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Need A Girl

태양 (2010.07.01)

by 안개홍

치마보다 청바지가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여자

김치볶음밥은 내가 잘 만들어 대신 잘 먹을 수 있는 여자

나이가 많아도 어려 보이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김치볶음밥? 풉!"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별의 상처 자국이 점차 희미해졌을 때 이 노래가 유행했다. 가사가 유치했는데 꽤나 직설적이었다. 뭔가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울그락 불그락한 거친 근육에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표현할 줄 아는 남자. 딱 그런 남성상이 떠오른 노래.


난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반복적으로 거울을 확인했다. 예비역이자 복학생. 완전한 남자라고 보기엔 다소 어설픈. 비교적 탄력 있는 피부와 듬성듬성한 수염이 공존하는 얼굴. 미간을 좁혀서 인상을 써보기도 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기도 했다. 광고학 전문용어로 포지셔닝. 내게 새로운 포지셔닝이 필요한 시기였다.


군인 신분으로 전 여자 친구 때문에 학교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간헐적으로 학교에서 휴가를 보내며 복학생 선배들과 대강대강 안면을 터왔다. 08학번 신입생도 아름아름 알고 지냈다. 그 덕에 복학 후 학교생활이 나름 순조로웠다.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남자라면 각진 군생활 이후 곡선으로 생겨먹은 사회의 느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색다르고 산뜻한 공기. 여학생과 남학생 비율이 7:3. 강의실 내에 진동하는 샴푸와 향수 냄새. 우습게도 공대생인 친구 녀석은 부러움을 눈에 가득 담은 채로 그 지독 하디 지독한 향수 냄새 좀 제발 맡아보고 싶다며 나를 따라 광고학 수업 몇 개를 도강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올 때 몇 번 눈인사를 나눴고 학교에 복학해 가볍게 인사하던 여자 후배 L이 있었다. 그 듬성듬성한 관계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계기는 내가 활동하던 사진동아리에 그녀가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신입생이었던 L는 어느새 대학교 3학년이 되어있었다. 그때와는 뭔가 달라진 느낌. 키는 작았지만 굴곡진 몸매. 제법 진해진 화장. 성숙하고 여성스러운 그녀의 옷 스타일. 변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그녀의 길고 긴 생머리뿐이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친근하고 반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인에게 친절한 그녀. 누구도 L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면 사람들은 한없이 밝아졌다. 일부 복학생 동기들은 그런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L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게슴츠레한 실눈으로 팔짱을 낀 채로 지그시 나를 염탐하던 복학생 A는 내게 말했다.


"야, 너 L이랑 어떻게 친해졌냐?"

"그야 그냥 같은 동아리니까."

"너... L 좋아하냐?"

"내가?"


가당치도 않았다. L은 내로라하는 학과 탑이었다. 난 분수를 확실히 파악할 줄 아는 사람. 넘볼 수 없는 곳이라고 실감하면 일찌감치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기야 생각해보니 그놈도 나같이 평범한 복학생이 L과 친하게 지내는 사실을 무척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역으로 질의했다.


"뭔 개소리야?"

"봐라, 내가 잘생겼으면 비범했으면 가까이 지낼 수 있겠냐? 괜히 오해받고 그럴 수 있잖아."

"아~ 그러니까, 네가 지극히 평범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없기 때문에 친해진거다?"

"그래! 그거."


대답을 하고 보니 조금 비참하긴 했다. 그래도 뭐, 현실을 사실로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덜 비참해지는 방법이었으니까. 친구는 수긍의 표현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거울을 봤다. 지극히 평범한 복학생. 내가 얻을 수 있는 바람직한 포지셔닝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L은 차치하더라도 나도 다시 연애를 해야 하고 학교도 다녀야 하는 이 마당에! 쓸데없는 이 포지셔닝으로는 승산이 없겠다 싶었다.


"가만있어보자, 보자. 김치볶음밥 하나는 내가 기깔나게 하니까."

"이 느낌 그대로 포지셔닝하고 대신 잘 먹을 수 있는 여자를 찾아보자."

“또 뭐 있지? 아 맞다, 글! 그래 적자, 적어!”


좌중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포지셔닝을 구축하기 위해서 기구한 노력들을 이어가던 2010년은 멜랑꼴리 한 해였다. L과 친분은 늦은 저녁 랜선을 통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이어나갔다.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복학생들의 시기 질투를 받는 것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구태여 무리해서 L과의 관계를 그릇칠 그 어떠한 이유와 근거도 없었다. '현실 만족'이라고 이 단어가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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