든 죽이 겡이죽이다. 겡이죽에서 바다 게 향이 훅 올라오는데 후딱 한 입 물었더니 그야말로 게 한 마리가 입에 들어온 느낌이다. 다 먹고 일어서면 옆으로 걸을 것 같다. 제주도에 이런 맛이 있었구나 감탄하며 연거푸 죽을 퍼먹는다. 따뜻한 죽이 식도를 타고 내려와 위장에 차분하게 내려 앉는다. 해녀들에게는 겡이죽이 보양식이라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 속이 든든하니 힘차게 2일차 답사를 시작할 에너지가 생겼다. 제주도라 하면 몸국이나 돔베고기, 갈치구이는 알아도 겡이죽은 몰랐던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향토 음식이다.
'섭지 해녀의집'에는 겡이죽 말고도 먹어보고 싶은 해산물 메뉴들이 많다. 그 메뉴들을 하나 하나 맛보는 걸 다음 답사에 꼭 할 일로 남겨두고 성산을 떠났다. 이공이오공오공구.
✦ 섭지코지 해녀밥상
- 맛 ★★★★★
해삼·멍게·문어·전복·옥돔·성게알 미역국까지 한 상 차려지는 진짜 해녀밥상
- 가격 ★★★★☆
1인 3만 원, 2인상부터 주문 → 양·퀄리티 고려하면 납득할 만한 가격
- 분위기 ★★★★★
제주 돌담집, 해녀 사장님의 사진과 표창이 걸린 진정성 있는 공간
- 접근성 ★★★☆
주차장 다소 불편, 숙소에서 걸어가야 편한 구조
✦ 섭지 해녀의집
- 맛 ★★★★
게 한 마리가 통째로 입안에 들어오는 겡이죽 맛, 물회는 글쎄
- 가격 ★★★★
죽이라는 음식 특성상 가성비 높은 보양식 느낌
- 풍경 ★★★★★
성산일출봉이 창가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압도적 뷰
- 접근성 ★★★★
성산일출봉 인근, 관광객 동선과 겹쳐 방문하기 수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