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탕> <계춘할망> <빛나는 순간>
천아오름 정상을 향하는 차도를 노루떼가 막아섰다. 그중 가장 눈이 커보이는 노루 하나가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리들은 내 차 앞을 비켜서지 않았다. 노루가 사람을 공격하기도 할까 겁도 났다. 제주도에도 산간 지역을 동서와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들이 지난 수십 년간 많이 생겼을 터였다. 그래도 노루들은 터전을 지켜내 무리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신기함을 넘은 경이로움이었다. 카메라를 꺼내려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폰을 갖다댔을 때는 이미 임도로 몸을 피한 뒤였다. 사람과 동물이 사랑으로 함께 성장했던 영화 <각설탕>(이환경, 2006) 촬영지 천아오름에 답사객을 마중 나온 야생 노루라니. 시작부터 공교로웠다.
제주도에 천아오름은 두 곳이다. 하나는 한림읍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애월읍 광령리에 있다. <각설탕>은 후자에서 촬영했다. 광령리 마을공동목장에서 영화를 촬영했다는 기사가 있어 답사지를 특정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포털사이트 지도 서비스에는 '광령2리 마을공동목장'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데다, 천아오름 근처에 목장은 신엄목장 한 곳뿐이다. 이럴 때 영화 촬영지 답사는 순식간에 탐정놀이가 된다.
나는 두 가지 가능한 가설을 세우고 먼저 신엄목장에 도착해 나무 경계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목장은 한눈에 보아도 천둥이 마음껏 달릴 규모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목장에는 군데군데 공동묘지까지 있었는데, 묘지를 둘러싼 산담은 <각설탕>에는 없던 배경이다. 제주도 중서부 산간지역을 이어주는 산록서로도 목장 바로 앞을 지나간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도 주인공 시은(임수정)이 기수 꿈을 키우던 목초지 풍경과 거리가 있다. 신엄목장이 곧 광령2리 마을공동목장이라는 가설은 배제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나는 신엄목장을 오른쪽에 끼고 이번엔 천아오름 정상을 향했다. 무엇이든 내려다보일 오름 정상에서는 어떤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천아오름을 오르는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갈 곳 없을 때까지 오르막을 올랐지만, 오름 정상은 나오지 않고 대신 안내판 하나가 차량 우회를 유도하고 있었다. 내가 올라간 곳이 제주한라대학교 실습목장이며, 가축전염병예방법에 의해 동물사육시설 내 외부차량 출입을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다. 표지판 오른쪽으로 난 산길도 하나 있었지만 아예 입구에서부터 CCTV가 달려 있었다. 답사한답시고 잘못 들어갔다가는 현행범으로 내몰릴 판이었다. 오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허가가 필요해보였다. 덜컥 겁을 먹은 나는 좀 더 꼼꼼히 준비해서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얼른 숙소에 돌아와 다시 자료를 살폈다. 그제서야 광령리 마을공동목장이 매각됐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영화 촬영지였던 공동목장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두 번째 가설이 맞았다.
제주 지역 언론에서는 고유한 지역 공동체 문화인 마을공동목장을 심층 취재해 중요한 사료로 남기고 있다. 언론사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을 요약해보면, 광령2리 마을공동목장은 오래 전부터 완만한 초지를 울타리로 둘러 주민들이 공동으로 가축을 방목하며 관리해왔다. 공동목장은 마을 축산 소득의 기반이었고,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하지만 목축 인구가 줄고, 개발 압력이 커지면서 점차 용도를 잃어갔다. 광령리 마을공동목장뿐만 아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120곳이 넘던 제주도 내 공동목장은 토지 개간과 개발, 목축 방식의 변화를 겪으며 2023년까지만 77곳으로 줄었다고 한다. 제주시 용강 공동목장은 중국 자본 JS그룹에, 한림에 있던 대림 공동목장은 태양광 발전 시설로 팔렸다. 광령2리 공동목장은 2014년 제주한라대학교에 부지를 임대했다가 2017년 총회를 열어 매각을 결정했다. 제주한라대학교 실습목장 부지가 곧 공동목장이었다.
또다른 <각설탕> 촬영지인 신천·신풍목장도 기능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제주 동남부쪽 해안에 있어 푸른 바다와 드넓은 초원을 화면 하나에 담을 수 있는 신천·신풍목장은 영화 촬영지로는 매력적인 곳임에 틀림없다. <각설탕>에서는 시은이 천둥이를 데리고 나와 바다를 보던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빛나는 순간>(소준문, 2021)과 <계춘할망>(창, 2016)에도 시원하고 청량한 풍경을 제공했다. 내가 갔을 때에도 신혼부부가 두 커플이나 이곳을 배경으로 웨딩 스냅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포토존으로는 정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다만 이름이 목장이라도 더 이상 말이나 소를 기르지는 않는다. 이제는 겨울 한철 한약 재료인 귤피를 말리는 이색적인 풍경으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오고 있다고 한다.
마을공동목장을 보전하는 일은 단순한 자원 관리 차원을 넘어선다. 제주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고 지속가능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민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비조합원도 가축을 방목할 수 있도록 하며 공동선을 추구하고, 공동목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자원을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구성원들이 함께 관리하며 그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한 곳이 마을공동목장이다. 시대가 변해 점차 그 수가 줄어드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겠지만 색다르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보존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아오름 답사에서는 <각설탕> 촬영을 구실로라도 세트를 보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관광객들에게 입장 수익을 받아 제주 전통 목축 문화를 알리며 보존해나가는 방법이 광령2리 마을공동목장에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쉽지 않았겠지만 그럴수록 지자체와 제주영상위원회(현재 제주콘텐츠진흥원)가 나서 제작사와 마을 주민들을 앉혀 놓고 함께 머리를 맞댔어야 했다. 그랬다면 마을 공동체도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지금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시지탄일 뿐이다. 제작사에서 3억 원을 들여 지은 <각설탕> 세트는 촬영 이듬해인 2006년 영화 개봉을 두 달 앞두고 철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지자체와 주민 그리고 제작사 모두에게 아쉬운 결정이었다.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며 작품의 생명선을 연장하고 있는 영화 촬영지 찾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영화를 추억하고 싶지만 변해버린 마을공동목장으로는 위로받지 못하는 분들께 사시는 곳 가까운 경마공원을 추천해드린다. 천둥이는 영화 개봉 이후에도 매주 주말마다 과천 서울경마공원 관람대 옆 소나무 숲에서 영화 팬들을 만나오며 팬 서비스까지 확실히 했다. 그러다 2007년 갑작스런 산통 증상을 보이다 불과 4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마사회는 천둥이 유해를 경마공원 마혼비에 안치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천둥과 시은이 달리고 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제주 여행 전에 <각설탕> 한 번 관람하시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제주 승마체험장에 있는 말들이 전과 다르게 보일 것이다. <옥자>(봉준호, 2017)를 보고 나서 한동안이나마 고기를 끊었었다는 관객들처럼. 이공이오공팔공오
✦ 신풍·신천 바다목장 정보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일주동로 5417
- 주차: 목장 입구 인근에 소규모 임시 주차 가능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말 한 마리도 없다
- 교통 & 접근성 ★★★
성산과 표선 사이라 접근성은 좋지만 차 없이는 어려워
- 풍경 & 자연 ★★★★★
바다와 녹지가 함께 있어 예비 신랑 신부들에게 이름난 포토존
- 난이도 (낮을수록 쉬움) ☆
편안하게 다녀오면 된다
- 감성 & 사색 ★★★★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바다 + 목장 조합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제비꽃(임수정 Ver., <각설탕> OST)
- 제비꽃(윤사라 Ver., <각설탕> OST)
**천아오름은 계곡 및 사유지 출입 제한 등을 이유로 방문을 추천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