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사정 볼 것 없다> <지독한 사랑>
한국영화 명장면에는 유독 비 내리는 날이 많다.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의 터널 앞 결투 장면도 그랬고,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에서 다림(심은하)이 한 우산을 쓰고 사진관까지 정원(한석규)을 바래다주던 외롭고 처연하던 날에도 비가 내렸다. 이를 두고 이명세 감독이 “한국영화 제작비가 많지 않다는 걸 고려할 때, 가장 값싸게 화면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비”라고 농담처럼 얘기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일부러 비 오는 날을 골라 답사할 일은 아니지만, 꼭 날씨 좋은 날에만 촬영지를 답사할 필요도 없다. 마침 영화 속 장면과 날씨와 계절이 비슷한 날이라면 오히려 비가 좀 오는 게 서정적이어서 좋기도 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에서 이른 바 '40계단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날, 부산 중앙동엔 오늘처럼 비가 내렸고 샛노란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괜찮겠냐고 걱정하며 물었지만 나는 비가 와서 더 설렌다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저 남편이 또 가을을 타나보다 하고 웃는다. 하지만 심지어 오늘은 열흘이나 이어질 추석 연휴의 첫날이 아닌가. Oh, You're a holiday. 가사 모르는 곡도 곧잘 흥얼거리는 아내가 해맑게 음을 따라 부른다. 차에서는 비 지스(Bee Gees)의 'Holiday'가 흐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현실은 이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리게 흘렀다.
장성민(안성기)이 범행을 저지를 타이밍을 엿보기 위해 일당과 함께 주시하고 있던 40계단 앞에 도착하면 반가운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삼진라미넥스'는 이 골목의 시간을 대변하고 있는 이름이다. 라미넥스는 표면 보호와 내구성 강화를 위해 인쇄업에서 널리 쓰이는 코팅 기술이라고 한다. 40계단이 있는 동광동에는 인쇄업체들이 모여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부산의 원도심이던 중앙동 일대 관공서와 신문사, 학교들이 인쇄물을 대량으로 발주하면서 인쇄·제본·필름·코팅 업체들은 1960년대부터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부산시청이 지금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있던 시절 이야기이다. 부산작가회의나 부산시인협회 같은 문학단체들도 2000년대 초반까지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인쇄소 간판 대부분이 낡았고 문 닫은 곳도 더러 있지만, 영화 속 삼진라미넥스만큼은 타임캡슐처럼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극중 마약상(송영창)은 이 삼진라미넥스 건물 2층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촬영 당시 이곳은 '장터식당'이라는 가게가 있었고, 지금은 와키와키커피라는 카페가 들어서 영업중이다.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아내와 같이 천천히 40계단을 올랐다. 마치 사건 당일의 범죄자가 직접 되어보려는 프로파일러거나, 힘들었던 수사 과정을 뒤늦게 추억하는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속 박두만(송강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내 계단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본다. 십여 년 전 40계단 앞에는 우형사와 김형사, 장성민을 형상화한 포토존이나마 하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 사라졌다. 영화 촬영지를 유일하게 기념하던 그 하나마저 지자체의 인정사정 없는 행정 속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그런 식으로 잊혀질 영화가 아니다. 달리 살려 볼 방법을 고민하지 않은 중구의 결정이 아쉽다. 그래도 중구는 명색이 영화 도시 부산을 잉태했던 곳 아닌가.
40계단 앞에 40계단을 오시려는 영화 팬들이 있다면 차는 두고 오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극중 장성민이 마약상을 기다리며 정차했던 곳이라고 함부로 차를 댔다가는 납부 기간 내 과태료 3만 2000원, 그러지 않으면 4만 원을 내야 한다. 가까이에 주차장이 있지만 면수가 많지 않아 자칫하면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수바퀴를 뺑뺑이 돌아야 할 수도 있다. 반면 지하철을 이용했을 땐 중앙역 11번 출구와 도보로 5분 거리에 40계단이 있다. 고생하시지 말라고 미리 결론을 내려드린다.
이명세 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촬영하기 전에 이미 한 차례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독한 사랑>(이명세, 1996) 오프닝 시퀀스에서 배경이 되었던 공간이 영도다리 아래였다. 주인공 영희((故 강수연)는 싸우고 있는 두 남자를 지나 택시를 타고 와 이곳에 내렸었다. 영희가 내리면 영화는 곧 영민(김갑수)과 박교수(김학철)가 있는 횟집으로 장면을 이어간다.
횟집은 영민이 영희를 처음 만나 한눈에 반해 사랑을 시작하는 곳인데, 애 둘 아빠인 교수의 불륜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사랑이 얼마나 치열할지는 짐작할 만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명세 감독이 보여준 싸움이 이미 전쟁같은 사랑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인공 두 사람 사이 감정이나 서사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완전히 독립된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90년대 멜로 서사에 익숙했던 당시 관객들에게 <지독한 사랑>의 느닷없는 시작은 아주 낯선 것이었다.
<지독한 사랑>에서 메인 플롯과 동떨어져 있던 이 짧은 액션 씬은 '이명세 유니버스' 안에서만큼은 강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지독한 사랑> 다음 작품이면서 이명세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작 <지독한 사랑>을 통해 부산에서 한 차례 액션 씬을 찍어 본 이명세 감독은 영희가 택시에서 내렸던 영도다리 아랫길 순찰을 우형사(박중훈)와 김형사(장동건)에게 맡긴다. 두 형사가 3년만 더 일찍 왔으면 <지독한 사랑> 속 두 남자의 싸움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더니 이번엔 장성민을 시켜 중앙동 40계단으로 가 마약상을 죽이도록 했다. <지독한 사랑>에서 메인 플롯과 무관하게 싸우고 있던 두 남자가 지나고 보니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속 마약상의 조직원들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환영한다. 입문한 것을. 이명세 유니버스에.
이명세 감독은 멜로 영화 <지독한 사랑>을 액션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액션 영화인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멜로처럼 보이도록 한다. 바로 '40계단 살인 사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서였다. 두 영화가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같은 감독의 상반된 의도를 각각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훗날 인터뷰에서 이명세 감독은 40계단 씬을 위해 배우 안성기에게 이렇게 주문했다고 밝혔다.
사랑했던 첫사랑에게 편지를 주러 가는 감정으로 마약상을 찾아가 죽여 달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40계단 시퀀스는 살인 장면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쓸쓸하면서 아련한 감정까지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명세 유니버스는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지독한 사랑>에서 영희가 탔던 택시는 영도에 섰지만 극중 횟집은 영도에 있지 않다. 영도다리 아래 가장 유명한 횟집은 물레방아횟집이었다. 지역 주민들과 애주가들에게 아주 이름 난 곳이었지만, 영화 속 분위기와는 아주 판이하거니와 그마저 지금은 일대 재정비 사업 일환으로 폐업하고 없다. 영도다리 아래는 기본적으로 공장 또는 창고가 모여 있고, 앞바다엔 배가 정박해 있다. 여기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배 고치는 소리가 '깡깡' 한다고 '깡깡이 마을'이라 부르는 곳이 있을 정도로, 영도다리 아랫길의 실제 분위기는 낭만 넘치는 바닷가라기보다 으슥한 공단과 비슷하다. 영화를 제작했던 1990년대 중후반의 고급 일식집이 영도다리 아래 끼어 있을 틈이 없다. 다만 당시 횟집이 부산에 있었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지독한 사랑>은 극중 장면의 70%를 부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극중 영민의 카드 결제 내역에서 이명세 감독은 '리베라호텔'이라는 실제 상호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 명세서상 횟집 상호가 '부산횟집'이다.
한진중공업이 구조조정 절차를 밟게 되면서 가뜩이나 정주 여건이 좋지 않은 영도에 일자리마저 줄어들자 젊은이들이 쑥 빠져나가버렸던 영도다리 아래 폐공장 지대는 지금 완전히 변신중이다. 카페 무명일기가 오래 방치되었던 폐선박 수리 공장을 리모델링 해 들어서더니, 지금은 부산 커피를 대표하는 모모스 커피까지 이곳에 크게 분점을 낸 뒤로 가뜩이나 일방통행이던 일대 도로는 주말마다 정체를 빚을 정도가 됐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야 우형사와 김형사가 이 길을 아무 방해 없이 운전해 지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 도로 사정으로 치면 그건 경찰이었으니까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두 형사 주행 방향도 역주행이었다.
우형사와 김형사는 장성민을 잡기 위해 이곳에서 순찰과 잠복을 반복했었다. 영화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분께는 이때 자동차 밖에서 움직이던 카메라 방향을 유심히 보시라고 권한다. 형사 일이라는 게 의미없는 일의 반복이라던 우형사 대사가 끝나면 카메라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이어 카메라가 운전석 쪽 자동차 프레임을 지나고 나면 우형사가 하품을 한다. 곧이어 조수석 쪽 프레임을 지나면 이번엔 김형사가 하품을 한다. 컷을 나누지 않은 롱테이크 촬영이지만, 이때 자동차 프레임은 컷의 역할을 한다. 이 촬영법은 이명세 감독이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인장(印章)과도 같다. 리얼 타임으로는 20초 남짓한 짧은 컷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감독은 <지독한 사랑>에서도 똑같은 방식을 보여준 적이 있다. 영희를 기다리던 영민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시계 방향으로 두 바퀴 돌고 나면, 손님들로 꽉 차 보였던 가게엔 어느새 영민 혼자만 앉아 있다. 이땐 손님들의 뒷모습이 말하자면 컷이었다. 아주 그럴싸하고 멋진 영화 언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명세 감독 신작이라며 <M>을 본 게 이미 십여 년이나 지나버렸다. 모교 초청으로 이명세 감독이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강의 중간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고 기억이 맞다면 마침 이명세 감독이 화장실에 가시려던 것 같다. 팬이라며 사진 한 장을 부탁드렸고, 감독님께서 흔쾌히 응하시고는 내 폰을 봐주시던 장면을 내 인생이라는 영화 속에 *프리즈 프레임 하고서 오래오래 남겨두고 싶다.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다시 신작 영화를 촬영하신다면 연출부 막내로 자원봉사라도 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다.
비가 오던 그날의 40계단에서, 나는 영화보다 오래된 부산의 장면을 보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던 그 시간 속에서도, 도시와 영화는 여전히 사랑처럼 남아 있었다.
답사일: 2025년 10월 3일 (금)
✦ 40계단 이용 정보
- 주소: 부산 중구 대청로135번길 13
- 소요시간: 10~15분 내외
- 문의: 40계단문화관, (051)600-4046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40계단 살인 사건'만으로도 충분한 상징성
- 교통 & 접근성 ★★★ 대중교통 이용을 추천, 운전으로는 글쎄
- 풍경 & 자연 ★★ 사진 찍기에 마땅한 포토존은 X
- 난이도 ★ 어려울 게 없는 곳
- 감성 & 사색 ★★★ 부산의 희노애락이 이곳에
✦ 영도다리 아랫길 이용 정보
- 주소: 부산 영도구 봉래나루로
- 특이사항: 영도대교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5분간 도개 행사로 통행을 제한함
✦ 한 줄 평 & 별점
- 영화 감성 ★★ 영화 때문에 꼭 가 볼 이유는 없음
- 교통 & 접근성 ★★ 주말에 가면 주차 스트레스가 좀 있음
- 풍경 & 자연 ★★★ 영도대교라는 훌륭한 포토존
- 난이도 ★ 바닷가 안전 조심
- 감성 & 사색 ★★★ 폐공장을 리모델링한 도시 재생 카페 감성 굿
* 여행길에 들으면 좋은 노래
- 비 지스(Bee Gees) 'Holiday'
* 여행 전에 읽으면 좋은 책
- 채호기 「지독한 사랑」(문학과지성사, 1999)
*프리즈 프레임: Freeze Frame, 극중 인물의 감정이나 동작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 위해 화면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편집 기법. 이명세 감독이 자주 사용하던 표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