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네

크라잉넛 (2001.06.01)

by 안개홍

밤이 깊었네, 방황하며 춤을 추는 불빛들

이 밤에 취해 술에 취해 흔들리고 있네요.

벌써 새벽인데 아직도 혼자네요.

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나의 소년 시절을 함께한 크라잉넛이 40대가 되었다고 한다. 격세지감의 사자성어가 새롭다. 그들과 함께 지친 달을 따러 하이에나처럼 노래방을 헤매던 사춘기가 떠오른다. <리니지>를 하며 새벽 2시까지 밤을 지새웠던 날. 비록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피를 나눈 혈맹이었다.


난 그 혈맹의 의리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보다 딱 3 레벨 높았던 청주 살던 고3 형님. 그 형은 새벽까지 우리와 게임을 하다가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 게임을 끝마칠 무렵, 크라잉 넛의 <밤이 깊었네> 가사를 채팅창에 도배했다. 마치 놀이공원 폐장시간에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오는 '안녕,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와 같은 그 느낌. 그 형은 혈맹중에서 인생을 리니지에 걸어버린 가장 용감한 기사였다. 고3형이 채팅창에 도배를 하면 우리는 조용히 게임 종료 버튼을 눌렀다.


비단 우리는 게임으로만 밤을 지새웠던 것은 아니다. 이 노래가 내게 큰 의미를 부여한 공간은 바로 노래방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우리는 주말이 되면 노래방을 갔다. 10시 전에는 밤 장사를 해야 하니 미성년자는 나가야 한다는 노래방 주인아줌마의 간곡한 부탁에. 서비스 시간까지 꽉꽉 채워서 10시 전에 나가는 모범생들이었다. 노래방을 함께하는 멤버 중에는 부모님의 지독한 학구열에 의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던 전교 6등 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의 피날레 곡은 항상 <밤이 깊었네>. 과도한 학습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녀석은 비명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러댔다.


집이 잘살던 친구 한 명도 있었다. 학교에 오자마자 새로 산 '16 화음' 휴대폰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단음이어서 진동으로 알림 모드를 변경했던 친구. '8 화음'으로 다소 엉성하고 부족한 멜로디로 울려대던 휴대폰을 자랑했던 친구. 그 폰이 교실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두 조용히 침묵했다. 16화음으로 울리는 <밤이 깊었네> 멜로디가 교실 내에 울려 퍼졌던 그 찰나는 뇌리 속에 영원히 박혀있다.


핸드폰 벨소리에 울고 있던 시절. 나는 핸드폰이 없었다. 그나마 간간히 자정이 넘어선 시간에 친구들과 소통하기 위해 아버지 무음 휴대폰을 빌려 열심히 자판을 두들겨댈 뿐이었다.


"문자요금 많이 나온다, 아들. 그만 자고 휴대폰 내놔라."


아버지의 한 마디에 조용히 나는 휴대폰을 반납했다. 다음날에는 휴대폰을 사달라고 열심히 부모님을 졸라댔다. 엄마가 반쯤 설득당하셨을 때에 난 비로소 단음 핸드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 카이홀맨을 기억하는가? 머리가 비상하게 컸던 캐릭터. 덕분에 같은 반 얼굴이 큰 애들은 별명이 죄다 ‘홀맨'이었다. 홀맨은 당시 청소년들을 위한 파격적인 요금제였다. 한 달 문자 600건 무료. 그래서 나는 홀맨 요금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우리는 홀에 목숨을 걸었다. 매달 할당된 무료 건수를 다 쓰고 나면 거지처럼 홀을 서로가 서로에게 구걸해댔다.


같은 반 모두가 이별을 고하고 새 학년이 되던 날. 담임 선생님은 근엄한 목소리로 출석부에 적힌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면서 배정된 고등학교 이름을 알려줬다. 이별의 슬픔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학교를 마치고 곧장 노래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함께 불렀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나를 두고 떠나지 마라. 오늘 밤 새빨간 꽃잎처럼 그대 발에 머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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