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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에서

프롤로그

by 신동욱

제주 영화 촬영지 답사를 끝내고 집에 오니 계절이 바뀌어 있다. 오랜만에 장롱에서 긴팔을 꺼내 입자니 설레는 기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산 하면 대부분 여름 바다를 떠올린다. 나는 가을 부산이 더 좋다. 성적 맞춰 입학한 학과에서 영화를 가르치기에 얼떨결에 영화학도가 됐지만, 나는 신입생이던 2009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기고 있다. 영화 산업이 전무하다시피 한 부산에서 영화를 전공한다는 건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부산을 떠나지 않을 이유가 하나 있다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이 기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 수백 편을 볼 수 있다. 현지에 가도 못 볼 영화를 발앞까지 배달해 주는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모여 앉아 서로의 통찰을 주고받으며 생각을 키울 수도 있다. 스크린에서나 보던 영화인들과 함께 씨네필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앉아 있으면 연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운이 좋다면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대화를 나눠볼 수도 있다. 영화학도에게 이보다 큰 메리트는 없다. 그리고 올해도 마침내 가을이 왔다.


'깐느 박'의 신작 <어쩔수가 없다>(박찬욱, 2025)를 우리나라 최초로 공개하던 30주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날, 어렵게 개막식 티켓을 구한 나는 잠깐 지나가는 장면에서 익숙한 장소 하나를 알아챘다. 만수(이병헌)가 아내 미리(손예진)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실직 사실을 알리던 곳이 다름 아닌 모교 부산대학교였다. 밋밋할 수도 있었던 만수 뒷배경에 입체감을 주던 독특한 창문 모듈은 분명 인문관의 그것이었다.


<올드보이>(2003) 때 한 번 최민식 배우와 함께 부산대 지하철역 아래 온천천까지는 왔었던 박찬욱 감독이 학교 안까지, 그것도 이번엔 이병헌 배우와 함께 왔었다는 사실에 나는 잠시 잊고 있던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제주편 원고 교정을 마친 상태에서 구직이 급해 잠시 멈췄던 영화 촬영지 답사를 쉽게 재개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저녁 도시락을 미리 준비해두고 아내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가 함께 영화의전당으로 넘어가 날마다 영화제 출석 도장을 찍던 나는, 폐막작 <루오무의 황혼>(장률, 2025) 엔딩 크레딧마저 올라가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제 나를 길러준 도시 부산에서 영화 촬영지 답사기 '영화가 지나간 곳에서' 2편을 시작하려고 한다.


<어쩔수가 없다> 촬영지인 부산대학교 인문관


가장 먼저 부산에서 촬영한 영화들을 리스트업한 후 촬영지부터 추렸다. 다른 지역 영상위원회와 달리 부산영상위원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씨네맵'을 제공하고 있다. 말 그대로 부산 영화 촬영지들을 총망라한 지도다. 감독별로, 작품별로도 로케이션을 검색해볼 수 있다. 이 지도 덕분에 부산 영화 촬영지들을 일차적으로 한 번 정리하며 동선을 대강 그려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화사적 의미가 있는 몇몇 공간들을 다시 꼽을 때에는 지도교수님께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쓰신 '부산 영화촬영지 답사기'(문관규 외,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를 살피며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깊이 또는 정보량을 내 원고에서 넘어보겠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거니와 처음부터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나만의 감성으로 새로운 답사기를 쓸 뿐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영화사에는 영화 팬들이 사랑하는 수많은 계단들이 있다.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25) 속 오데사의 계단은 영화학도가 아니라면 모르기가 더 쉽지만, 영화사에서는 일대 전환점이 된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영화에서 편집이 가지는 의미와 비중을 에이젠슈타인 감독이 그야말로 혁신했던 곳이 바로 오데사의 계단이었다. 오데사의 계단이 낯설다면 이보다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단도 있다. <조커>(토드 필립스, 2019)에서 주인공 아서(호아킨 피닉스)는 뉴욕 브롱크스의 어느 계단에서 춤을 추며 해방과 탈주를 불안하게 암시했고, 챔피언과의 결전을 앞둔 도전자 <록키>(존 G. 아빌드센, 1976)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필라델피아 미술관 정문 계단을 뛰어 올랐었다.


영화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오데사의 계단은 물론, 조커가 다녀간 계단은 'Joker Stairs'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계단은 'Rocky Steps'로 불리며 씨네필이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대저택에서 상류 사회를 잠시 맛보려던 <기생충>(봉준호, 2019)의 기택(송강호)과 가족들이 비를 쫄딱 맞으며 황망한 마음으로 내려갔던 서울 자하문터널 앞 계단도 이제는 포토존으로 개발되어 사랑받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영화 <전함 포템킨> <조커> <기생충> <록키> 속 계단


여러 계단 중 부산 중앙동 40계단은 피난민의 약속과 시장의 일상이 영화적 결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오래된 기억의 응집점이다. 피난수도 원도심 주민의 고되고 끈적한 삶이 녹아든 이곳에서 이명세 감독은 성민(안성기)이 마약상(송영창)을 죽이도록 했다. 영화 속 살인 장면은 대개 끔찍하고 폭력적이기 마련이지만 이명세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만화책을 한 컷 한 컷 넘겨 보는 것 같은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극중 인물의 감정 또는 액션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 위해 화면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편집 기법)으로 그만의 창의적인 스타일을 선보였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는 그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4위에 올랐다. 이른바 '40계단 살인 사건' 오프닝 시퀀스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뿐만 아니라 이명세 감독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이 영화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 받으면서 이명세 감독은 단숨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타일리스트가 됐다. 부산 영화 촬영지라면 가장 먼저 어딜 가봐야 할까 고민하다가 40계단에서부터 부산 영화 촬영지 답사를 시작한다. 마침 영화 속 그날도 지금처럼 샛노란 단풍이 떨어지던 가을이었다.


영화제는 폐막했지만 아직 나의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부산에 산다는 건, 영화를 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공이오일공공일, 부산 중앙동 40계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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