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식

박지윤 (2000.08.11)

by 안개홍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그대 기다렸던 만큼 나도 오늘을 기다렸어요.


2000년이 밝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똑같이 학교에 등교했고 학원을 갔으며 저녁에는 세이클럽 모여 학교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새벽까지 나눴다. 다만 변한 것이라고는 중학생이 되었다는 사실.


모든 것을 예민하고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그 나이. 난 이불 킥을 우주까지 날려버리고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터질 뻔한 경험을 그 해에 했다. 813번 버스를 타고 한참을 학교로 가고 있을 때 친구 녀석이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 아침에 머리 안 감지? 니 뒷머리 눌린 베개 자국이 그대로 있어. 뇌 수술한 사람 같아."


중고등학생이 꽉 찬 버스 안. 그 말을 내뱉자마자 주변 같은 학교 여자 아이들의 입에선 참지 못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온갖 시선은 나에게로 꽂혔고 마치 난 그 순간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렇다. 난 중학생이 되도록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았다. 아침에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 고양이 세수를 한 채 정신없이 교복을 입기 바빴고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냅다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귀가 빨개져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별안간 모든 머리카락이 바짝 하고 기립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학교 방향으로 몸을 튼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갔다. 내 뒤로는 친구의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와 여학생들의 웃음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그 날 이후, 난 아침마다 일어나 제일 먼저 머리를 감았다. 잠시 소파에 기댈 때도 짧은 머리카락이 눌릴까 봐서 꼿꼿하게 등을 바짝 세웠다. 내가 이처럼 헤어스타일에 신경 쓴 이유는 같은 반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그 여학생은 귀가 빨개졌던 그 날에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여학생 중에 한 명이었다.


그 여학생을 좋아하게 된 시기는 매년 학교에서 진행했던 가을 학예회 이후. 예나 지금이나 학예회에는 학생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장기를 마음껏 뽐내는 시간이었다.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고, 미술품을 그렸다. 내가 좋아했던 그 여학생은 춤을 잘 췄다. 그리고 오늘은 그동안 그녀가 갈고닦은 춤사위를 모든 남학생들에게 선사하는 날. 그녀는 박지윤의 <성인식>을 준비했다. 조명이 꺼지고 모두가 숨죽인 채, 헉헉대는 야릇한 신음소리로 시작하는 성인식의 인트로를 듣고 있었다.


짧게 층을 낸 머리. 친척 여대생 언니에게 빌린 것 같은 빨간 드레스. 배꼽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기장. 침침한 조명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실루엣. 공연장 안의 모든 이들이 숨죽인 채로 그녀에게 집중했다. 단언컨대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무대였다. 학생부장을 맡고 있었던 선생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질투 어린 여학생들의 수군거림. 입을 다무지 못했던 가장 친했던 친구. 그녀는 모두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 학교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같은 반 그 여학생 책상에는 아침마다 남학생들이 놓아둔 간식거리가 쌓여갔다. 모든 여학생들은 박지윤 머리를 따라 했다. 간간이 층을 낸 그 짧은 단발. 막 머리를 감고 대충 말린듯한 젖은 머리. 덕분에 사대천왕처럼 생긴 학생부장 선생님은 아침마다 여학생들의 머리를 검사하느라 쉴틈이 없었다. 남학생들에게도 변화는 찾아들었다. 짧은 까치머리에 덕지덕지 무스를 바르거나 젤을 발랐다. 머리에 윤기를 냈던 목적은 모두 같을 것이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나 역시 그중에 한 명이었다.


"너 춤 어디서 배웠어?"


그녀를 시기하던 한 여학생이 말했다. 그 시절에는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이 없었기 때문에 가수들의 안무를 따라 할 미러영상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디션>이라는 온라인 게임에서 아바타가 추던 성인식 댄스를 따라 추면서 스스로 배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감탄한 남학생들의 환호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대단하다 진짜."


학년이 끝나갈 무렵, 근거 없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내게 뇌 수술한 사람 같다고 놀렸던 그 친구는 내 옆에서 수시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학원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리는 저녁 7시 30분. 그녀와 같이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집에 가는 시간을 고백하기 가장 적절한 시간으로 정했다.


수업을 마치고 학원버스에 올라탔던 날. 나는 심장마비가 걸릴 것 같았다. 버스가 집 앞에 도착했다. 그 여자애가 먼저 내렸고 뒷이어 나도 내렸다. 보폭을 좁혀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던 중 그녀가 획하고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왜? 너 할 말 있어?"

"어... 그게 있잖아... 나 사실은..."

"야! 됐고 나 남자 친구 있어. 아, 그리고 너! 머리 좀 잘 감고 다녀. 더러워."


더.러.워


단호한 그녀의 세 마디 때문에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장에 멎어버렸다. 난 그 자리에 멈춘 채로 한동안 멍을 때렸다. 파르르 하고 손과 발이 저려왔다. 12월 중순. 우린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난 영어학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친구 녀석은 나를 놀리는 재미로 살았다. 처음 겪어보는 완벽한 거절에 심각하게 당황했던 실패 때문인지 그 뒤로 연애는 일절 꿈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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